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예: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The Art of Life: David Graeber and Alfred North Whitehead
강연: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번역: 박기형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일자: 2022. 04. 21.
*출처: https://youtu.be/axd9yPaXqUU?si=ZyUC33bjVTAC8IBi
[사회자 – 바실리]
여러분 안녕하세요.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의 철학을 주제로 기획된 연속 강연, 그 세 번째 시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강연 시리즈는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올렸던 하나의 트윗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트윗은 지금 채팅창에 공유해드렸는데, 그레이버는 거기서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자들을 0점에서 5점까지의 척도로 평가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철학자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입니다. 그레이버는 그에게 5점 만점에 4점을 주었습니다. 스피노자(Spinoza)나 바디우(Badiou)가 받은 점수보다는 낮지만, 그래도 꽤 높은 점수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 강연을 맡아 주실 분은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선생님입니다. 아마도 샤비로 선생님은 화이트헤드가 최고점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점을 여러분께 설득하려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티븐 선생님, 안녕하세요.
샤비로 선생님은 웨인주립대학교(Wayne State University) 영어과의 석좌교수(Distinguished Professor)이시고, 문학과 학술 분야를 넘나드는 수많은 논문과 저서를 집필해 오셨습니다. 오늘 강연과 직접 관련된 책 두 권만 말씀드리면, 『기준 없이(Without Criteria: Kant, Whitehead, Deleuze and Aesthetics)』, 『사물들의 우주(The Universe of Things: On Speculative Realism)』를 들 수 있겠습니다.[1] 또한 샤비로 선생님은 <The Pinocchio Theory>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신데, 그곳에 실린 많은 글 가운데 오늘 주제와 특히 관련된 글이 두 편 있습니다. 하나는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책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Fragments of an Anarchist Anthropology)』[2]에 대한 서평이고, 다른 하나는 「Panpsychism and the Play of Panpsychism」이라는 글입니다. 이 글에서 선생님은 그레이버가 에세이 「우리가 재밌을 수 없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What’s the Point If We Can’t Have Fun?)」[3]에서 제시한 ‘유희적 자유(ludic freedom)의 원리’를 다루고 계십니다.
오늘 밤 샤비로 선생님께서 해 주실 강연 제목은 “David Graeber and Alfred North Whitehead and the Art of Life”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스티븐 선생님께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본 강연 - 스티븐 샤비로]
네, 감사합니다. 먼저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저를 초청해 주신 바실리와 니카에게 감사드립니다. 또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네, 제 강연 제목은 “The Art of Life: David Graeber and Alfred North Whitehead”입니다.
저는 먼저 화이트헤드의 저서 『이성의 기능(The Function of Reason)』에 나오는 구절 하나를 인용하며 시작하려 합니다.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세 갈래의 충동(urge)에 대해 논의하는데요.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는 것(to live), 잘 사는 것(to live well), 더 잘 사는 것(to live better).”[4] 실제로 그는 삶의 기예(the art of life)란 첫째, 살아 있는 것(alive), 둘째,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살아 있는 것(to be alive a satisfactory way), 셋째, 그 만족을 더 증대시키는 것(to acquire an increase in satisfaction)이라고 말합니다.
좋습니다, 이제 본격 시작해 보겠습니다.
저는 데이비드 그레이버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약간의 인연이 있긴 합니다. 우리 둘 다 뉴욕 시에서 자랐고,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주택을 제공하기 위해 지었던 주택협동조합 단지에서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거든요. 저는 데이비드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고, 인류학자도 아닙니다. 저는 미국의 한 대학 영어학과에서 영화 연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레이버의 저작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제 블로그에 그의 책 두 권에 대한 서평을 쓴 적이 있고, 세 번째 책에는 표지 뒷면에 실릴 짧은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습니다. 또 트위터를 통해 짧게 메시지를 주고받은 적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강연에서 그레이버의 사상이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유산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레이버는 여러 차례 화이트헤드를 자신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로 언급하지만, 제가 아는 한 그는 화이트헤드에 대해 길게 글을 쓴 적이 없으며, 적어도 그에 관한 실질적인 출판물을 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화이트헤드의 생애와 이력, 그리고 그의 사상이 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개요를 제시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비록 그레이버가 화이트헤드를 거의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제 생각에 그레이버의 작업과 밀접하게 관련 있어 보이는 화이트헤드 사상의 몇 가지 측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화이트헤드에 대한 모든 세부사항을 다 알고 계시지는 않을 거라고 가정하겠습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신 분들이라면, 익숙한 내용을 다시 다루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1.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1861년 영국에서 태어나, 1947년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수학자로 시작하여, 점차 형이상학과 존재론 쪽으로 관심사를 옮겨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가리키는 말로 형이상학보다는 우주론을 더 선호했습니다.
사상가이자 저술가로서 화이트헤드의 경력은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해 1884년에 졸업했고, 1910년까지 그곳에 머물며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습니다.
이 시기 전체에 걸쳐 그의 주된 관심사는 수학의 토대(foundations of mathematics)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수학이 진정으로 연역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수학은 구체적인 경험 사례들과는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정합적이고 일관되며 정확하다고(coherent, consistent, and accurate)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참으로 그런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만약 수학의 진리성을 보장할 수 없다면,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는 꽤나 편집증 같은 질문이지만, 서구 사상사의 전체를 관통하며 널리 공명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데카르트에서 칸트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근대 철학은 끊임없이 회의주의의 위협에 시달려 왔습니다.
