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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Translation/In Moving Translation

현대 프랑스철학에서의 구조

by 인-무브 2026. 4. 14.

파트리스 마니글리에와 ‘구조주의 연작’에 대한 옮긴이 소개글

 

파트리스 마니글리에Patrice Maniglier

 

1973년 프랑스 니스 출생.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에티엔 발리바르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 논문 『기호의 수수께끼 같은 삶: 소쉬르와 구조주의의 탄생(La vie énigmatique des signes: Saussure et la naissance du structuralisme)』을 작성하였다. 마니글리에의 글에서 돋보이는 것은 현대 프랑스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이를 언어학, 인류학, 정신분석학과 연결하는 독창성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에 번역된 마니글리에의 글은 브뤼노 라투르의 『존재양식의 탐구』에 대한 서평 <형이상학적 전회? 브뤼노 라투르, “존재양식의 탐구”에 대하여>와 『야콥슨-레비스트로스 서한집』의 서문 <구조주의의 결정>(에마뉘엘 루아예와 공 저) 총 두 편 뿐이다. 이에 배세진의 기획 하에 마니글리에의 글 세 편을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세 편의 글을 관통하는 주제는 ‘구조주의’이다. 혹자는 ‘이미 지나간’ 구조주의에 대한 글을 왜 읽어야 하는지 물을 수도 있다. 답은 간단하다. 구조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현대 프랑스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으며, 마니글리에는 구조주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가장 탁월한 길잡이이기 때문이다. 그 경로를 대략적으로 제시하자면, ‘구조주의 연작’의 첫 번째 글 <현대 프랑스철학에서의 구조>는 구조주의에 대한 흔한 오해들을 교정하며, 구조주의를 하나의 사건으로 규정한다. 비교주의적 관점과 변형적 관점을 통해 기호의 독특한 존재 양식을 해명하려는 노력은 구조주의를 열린 문제 설정적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마니글리에는 진정한 사건으로서의 구조주의가 여전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았음을 암시하며 이 글을 끝맺는다. 이러한 논지가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된 것이 두 번째 글 <구조주의의 유산>이다. 이 글에서 마니글리에는 구조주의라는 하나의 공유된 문제 공간 위에, 자크-알랭 밀러에서 장 프티토에 이르는 여러 철학자들을 위치시키며, ‘구조의 존재론’과 ‘효과로서의 주체성’ 간의 관계를 해명하려는 분투들이 서로 분기하며 그려내는 경로들을 지도화한다. 마지막 글 <사물의 질서>는 그 중 푸코의 『말과 사물』에 초점을 맞춘다. 구조주의에 대한 오해들과 『말과 사물』에 대한 몰이해가 상궤에 있음을 논증하는 이 글은 푸코와 구조주의 모두 체계 개념을 통해 진정한 사건을 진단하고자 했음을, 더 나아가 가변성 자체를 사유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구조주의라는 하나의 사유 운동을 재활성화하려는 마니글리에의 노력이 그러하듯, 이 번역이 ‘지금 여기’에서 구조주의를 다시 사유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현대 프랑스철학에서의 구조

 

파트리스 마니글리에(Patrice Maniglier) 지음 
함은호(연세대학교 비교문학 석사) 옮김 
배세진(정치철학자) 감수

 

 

프랑스철학에 유의미한 기여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질문을 다뤄야만 했던 시기가 있었다. 구조주의란 무엇인가?1) 1960년대 후반에 출판된 주요 저작 중 다수는 구조주의를 하나의 사건으로 진단하려는 시도들이었다. 루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Pour Marx)』와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 자크 데리다의 3부작 『그라마톨로지(De la grammatologie)』, 『목소리와 현상(La voix et le phénomène)』, 『글쓰기와 차이(L’écriture et la différence)』, 질 들뢰즈의 두폭화diptych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과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담론, 형상(Discours, figure)』 모두 ‘구조주의’라는 이름 아래 발생했던 지적 변혁transformation을 전유한다.

