제발, 격납고 문을 열어!
수차미
Dockingmagazine에 실린 홍은미 평론가의 글을 읽었다. 글에서 인용된 니콜라 필리베르는 <파리 아다망에서 만난 사람들>에 관한 CNC와의 인터뷰에서 집단(collectif)이라는 말을 공동체주의적 결속과는 달리 이해한다. 그가 집단이라는 말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질적인 것과 개별성, 그리고 타자성이다. 이를 따른다면 집단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하나의 성질로 수렴한 결과라기보다, 서로 다른 상태를 유지한 채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 가깝다. 구성원이 바뀌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놓은 관계와 배치는 남아 이후의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신경망을 떠올려볼 수 있다. 뉴런 간의 관계는 단순히 서로 연결되어 있느냐의 여부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반복적인 활성은 연결 강도의 차이로 남을 수 있고, 이렇게 형성된 연결의 구조는 이후 어떤 활동 패턴이 다시 나타나기 쉬운지를 조건 짓는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뉴런이 동일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뉴런들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고 활성화되는가에 따라 전체의 상태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개인이 축적해온 경험 역시 이러한 신경회로의 연결과 활동에 흔적을 남긴다.
그렇다면 집단 역시 개별자들의 단순한 합이라기보다 개별자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배치로 생각해볼 수 있다. 집단의 사고란 구성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개별자들이 연결되면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의 활동 패턴이 출현하는 것에 가깝다. 개별자의 차이는 여기서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집단이 다른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영화도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극장은 흔히 어둡고 폐쇄된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가 하나의 거대한 화면을 바라보는 장소로 묘사된다. 그러나 하나의 스크린을 본다는 사실이 관객들을 동일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크린에 도착하는 순간 각자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이미 각자가 속해 있던 문화적 관계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활성화된다. 그렇다면 영화가 만들어내는 집단은 동일한 영화를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의 영화를 경유해 서로 다른 연결들이 일시적으로 하나의 배치를 이루는 상태에 가깝다. 그리고 그 연결망에 걸려드는 것은 관객만이 아니다.
영화와 비슷한 신호를 공유하는 다른 영화와 문화현상, 사물과 기억, 언어 역시 그 배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신경계가 직접 다루는 것이 사물 그 자체라기보다 감각기관을 거쳐 변환된 신호라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상의 출처나 범주보다 그것이 어떠한 패턴을 활성화하는가에 있다. 서로 전혀 다른 대상에서도 하나의 패턴이 발견될 수 있고, 반대로 하나의 대상에서 여러 패턴이 갈라져 나올 수도 있다. 영화라는 객체가 관객과 사회현상, 기억과 사물에 저마다 다른 연결을 활성화할 때, 이들을 둘러싼 배치(agencement)는 개별 요소들의 합을 넘어서는 하나의 사고를 형성한다. 이때 영화 자체와 영화가 들어가는 배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 번 완성된 영화의 이미지와 소리는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어 있지만, 그것이 접속하는 관객과 기억, 사건과 문화적 코드는 계속 달라진다. 영화는 변하지 않더라도 영화가 들어가는 배치는 변한다. 오히려 이러한 상대적인 고정성이 서로 다른 시공간의 무형적인 관계를 이어주는 지지대가 된다. 동일한 객체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각기 다른 관계를 활성화함으로써 서로 만나지 못했을 요소들이 같은 연결망 안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점은 어떤 패턴이 활성화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발견하고 정의할 것인지에 있다. 전혀 다른 대상들 사이에서도 연결고리는 생겨날 수 있다. 국가 단위의 전쟁이나 학살, 재난과 같은 사건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어떤 이미지나 서사, 감정의 코드를 발견하고 그것을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과 연결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연결을 통해 평소라면 접촉하지 못했을 타자의 존재를 감지하는 데 있다. 인간은 대개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연결을 따라간다. 취향이 비슷하고 생각하는 법이 유사한 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며, 자신이 살아가는 국가와 지역,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때 그 경계 바깥에서 발견되는 패턴은 인식의 외부와 접촉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환대 역시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면서도 그 사이에 접속 가능한 어떤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서 오히려 그 가능성이 생겨난다.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할 필요까지는 없다. 필요한 것은 이 넓은 세계에서 자신만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하는 일이다. 일생 동안 달의 앞면만을 바라본다면 세계에 대한 인식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면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보이지 않던 곳에서도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패턴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세워놓은 지성의 경계 바깥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감각하게 된다. 이를 전망대의 경험에 빗대어볼 수 있다. 한국에는 민간인통제구역 안에서 DMZ와 경계 너머의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들이 있다. 그곳에서 마주하는 것은 당장 건너가 접촉할 수는 없지만 눈으로는 확인할 수 있는 바깥이다. 이는 낯선 국가를 여행해 그 내부로 들어가는 것과도 다르다. 여기에서는 경계를 넘지 않은 채 경계 너머의 존재를 바라본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장소에 도착한 뒤에야 자신이 속한 세계의 바깥이 비로소 가시화되는 셈이다. 영화도 이처럼 여러 경계 너머의 타자를 감지하는 하나의 전망대로 기능할 수 있다. 영화는 평소라면 활성화되지 않았을 연결을 열어놓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활성화의 정도를 정확히 측정하는 일이 아니라 특정한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패턴이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둘을 같은 것으로 말할 수는 없다. 연결은 동일성의 증명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경험들이 잠시 접속할 수 있는 좌표에 가깝다. 각자가 다른 삶을 살아왔음에도 어떤 이미지와 사건, 감정과 언어에서 유사한 패턴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경유해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집단은 하나의 전망대라기보다 여러 전망대가 서로 연결된 관측망에 가깝다. 각자는 서로 다른 위치에 있고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이 보는 풍경이 전체일 수 없다. 다만 서로의 관측을 연결하면 혼자서는 볼 수 없었던 외부의 변화가 나타난다. 집단이 개별성을 필요로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두가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면 관측점이 아무리 많아져도 시야는 넓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이들의 경험과 감각이 연결될 때 비로소 집단은 개별자가 지닌 시야의 바깥을 감지할 수 있다.