데카르트는 감각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실재하는 진짜 세계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고민합니다. 그가 말하듯, 어쩌면 어떤 ‘악마(evil demon)’가 끊임없이 거짓된 감각들을 우리에게 주입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는 우리가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사실은 유령을 감추고 있는 모자와 망토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혹은 스프링으로만 움직이는 더미들(dummies)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 자문합니다.
이런 걱정이 다소 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 문제들을 ‘통 속의 뇌(brain in a vat)’에 관한 공상과학 이야기나, 영국 철학자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의 ‘시뮬레이션 가설(simulation hypothesis)’ – 곧 우리가 고도로 발달한 슈퍼컴퓨터 안에서 실행되는 시뮬레이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가설 – 같은 형태로 여전히 마주합니다.
서양 철학의 지배적인 흐름은 이런 종류의 문제들에 집착해 왔습니다. 이 흐름에서는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안다고 주장하려면, 먼저 우리가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방식을 규명해야 하며, 그렇지 않고서는 정말로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여 주류 서양 철학에 따르면, 세계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다루는 이론, 즉 존재론에 앞서,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를 다루는 이론, 즉 인식론이 먼저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레이버의 표현을 빌리면, 데카르트 이래로 “철학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이 질문들은 점점 과학의 몫으로 넘겨졌다)에서 등을 돌리고,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들로 향했다. 이 점에서 흄(Hume) 식의 회의주의와 칸트(Kant)의 선험적 답변은 분명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레이버는 이러한 정식화가 행위의 영역(domain of action)을 기묘하게 지워버리는 결과를 낳는다고 덧붙입니다. 그는 철학자들에 의해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고, 알며, 표상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사람들이 세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세계를 어떻게 형성하며, 또 세계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물음 - 나아가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말할 것도 없고 - 과 인위적으로 분리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이 구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돌아와 다루겠습니다.
2.
화이트헤드는 수학적 확실성(mathematical certainty)의 문제에 몰두하며 학문 경력의 전반부를 보냈습니다. 1901년부터 1912년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는 한때 자신의 제자였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과 함께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상징논리학과 집합론을 통해 수학의 토대를 궁극으로 완벽하게 정초하려는 거대한 시도였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해할 능력이 안 되거든요. 아무튼 그들은 10년이 넘게 이 작업에 매달렸고, 세 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출간했음에도, 끝내 이 프로젝트를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화이트헤드와 러셀이 더 노력하기를 포기한 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다른 사상가들이 완전하고 모순 없는 수학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증명해 냅니다. 1930년, 쿠르트 괴델(Kurt Gödel)은 어떤 논리적, 수학적 체계도 그 체계의 틀 안에서는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할 수 없는(undecidable) 명제들을 필연적으로 생성한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즉, 이러한 명제들은 반례를 들어 거짓임을 입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참임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알론조 처치(Alonzo Church)와 앨런 튜링(Alan Turing)은 어떠한 알고리즘 절차로도 계산할 수 없는 수학적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서로 독자적으로 규명하였습니다. 오늘날 컴퓨터 공학에서는 이를, 이른바 ‘정지 문제(halting problem)’라고 부릅니다. 만약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 문제들 중 하나를 해결하려고 하면, 전원 코드를 뽑지 않는 한 프로그램은 멈추지 않고 영원히 돌아가기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프로그램이 그런 식으로 작동할지를 미리 알 방법도 없습니다.
이 모든 발견이 시사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당시 화이트헤드와 러셀은 알지 못했지만, 『수학 원리』 배후에 있던 기획 자체가 애초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화이트헤드의 초기 작업과 후기 작업 사이의 연결고리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화이트헤드는 이런 결과들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이미 ‘확실성’에 관한 탐구를 포기했습니다. 『수학 원리』를 집필하면서 고군분투한 끝에, 그는 ‘확고한 기초(absolute foundations)’라는 발상 자체가 망상(chimera)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겁니다.
초기에 시도한 논리학 프로그램이 실패로 돌아가자, 화이트헤드는 점차 수학을 떠나 형이상학과 우주론으로 향하게 됩니다. 『수학 원리』는 화이트헤드와 러셀이 “1 더하기 1은 2다”라는 명제를 그들 스스로 만족할 정도로 엄밀하게 증명하고자 수백 페이지를 할애한 걸로 악명 높습니다. 그런데 말년에 쓴 글 가운데 하나에서 화이트헤드는 “하나와 하나가 만나 둘이 된다(one and one make two)”라는 명제조차도 필연적인 보편 진리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이 명제 역시 다른 모든 정식화(formulation)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상황에서만 말이 되는 정식화일 뿐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화이트헤드는 두 사물, 가령 불꽃과 화약이 만나는 공재(共在; 함께함, togetherness)가 폭발을 일으키며, 이는 “두 개의 사물”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바와는 무척 다르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예시가 있습니다. 조리 중인 프라이팬 위에 식용유 방울 두 개가 떠 있다고 해 봅시다. 이 두 방울이 흐르다 서로 합쳐지면 하나의 방울만을 이루게 됩니다. 이 경우에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1이 됩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화이트헤드는 “하나와 하나가 만나 둘이 된다”라는 명제가 상황 변동에 따른 변화들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가정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상황들이 바뀔 때, 어떤 변화가 중요하고 어떤 변화가 중요하지 않은지를 미리 결정할 방법은 없습니다.