 

기이하게도 이 인물들은 ‘포스트-구조주의’라고 불린 것에 재빨리 흡수되었고, 이는 구조주의를 한물간obsolete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이들을 구조주의자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놀랍게 느껴질 수도 있다. 1968년 5월 이후, 이들은 거짓에 가까울 만큼 정직하지 못한 태도로 이 명칭을 거부했다. 알튀세르는, 1960년대 그의 저작들에 구조 개념concept이 편재omnipresent함에도 불구하고(1976: 132), 자신은 결코 구조주의자가 아니며 스피노자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푸코 또한 『말과 사물』의 본래 부제가 ‘구조주의의 고고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Maniglier, 2013 참고), 자신은 결코 ‘구조주의자’라는 단어를 쓴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1970: 199-202; 1994: 89 참고). 들뢰즈의 1967년 논문 「구조주의를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A quoi reconnaît-on le structuralisme?)」는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비록 그가 이후 펠릭스 과타리와 함께 쓴 후속작들에서 그 운동[구조주의]과의 모든 연관을 부인했지만 말이다(Deleuze, 2004). 데리다와 리오타르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현상학을 재구성하고자 했는데, 이는 정확히 구조주의적 문제제기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처럼 구조주의라는 질문question은 1960년대의 한 시기를 특징짓는 데 그치지 않고, 1970년대와 그 이후 철학적 프로젝트의 전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의미에서 구조주의의 수수께끼는 1968년 무렵 프랑스의 철학적 계기moment를 구조화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에서 나타난 이 기이한 거부repudiations는 인간 과학human sciences에서 되풀이되었다. 구조주의와 연관된 인간 과학의 저명한 인물들 대부분이 나중에는 구조주의를 거부했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지적 여정에서 구조주의는 스쳐 지나가는 ‘과학적 시기’(1988)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자크 라캉은 구조주의를 부인했지만(2010: 14), 구조 관념idea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반세기도 더 전에 사망한 페르디낭 드 소쉬르조차 1970년대에 [구조주의가 아니라] 포스트-구조주의의 창시자로 되살아났다. 오직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만이 이 관념에 충실했고, ‘구조주의자들의 점심식사(structuralist lunch)’─그 당시 모리스 앙리의 유명한 만화에서 묘사된─에 홀로 남겨졌다[옮긴이: 마니글리에는 다음 그림을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왼쪽부터 차례로 푸코, 라캉, 레비-스트로스, 바르트].

 

구조주의의 무엇이 이토록 급격한 반전을 초래했을까? 알다시피 구조주의는 정의하기 어려운 것으로 악명 높다. 방법 혹은 대상으로서 구조 통념notion은 지성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이론적 접근법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데리다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구조주의는 구조 통념을 출발점으로 삼아 사유의 규범적 방향을 외삽하기extrapolate 위한 것이 아니다. 구조주의는 오히려 구조 통념 자체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event이다(Derrida, 1978: 278).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과 같다. 구조주의의 출현과 함께 구조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구조주의는 왜 그토록 급히 포기되었는가?

답은 간단하다. 하나의 진정한 사건으로서 구조주의는, 처음에는 과학 대 이데올로기, 효과로서의 의미 대 기원으로서의 의미, 총체성 대 개체 혹은 요소, 필연성 대 자유, 체계 대 사건, 형식form 대 내용, 선험적인 것 대 경험 등 자신이 무용한obsolete 것으로 만들었던 범주들의 틀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었다. 이러한 오해들은 구조주의의 표준형standard form이라 할 만한 것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열렬히 수용되었다가 곧바로 거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사건을 더욱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구조주의에 대한 네 가지 중요한 오해를 분석함으로써 구조주의적 벡터를 그려볼 수 있다. 그 궤적은 모든 위대한 사유 운동들이 그러하듯 계속해서 새로운 지평을 가리키고 있다.

 

  1. 구조와 구조주의: 표준standard 구조주의인가, 문제problem로서의 구조주의인가?

구조주의의 표준적 형태가 존재한다는 바로 그 생각이 표준standard 구조주의를 구성하는 첫 번째 오해이다. 이 [표준 구조주의적] 설명에 따르면, 잘 정의된 구조 개념concept이 한 특정 과학에서 식별된 이후에 다른 영역들로 수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구조주의의 모험에서 철학은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성찰reflection로서 혹은 과학적 결과에 대한 해석interpretation으로서, 세계와 세계 내 우리의 조건들에 대한 이미지, 즉 구조주의적 세계관Weltanschauung을 도출하는 부차적인 역할만을 담당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구조와 구조주의의 정의에 대한 이와 같은 접근은 막다른 길로 이어질 뿐이다.