그 구심점으로서 영화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한데 모으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이들에게 동일한 판단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영화가 서로 다른 관객에게 다른 기억과 문화적 코드, 다른 영화와 사회적 사건을 활성화하면서 각자의 관측점이 하나의 객체를 경유하게 할 뿐이다. 영화에 특정한 제작 의도나 방향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배치 전체는 하나의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영화라는 비교적 고정된 객체를 중심으로 매번 다른 관계가 만들어지고, 관객은 그 관계를 통해 자신이 서 있지 않은 곳에서 관측된 풍경을 전달받는다. 집단 역시 특정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모든 구성원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구조라고만 볼 수 없다. 집단이 먼저 하는 일은 바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것이다. 전망대에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 자체로 어떠한 판단을 내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세계가 여기까지이며, 그 너머에도 계속해서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알려준다.
그런 의미에서 집단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이라기보다 바깥을 탐험하기 위해 마련된 우주선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지식과 인지의 경계 바깥을 외계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항해의 첫 번째 목적은 외계 문명을 정복하거나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이 넓은 우주에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다. 물론 바깥으로 향하는 일은 안전하지 않다. 자신이 알고 있는 패턴은 낯선 대상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지만, 동시에 그 대상을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오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가 발견했다고 생각한 신호가 실제로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보장도 없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같은 수신호가 전혀 다른 뜻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연결은 언제나 오독의 가능성을 함께 품는다. 그렇기에 영화를 탐험하는 일은 안락하고 편안한 모험으로만 남을 수 없다. 자신이 아는 패턴에 이끌려 나아가되, 그것이 아직 모르는 세계 전체를 설명한다고 믿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항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자신이 아는 것들에 이끌려 발견한 지점들을 하나씩 연결하고, 서로 막혀 있던 경계 사이에 임시적인 항로를 만든다.
아무도 외계로 나서지 않는다면 행성 사이에 사람과 물자를 연결할 수 없듯,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패턴을 바깥으로 확장하지 않는다면 각자는 자신이 속한 고립계를 벗어날 수 없다.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항행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더 많은 정박점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도달한 곳을 다른 이가 이어받고, 다른 누군가가 발견한 신호를 다시 자신의 위치에서 해석한다. 이 과정에서 각자는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 같은 세계를 보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위치에 머문 채 서로의 바깥을 볼 수 있게 된다. 필리베르가 집단의 조건으로 이질성과 개별성, 타자성을 강조한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은 곳에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서로 막힌 우주 사이를 항행하는 데 필요한 것은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이미 알고 있는 세계로 환원하지 않는 태도다. 낯선 곳에서 발견한 패턴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상대의 세계 전체를 설명한다고 믿지 않는 일이다. 필요한 것은 어쩌면 단 하나, 이 세계가 하나의 단일한 체계로 수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발, 격납고 문을 열어!"는 아래의 글을 참조하였습니다.
http://dockingmagazine.com/menu/contentsList/19/?mtv=7293
DOCKING
dockingmagazine.com
그 글에는 아래 인터뷰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https://www.cnc.fr/cinema/actualites/nicolas-philibert---je-fais-des-films-a-partir-de-mon-ignorance-et-de-ma-curiosite_1932933?utm_source=chatgpt.com
Nicolas Philibert : « Je fais des films à partir de mon ignorance...
www.cnc.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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