화이트헤드가 여기서 끌어내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논리(logic)는 대단히 훌륭한 도구이지만, 그 자체로는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충분하고 명시적인 분석(adequate explicit analysis)”에도 전적으로 기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3.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위기(crisis)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후기의 화이트헤드는 이를 오히려 기회로 여깁니다. 토대의 불안정성, 이전에는 당연시되던 확실성의 붕괴, 전반적인 파편화의 감각은 모두 20세기 초 서구 근대성에 만연한 특징들입니다. 이 시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견했듯이,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 사라지는(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시기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격변을 주로 수학과 물리학의 관점에서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수학에서 겪은 곤경 외에도, 그는 자신이 케임브리지에서 처음 공부하던 19세기 말을 물리학자들이 자연의 기본 법칙들을 거의 다 알고 있고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대체로 이해하고 있다고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로 회상합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지적하듯이, 20세기 첫 10년 동안 물리학의 안정된 토대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적 사유의 낡은 토대들은, 미시적 차원과 우주적 차원 모두에서 쏟아져 나온 새로운 발견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변해 갔습니다. 물리학은 말 그대로 밑바닥부터 다시 발명되어야 했습니다. 뉴턴의 물리학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이론들에게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 모든 일이 있은 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물리학자들은 여전히 이 두 이론 모두에 의존하면서도, 비록 두 이론이 모두 잘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서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여전히 불편해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려는 요점 중 하나는, 화이트헤드가 그런 종류의 걱정에 매달리기를 극복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곧 보여 드리겠지만, 그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사상과 실천의 다른 영역에서 벌어진 근대성의 혁명들과는 훨씬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사회과학에서 일어난 격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나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같은 인류학자들,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같은 사회학자들, 막스 베버(Max Weber) 같은 정치이론가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화이트헤드가 참고하는 프레임 자체에서 아예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술과 문화에 관해서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술에서의 모더니즘(modernism)을 떠올릴 때 생각하는 것과 달리, 화이트헤드의 감수성은 여전히 19세기 문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가 모더니즘 문화와 미학적 격동의 중심에 있던 인물 중 하나인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과 실제로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말입니다.
『수학 원리』의 기획을 완결시키기를 포기한 뒤, 화이트헤드와 러셀은 서로 다른 방향의 지적 경로를 걸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화이트헤드는 당시 대부분의 영국 지식인(intelligentsia)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했습니다. 러셀은 여기에 단호히 반대했는데, 그 점에서는 러셀이 옳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거의 모든 면에서 보면, 영미권의 주류 사상의 틀 안에 머문 쪽은 러셀이었고, 화이트헤드는 점차 그 틀 바깥으로(outlier) 벗어났습니다.
러셀은 논리 분석의 필연적 한계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논리 분석의 중심성을 고수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오늘날 우리가 분석철학이라 부르는 분야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반면 화이트헤드는 그 길을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4.
화이트헤드의 학문 경력에서 두 번째 단계는 1910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답답한 지적 분위기를 느꼈던 케임브리지를 떠나 런던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곳에서 화이트헤드는 교육 개혁에 관여하게 됩니다. 1910년대의 교육 개혁이란, 이전까지 남성들의 전유물이던 대학의 문호를 여성들에게 개방하고, 교육과정의 중심을 고전(classics)에서 현대적 주제들로 바꾸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그는 토대들(foundations)보다는 결과들(consequences)에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자신의 지적 초점을 순수 수학에서 응용 수학으로 옮겼습니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특수·일반 상대성 이론 이후 중요한 쟁점이 된 시공간의 기하학에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런 새로운 초점과 자신이 직접 겪은 토대 붕괴에 대한 경험이 더해지면서, 화이트헤드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철학이라고 부르는 영역에 속하는 더 넓은 물음들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오늘날 그의 첫 주요 철학 저술로 평가받는 두 권의 책 – 『자연의 개념(The Concept of Nature, 1920)』과 『과학과 근대세계(Science and the Modern World, 1924)』[5] – 에서 그 질문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습니다.
화이트헤드의 학문 경력에서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는 1924년, 즉 그가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 철학과에 합류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출발해, 미국 케임브리지(하버드가 위치한 도시)에서 지적 여정의 끝을 맺게 된 셈입니다.
이때 비로소 화이트헤드는 수학자가 아닌 철학자로서 확실하게 인정받게 됩니다. 하버드에서 화이트헤드는 특수한 분야인 과학철학에서 더 넓은 형이상학적 사유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하버드 재직 기간 동안 여러 중요한 책을 출판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대작(magnum opus)으로 평가되는 1929년에 나온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6]입니다. 그는 1937년, 76세의 나이로 마침내 강단에서 은퇴했고, 마지막 저서인 『사고의 양태(Modes of Thought)』는 그 이듬해인 1938년에 출간되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하버드 시절 동안, 철학계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서 상당한 유명세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는 그 명성이 상당히 희미해졌습니다. 그의 철학이 너무 독특했던(idiosyncratic) 나머지, 추종자들을 많이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후반, 화이트헤드는 영미 학계에서 거의 무시되었습니다. 유일한 예외라면, 그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계승해온 소수의, 주로 개신교 계열의 신학자 그룹 정도뿐 이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적어도 몇몇 영역에서는 화이트헤드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저 역시 이런 부흥(revival)의 흐름에 참여해 왔습니다. 흥미롭게도, 우리 둘 다 철학자가 아니며, 철학과에서 가르친 적도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변화와 새로움을 향한 관심을 보장받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모든 것은 어느 정도 경직(ossification)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이트헤드 연구라는 작은 하위 분과조차 예외는 아닙니다. 그 결과 논의의 상당수가 협소하게 몰려 있거나, 말 그대로 학자연하는(scholastic) 양상을 띠곤 합니다. 용어들 사이의 미세한 차이나 『과정과 실재』의 특히 난해한 대목들을 두고 끝없이 논쟁하는 식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자신도 이런 종류의 토론을 읽고 참여하는 것을 꽤 즐깁니다. 화이트헤드는 서구 철학 전통의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칸트나 헤겔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진정한 난이도와 사유의 풍부함을 제공합니다. 물론 그들만큼 널리 읽히거나 인용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런 세밀한 논의들은 그레이버가 화이트헤드에 대해 가졌던 관심과는 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점은, 화이트헤드가 사후 수십 년 동안 학계에서 소외되어 있었음에도, 시인과 음악가들 같은 이들을 포함한 더 넓은 문화 영역에서 그가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해 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만들어낸 여러 신조어(neologisms)와 종종 복잡하게 얽힌 논증들에 담긴 세부 사항들을 차치하고서, 화이트헤드는 우리에게 주류 철학과는 확연히 다른, 세계를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합니다. 이 강연의 나머지 부분에서 저는 화이트헤드의 세계관에서 몇 가지 일반적인 특징들을 추려 보고자 합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데이비드 그레이버에게 중요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지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5.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화이트헤드의 성숙한 철학은 미시적 영역과 거시적 영역 모두에서 당시 새롭게 등장한 과학적 발견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이러한 발견들과,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커다란 흥분을 느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서로 얽힌 물리적 과정들뿐 아니라 무작위성(randomness)과 양자적 비결정성(quantum undecidability)을 강조하는 이 새로운 이론들이, 우리가 당연하게 전제해 온 형이상학적 가정들을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주가 공간 속을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당구공처럼 서로 부딪히는 단단한 물질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낡은 과학의 그림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1814년, 프랑스의 위대한 물리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어느 한 시점에, 자연을 움직이게 하는 모든 힘들과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위치를 알고 있는 어떤 지성이 있다면, 그 지성은 그로부터 미래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라플라스는 당시대에 실제로 그런 지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원리적으로는 그 말이 참이라고 믿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종류의 결정론 – 그가 한때 수학에서 찾으려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종류의 확실성 – 이 실제로 도달 불가능할 뿐 아니라, 원리적으로도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했습니다. 18·19세기 동안 과학자들을 이끌었던 실증주의, 유물론, 그리고 결정론은, 상호작용하는 장들(fields)과 힘들(forces)로 이루어진 세계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화이트헤드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이후 지난 한 세기 동안 전개된 물리학의 발전 역시, 그의 생각이 옳았음을 입증하였습니다.
첫째로, 양자 수준에서의 불확정성(indeterminacy)을 피해 갈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둘째로, 오늘날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고 부르는 문제 – 즉 감지 한계(threshold) 아래에 있는 특정 시점에서의 미세한 차이가 나중에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 – 를 고려해야 합니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발견으로 인해 이미 훼손된 결정론적 유물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고수함으로써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그가 시도한 노력 중 일부는 현대 과학의 상태에 더 적합한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화이트헤드의 기획은 전혀 반대 방향으로의 움직임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재(reality)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설명들이 일상 경험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물리적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과, 물리학자들이 그걸 기술하고 이해하는 방식 사이에는 점점 더 큰 간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화이트헤드의 제자였던 물리학자 아서 에딩턴(Arthur Eddington)은 1920년대에 쓴 유명한 글처럼, 탁자와 같은 단순한 물체에 대해서도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설명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 탁자, 즉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 만나는 탁자는 단단하고 실체적입니다. 하지만 에딩턴은 두 번째 탁자도 있다는 걸 상기시킵니다. 바로 현대 물리학이 서술하는 동일한 객체(the same object)로서의 탁자입니다. 에딩턴에 따르면, 과학적 탁자는 대부분 텅 비어(emptiness) 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전하(electric charges)들이 듬성듬성 떠다니는 허공(void)입니다. 탁자가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자와 분자 자체도 대부분 빈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미시적 영역의 어떤 것도 우리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탁자와 조금도 닮지 않았습니다. 에딩턴은 현대 물리학이 우리의 직접적 경험 속 첫 번째 탁자를 몰아내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탁자, 즉 과학적 탁자만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가 “그게 무엇이든 간에(whatever that might be)”라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화이트헤드 후기 철학의 주요한 추진력은 바로 이런 종류의 이분법들을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연의 이분화(bifurcation of nature)’라고 부르는 것에 도전합니다. 이 이분화란, 우리가 에딩턴의 두 탁자 사이에, 혹은 주관적 실재와 객관적 실재 사이에 긋는 구분을 가리킵니다. 훗날 분석철학자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가 ‘현시적 이미지(manifest image)’와 ‘과학적 이미지(scientific image)’라고 부른 바로 그 구별 말입니다.
근대 서구 사상에서 우리는 우리 너머의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과, 우리가 그것들을 지각하는 행위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덧붙이는 “심리적 부가물(psychic additions)” – 이 표현은 화이트헤드의 것입니다 – 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에딩턴은 이 대비를 20세기 물리학의 언어로 다시 표현했을 뿐이고, 사실 이러한 분할은 적어도 존 로크(John Locke)가 물리적 대상들의 제1성질(primary qualities)과 제2성질(secondary qualities)을 구분했던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크에 따르면, 탁자의 크기나 모양 같은 제1성질은 우리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세계 안에 실제로 존재합니다. 반면 색깔과 같은 제2성질은 실제로 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마음과 외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질 뿐입니다. 예를 들어, 나뭇잎은 실제로 바람에 흔들리고, 실제로 햇볕에서 에너지를 끌어내며, 실제로 특정 파장의 빛을 반사합니다. 그러나 로크의 이론에 따르면, 이 잎들은 실제로 ‘초록색’인 게 아닙니다. 색깔은 사물의 실제 성질이 아니라, 전자기 복사의 특정 주파수를 수용하면서 우리 마음이 처리한 결과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화이트헤드가 반대하고자 했던 세계관입니다. 그는 이 사고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조금 긴 인용이지만,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제가 반대하고 있는 이 이론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은 자연을 두 영역, 즉 알아차림(awareness)을 통해 포착된 자연과 알아차림의 원인인) 자연으로 이분화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통해 포착된 사실로서의 자연은 그 안에 나무의 푸르름, 새들의 노래, 태양의 따뜻함, 의자의 단단함, 벨벳의 감촉을 담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의 원인으로서의 자연은 겉으로 나타나는 자연에 대한 알아차림을 낳도록 정신을 촉발하는 분자와 전자의 추측 체계입니다. (이 두 자연이 만나는 지점이 정신인데, 인과적 자연은 (정신에) 유입하고, 나타나는 자연은 (정신으로부터) 유출합니다.)”[7]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개념』의 상당 부분을 이와 같은 자연의 이분화를 비판하는 데 할애합니다. 이후의 저작들에서는, 이 이분화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삼아 논의를 더 멀리 진전시킵니다. 자연이 이분화되면, 한쪽에는 감각 경험이, 다른 한쪽에는 기본적인 물리 입자들이 놓입니다.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된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물리학과 분석철학은 입자들을 다루고, 심리학과 현상학은 감각 인상들을 다루는 식입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우리가 이 이분화를 완전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석양의 붉은 빛은 과학자들이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하는 분자와 전기파 못지않게 자연의 일부여야 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우리가 자연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같은 배를 탔다(in the same boat)”고 강조합니다. 함께 가라앉거나 함께 헤엄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화이트헤드는 물리과학과 오늘날의 분석철학이라 알려진 것들이 보여주는 환원주의(reductionism)를 거부합니다. 이는 현상학이라는 철학이 하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해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화이트헤드는 현상학적 접근도 똑같이 거부합니다. 그가 보기에 현상학 역시 분석철학과 마찬가지로, 그림의 절반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석양의 붉은 빛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원자와 분자를 무시하는 것 또한 일종의 환원입니다. 핵심은 이 둘 - 석양의 붉은 빛과 분자·전기파 - 가운데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에 종속시키거나, ‘해명했다’는 이름으로 설명에서 지워 버리지 않고, 두 가지 모두를 하나의 정식화 안에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현상학은 석양의 빛나는 붉은 색을 특권화하고, 과학은 태양에서 나와 구름을 뚫고 우리 눈으로 들어오는 광자(photons)를 특권화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다른 하나의 희생 위에서 특권화하는 것을 불만족스럽게 여깁니다.
6.
이런 종류의 분열에 대응하기 위해, 화이트헤드는 세계가 본질적으로 고정된 실체들(substances)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행 중인 과정들(ongoing processes)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을 구축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우주의 궁극적인 구성 요소들이 지속하는 사물들이 아니라 찰나적인인 사건들(momentary events)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단단하고 영속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미시적 차원에서 보면, 예컨대 바위는 물리학이 말하듯 전자들의 웅성거림(buzz of electrons)입니다. 그러나 거시적 차원에서도 바위나 탁자는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는 정적인 객체가 아닙니다. 시간이 흘러도 동일하게 남아 있으려면, 그런 대상들조차도 끊임없이, 그리고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갱신해야만 합니다. 생물학은 유기체가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이 점이 이른바 살아 움직이지 않는 객체들(inanimate objects)에서도 사실이라는 걸 물리학이 말해준다고 주장합니다.
실존(existence)은 ‘상태(state)’가 아니라 ‘활동(activity)’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이라고 불리는 입장의 기초입니다. 화이트헤드 자신은 이를 유기체 철학(philosophy of organism)이라고 불렀는데, 그건 가장 단순한 물질의 조각들조차도 살아 있는 유기체와 유사한(analogous) 방식으로 기능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존재의 근본 단위를 가리키기 위해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현실적 계기들은 낡은 물리학의 원자나, 심지어 새로운 물리학의 소립자와도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체가 아니라 사건, 곧 ‘사물(things)’이라기보다 해프닝(happenings)이기 때문입니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계기를 “경험의 방울(drop of experience)”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현실적 계기는 단순히 공간 안에 위치한 대상이 아니라, 발생하고 완결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현실적 계기들은 외부에서 자신에게로 작용해 오는(impinging) 여러 힘들을 하나로 모아 통합(integration)하는 것입니다. 각 계기는 이 다양한 힘들을 새로운 하나의 통일성(unity) 안으로 가져오며, 그로 인해 이전에는 존재한 적 없던 새롭고 고유한(new and unique)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새로운 존재(entity)가 산출될 때, “다자가 일자가 되고, 일자만큼 증가한다(the many become one, and are increased by one)”고 말합니다.
이 현실적 계기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관계적(relational)입니다. 하나의 계기는 다른 계기들과의 관계들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각각의 현실적 계기는 절대적인 개체(individual)이기도 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개체를 ‘자기초월체(superject)’ 혹은 ‘자기초월적 주체(subject-superject)’라고 부르는데, 각 계기가 자기만의 특수한 관점에서 그 관계들을 경험하는 방식 때문에 자기 안으로 닫혀 있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는 어느 정도의 절대성(absoluteness)을 지닙니다. 왜냐하면 현실적 존재는 자기 창조(self-creation)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발생시킨 조건들만으로는 완벽히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이기 때문입니다.
화이트헤드는 하나의 현실적 계기가 다른 계기들의 측면들을 받아들이거나(takes up), 움켜쥐거나(grasps), 느끼거나(feels) 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존재(being) 안으로 직조하는[엮고 짜는, weave]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파악(prehension)’이라는 용어를 고안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통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을 일반화한 개념입니다. 파악은 파악하는 자(perceiver)와 파악되는 것(perceived) 사이의 접촉(contact)입니다.
하지만 파악이 반드시 의식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실 화이트헤드에게서 파악은 대개 의식적이지 않습니다. 의식(consciousness)은 인간이나 다른 동물들처럼 현실적 계기들의 고도로 복잡한 사회들(very high-grade complex societies)에서만 나타나는, 드물고 특별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파악, 혹은 느낌(feeling)의 기본 구조는 모든 존재에 적용됩니다. 가장 복잡한 생명체들에서부터 가장 단순한 아원자 입자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나머지 부분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으며, 우리의 가장 추상적인 생각과 가장 정제된 감정들 또한, 근본적으로는 이른바 무생물 물질 속에서도 일어나는 동일한 기본 과정이 발전된 형태입니다.

7.
지금까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설명하는 데 이렇게 공을 들인 이유는, 이것이 데이비드 그레이버 사상의 기반들(underpinning)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레이버는 2019년의 한 트윗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사실 유물론과 관념론은 그저 시간에 대한 이론일 뿐이지 않을까?” 그의 말에 따르면, 유물론은 과거가 이미 고정되어 있다는 인식입니다. 즉, 과거는 이제 더 이상 바뀔 수 없는 물질적 실재입니다. 반대로 관념론(idealism)은 미래가 하나의 관념(idea)이라는 인식입니다. 즉, 미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과거에 대해서는 유물론자이고, 미래에 대해서는 관념론자라고 본다.” 자, 이 정식화는 화이트헤드의 시간 분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과거는 이미 확정된 사실, 혹은 그가 “완고한 사실(stubborn fact)”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영역입니다. 한 번 일어난 일들은 더 이상 변경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객관적으로 ‘거기에’ 존재하며, 우리는 좋든 싫든 그것들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이곳은 원인이 필연적으로 결과로 이어지는, 작용인(efficient causality)의 영역입니다. 과거의 사물들은 우리가 파악해야 할 객체들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느끼고, 그것들을 우리 자신의 진행 중인 경험을 구성하기 위한 여건(data)으로 사용합니다.
반면에 미래는 가능태(잠재성, potentiality)의 영역입니다. 아직 현실적(현행적, actual)이지 않습니다. 미래에 속한 것들은 우리가 손에 움켜쥘 수 있는 객체들이 아니라, 화이트헤드가 “영원한 객체(eternal objects)”라고 부르는 것들, 곧 순수한 가능태들(pure potentials)이자 추상적 형식들입니다. 이것들은 아직 구체적으로 행해지지(enacted) 않았다는 점에서, 물리적(physical)이라기보다는 정신적(mental)입니다. 미래는 목적인(final causality), 곧 목적론(teleology)의 영역이며, 여기서 우리는 어느 정도 우리 자신이 결정할 자유가 상당히 있는 목표를 향해 이끌립니다.
마지막으로 현재는 자기 창조, 혹은 화이트헤드의 용어로는 합생(concrescence)의 과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의 완고한 사실들을 미래의 열린 잠재성으로 변형합니다.
그레이버와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에게서도, 우리는 과거로부터는 제약을 받지만, 미래에 관해서는 자유롭습니다. 과거가 고정된 물리적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과거에 대해 유물론자이고, 미래가 열린 가능성과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미래에 대해서는 관념론자입니다. 그리고 자유(freedom)는 우리가 전자(과거)에서 후자(미래)로의 이행을 협상하는(negotiate) 방식(the way)입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조건들을 바꿀 수 없지만, 이 조건들에 어떻게 반응할지, 그리고 미래에 그것들로 무엇을 빚어낼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데이비드 그레이버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물리적 실재를 비환원적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자연주의(scientific naturalism)와 인간의 자유를 대립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자유는 이미 자연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레이버는 화이트헤드가 “단순 정위의 오류(fallacy of simple location)”라고 부른 것을 비판하면서 이 점을 언급합니다. 단순 정위의 오류란, 어떤 물리적 존재(entity)가 공간의 특정 부피 안에, 정확히 ‘여기’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공간적 위치를 갖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레이버는 우리 대부분이 자신을 단일한 물리적 위치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만, 우리의 몸은 피부 표면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입으로] 들이마시는 공기, [발로] 딛고 있는 땅, [손에 쥐고] 쓰는 도구들과 물리적으로 연결되어(connected)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시간적으로도 분산되어(distributed) 있습니다. 기억과 기대(예기 豫期, anticipation)는 단순한 정신적 행위들이 아니라, 우리 물리적 존재(being)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고정된 실체들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들이기 때문입니다.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단 하나의 순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품은 채 미래를 향해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접점, 곧 비판적 실재론의 철학자 로이 바스카(Roy Bhaskar)가 인식론적 오류(epistemic fallacy)라고 부른 것에 대한 그레이버의 비판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인식론적 오류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과 세계 그 자체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혼동하는 실수를 가리킵니다.
앞서 말했듯이,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은 인식론에 집착해 왔고, 그 과정에서 종종 존재론을 배재하였습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정확한가만을 걱정하면서, 정작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세계 안에 깊이 묻어 들어(embedded)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레이버는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를 다룬 유명한 에세이[8]에서 이 문제를 논의합니다. 그는 많은 인류학자들이 “서로 다른 문화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산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레이버는 이것이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라고 주장합니다. 세계는 오직 하나, 즉 자연적 실재만이 존재합니다. 다만 이 실재가 너무 풍부하고 복잡해서, 그 어떤 단일한 문화적 체계라 해도 그것을 완전히 망라(exhaust)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란 동일한 실재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거주하며, 동일한 실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레이버는 이 에세이의 각주에서, 이런 입장을 화이트헤드와 명시적으로 연결합니다. 그는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이 원인과 결과, 주체와 객체 같은 인간 경험의 기본 범주들이 단지 인간 정신의 투영이 아니라 실제로 우주 자체의 특징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연의 이분화를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말합니다. 예컨대, 인과성(causality)은 칸트가 생각했듯이 우리가 경험을 정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건이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실제 물리적 과정입니다.
그레이버는 마음을 자연에서 떨어져 나온 낯선(alien) 것으로 보는 대신, 다시 자연 안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이게 우리가 가진 자유와 행위성(agency)에 대한 감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세계를 그저 멀리서 구경하는 유령 같은 관객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자유는 환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의 일부이자 진행 중인 세계의 창조에 관여하고 있다면, 우리의 자유는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실재하는 힘(real power to make a difference)입니다.
8.
이제 저는 마지막 주제로 넘어가려 합니다. 바로 놀이(play)와 그레이버가 “유희적 자유(ludic freedom)”라고 부른 문제입니다. 그레이버는 「What’s the Point If We Can’t Have Fun?」이라는 에세이에서, 놀이가 단지 인간이나 동물만의 것이 아니라, 우주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제안합니다. 그는 물리적 실재의 모든 수준에서 자유와 자기표현(self-expression)을 향한 어떤 경향성이 발견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매우 화이트헤드적인 아이디어입니다. 화이트헤드의 저서 『이성의 기능』은 제가 강연 서두에서 인용했던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성의 기능은 삶의 기예를 증진시키는 것이다.”[9]
화이트헤드는 생존을 위한 실용적 도구로서의 이성과,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는 사변적 모험(speculative adventure)으로서의 이성으로 구분합니다. 물론 생존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화이트헤드가 “욕구(appetition)”라 부르는 것도 있습니다. 그건 새롭고 더 나은 것을 향한 욕망(desire)입니다. 박테리아 같은 아주 단순한 유기체조차도 그저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먹이와 더 나은 환경을 찾으면서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새로움을 향한 충동(urge)이 바로 진화의 원동력입니다. 이게 복잡성의 창발(the emergence of complexity)과 생명의 고등한 형태들의 창발을 이끌어 냅니다.
그레이버는 이 아이디어를 이어 받아 더 멀리 밀고 나갑니다. 그는 우리가 이 충동을 단순히 생존 경쟁으로 여길 게 아니라, 일종의 놀이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동물들이 놀 때, 그들은 어떤 직접적인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기쁨(joy) 그 자체를 위해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그레이버는 놀이와 비슷한 무엇이 바닷가재나 모든 생명체들에서, 더 나아가 물리학자·화학자·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자기 조직화 시스템(self-organizing systems)’이 발견되는 모든 수준에서 존재하는 것 같다고 씁니다. 우리는 전자가 왜 바로 그 순간에, 바로 그런 방식으로 도약(jump)하는지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레이버는 전자의 도약 시점과 방식에 우리가 어떠한 이유도 배정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전자가 마치 자기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레이버가 이 에세이를 쓰고 있던 당시, 그는 트위터 메시지로 제게 화이트헤드라면 다음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물었습니다. “불확정성(indeterminacy)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하듯, 외부 관점에서 볼 때만 자유처럼 보이는 걸까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은 2013년 3월 13일자 트윗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적어도 화이트헤드 자신에게는 모든 새로운 계기가 최소한의 비결정(indecision)을 포함합니다’라고 언급하는 것 외에 다른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근원적인 수준에서 돌이나 전자조차도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합니다.
그 에세이에서 그레이버는 – 비록 이것이 증명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 우리가 물리적 실재의 가장 밑바닥에서 ‘그 자체를 위한 자유(freedom for its own sake)’를 마주하며, 이는 동시에 우리가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놀이를 마주한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썼습니다.
이 점을 바탕으로, 그레이버는 『이성의 기능』에 담긴 논지를 더 현대적인 어휘로 옮기면서, 놀랍도록 화이트헤드적인 정식화로 자신의 에세이를 마무리합니다. 다음은 그레이버의 에세이에서 발췌한 긴 인용문입니다.
“하나의 원리를 상상해 보자. 그것을 자유 원리라 부르자. 혹은 이런 문제에서는 라틴어식 표현이 더 묵직하게 다가오니, 유희적 자유의 원리라 불러도 좋겠다. 이 원리를, 어떤 존재물이 가진 가장 복잡한 힘(powers)이나 역량(capacities)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일이, 적어도 일정 상황 아래에서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 가정해 보자. 물론 이것이 자연에서 작동하는 유일한 원리는 아닐 것이다. 다른 원리들은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하지만 최소한 이 원리는 열역학 제2법칙에도 불구하고 왜 우주가 덜 복잡해지기는 커녕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처럼 보이 이유와 같이, 우리가 실제로 관찰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최근의 한 책 제목처럼— “왜 섹스가 재미있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왜 재미가 재미있는지(why fun is fun)'이다.”[10]
이 주장, 이 원리는...
음, 좋습니다. 그레이버는 이 일련의 아이디어를 어디까지나 유희적이고 사변적인 추측으로만 제시합니다. [그 이상으로, 즉 엄격한 이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상가로서 그리고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대중 지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의 위상은 대부분 훨씬 더 진지하고, 더 엄밀하게 수행되었으며, 엄청나게 방대한 증거로 뒷받침되는 주장들 – 예컨대, 『부채: 첫 5,000년의 역사(Debt: The First 5000 Years, 2011)』에서 등장하는 부채에 관한 논의나, 데이비드 웬그로(Daivd Wengrow)와 공저한 『모든 것의 새벽(The Dawn of Everything, 2021)』[11]에서 제시되는 인간 사회 및 정치 조직의 대안적 형태들에 관한 역사와 그 지속적인 열린 가능성에 관한 논의 같은 것들 – 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레이버가 보여준 ‘사변의 놀이(the play of speculation)’에 대한 교조적이지 않은 개방성(undogmatic openness), 그리고 그 놀이가 데려갈 놀라운 장소들로 기꺼이 따라가려는 태도야말로, 그의 지적 형성 과정과 그의 탁월함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레이버가 이러한 삶의 기예(art of life)에 대해 주의 깊게 관심을 기울인 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제 강연은 여기까지입니다.

옮긴이 주
*[ ]에 든 내용은 옮긴이가 덧붙인 것임을 밝힌다. 그리고 본문의 번호도 내용 구분을 위해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1] 『기준 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이문교 옮김, 2024, 갈무리), 『사물들의 우주: 사변적 실재론과 화이트헤드』(안호성 옮김, 2021, 갈무리).
[2]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나현영 옮김, 2016, 포도밭출판사).
[3] 이 에세이의 한국어 번역본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s://en-movement.tistory.com/629 영어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s://thebaffler.com/salvos/whats-the-point-if-we-cant-have-fun
[4] 『이성의 기능』(김용옥 옮김, 1998, 통나무), p.81-82 참고. 해당 대목의 원문과 한국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 마지막 선택의 기로는 이미 내가 앞에서 언급한 삼중의 충동이라는 성격에서 유되는 것이다: 산다, 잘 산다, 더 잘산다! 한 방법론의 탄생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살려고 하는 안전한 방법의 발견이다. 그것은 전성시대에는 좋은 삶을 위한 긴박한 조건들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좋은 삶이라고 하는 것은 불안정한 것이다. 피곤의 법칙이 용서없이 엄습한다. 삶의 어떠한 방법론이라도 그 범위내의 신선함을 다 고갈시키고, 또 피로가 물밀쳐올 때까지 그 신선한 것들을 다 써 먹어버리게 되면, 하나의 마지막 결단이 그 종의 운명을 결정한다. 하나는 그 자신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그냥 생존하는 수준으로 퇴행해버리는 것이요; 또 하나는 과거의 관습들을 자유롭게 떨쳐버리고, 더 잘 사는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5] 『자연의 개념』(안호성 옮김, 2025, 갈무리), 『과학과 근대세계』(오영환 옮김. 2008, 서광사).
[6] 『과정과 실재』(오영환 옮김, 2003, 민음사).
[7] 한국어 번역본 『자연의 개념』, p.52
[8] Graeber, David (2015) Radical alterity is just another way of saying “reality”: a reply to Eduardo Viveiros de Castro. Journal of Ethnographic Theory, 5(2). pp. 1-41. DOI: 10.14318/hau5.2.003 출처: https://www.journals.uchicago.edu/doi/10.14318/hau5.2.003
[9] 한국어 번역본 『이성의 기능』 제1부, p.35
[10] 「우리가 재밌을 수 없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중 “물고기와 함께 헤엄치다(Swim with the Fishes)” 챕터의 첫 문단.
[11] 『부채, 첫 5,000년의 역사』(정명진 옮김, 2021, 부글북스), 『모든 것의 새벽』(김병화 옮김, 2025, 감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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