 

우선, 이 접근은 구조 개념을 명료하게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당대의 모든 관찰자들이 주장했던 바, 그러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구조’라는 단어의 의미는 끝없이 다양하다varied. 이로 인해 일부는 ‘구조’라는 통념은 단순한 동음 이의어homonym에 불과하며, 구조주의는 잠깐의 지적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2) [한편] 다른 이들은 ‘구조’라는 단어의 일의적 용법use을 찾아 이를 표준으로 삼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구조주의적 교리structuralist doctrine로 여겨지는 바를 뒷받침하는 주제적thematic 정의보다는 구조적 방법structural method을 확립하는 조작적 정의를 선호했다.3) 

 

조작적 정의에 대한 추구search는 자연과학을 특권화했고, 문학 비평에서 수학으로, 바르트에서 부르바키로 올라가는 위계를 만들어냈으며, 이는 구조 개념이 기원한 대수학 군론theory of groups에서 정점에 달했다(Descombes, 1980: 85). 그러나 구조주의에 대한 이 수학적 표준은 인간 과학 내에 진정으로 자리잡지 못했고, 그 겉으로 보이는 엄밀함은 결국 피상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표준적인 구조적 방법을 찾으려는 다른 시도들도 유사한 문제에 부딪혔는데, 창시자 역할을 주장할 수 있었던 언어학에서 특히 그러했다(Pettit, 1975). [그러나] 레비-스트로스가 단순히 로만 야콥슨의 언어학적 방법을 민족지학적 ‘음소phonemes’에 적용한 것은 아니었다. 언어학 에서조차 구조주의자들은 표준적 방법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예를 들어,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는 소쉬르의 작업을 ‘한 다발의 진부한 관념들’로 여겼고(Seriot, 2014: 17), 트루베츠코이와 야콥슨은 이항 대립binarism(음운 자질의 이항 대립으로의 환원)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 했다.

 

쉽게 외부의 영향에 휘둘리는 대중을 사로잡기 전에 인간 과학에 [선제적으로] 수입된 것으로 인정되는 철학적 반인간주의는 표준 구조주의의 또 다른 가능한 원천을 대표했다represented. 이 입장[철학적 반인간주의]은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들뢰즈, 그리고 리오타르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에게 있어 구조란 그 모든 철학적 위장guise─현상학적 의식, 칸트적 또는 헤겔적 주체, 하이데거적 또는 사르트르적 실존, 메를로 퐁티의 살, 리쾨르의 의미, 심지어 마르크스의 프락시스까지─속 인간Man의 형상을 퇴출시키는 것이었다. 개별 구조주의자들은 세부사항에서 이견을 보이거나 심지어 그 명칭을 완전히 버렸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모두 ‘인간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공유하는 듯했다.4)

 

그러나 [표준 구조주의의] 이러한 입장은 철학을 과학으로부터 단절시키며, 두 가지 매력적이지 않은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한다. 과학에서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과 철학에서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 사이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연관성connection이 있다고 인정하거나 아니면 이 연관성은 착각이자 오해, 심지어는 일관성 없는 철학이 과학의 명성 뒤에서 자신의 빈곤함을 숨기는 사기의 소산이라고 선언하거나.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들뢰즈, 리오타르 같은 거장들에게 그런 지적 이중성duplicity을 전가하는 것에는 의문스럽고 조잡스러운 면이 있다. 더욱이 이 가설은 결국, 항상 자신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학문이자 스스로를 정초하는 담론이라는 철학의 자기 재현을 되풀이하게 된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철학이 순전히 자율적인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으며, 베르그송의 말처럼 절반은 과학적이고 절반은 형이상학인 지적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구조의 표준적 형태를 찾으려는 시도는 구조주의가 철학에 제시했던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이러한 교착 상태impasse를 피해가는 간단한 해결책은 표준 구조주의는 존재한 적이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의 통일성은 구조 개념의 동일성도, 수출 가능한 방법도, 공통의 이론이나 입장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직 공유된 문제만을 요구한다. 하나의 문제로서 구조주의는 여러 가능한 해결책뿐만 아니라, 오해와 그에 뒤따르는 재정식화로 이어질 수 있다. 구조주의는 이론적 명제들, 개념들, 또는 방법들의 핵심 집합이 아니라, 문제 설정적problematic 공간이자 대화의 표면이며, 하나의 탐구investigation이다. 구조주의의 통일성은 분기하는divergent 입장들에 대해 초월적이지 않다. 반대로, 이 정렬된ordered 다양성이 문제의 존재existence를 입증한다.

 

문제는 우리를 주춤하게 만들고stumble, 루틴을 중단시킨다. 문제의 전개는 그 방법론, 대상의 재현, 당연시되던 진리의 부적합함inadequacy을 드러낸다. ‘구조’라는 단어는 오직 일련의 학문 분야에 내재한 문제들 내에서 재맥락화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다. 이는 구조 통념의 실정적positive 토대이다. 소쉬르를 구조 언어학으로 이끌었던 것은 뛰어난 방법론적 직관이나 언어의 이미지가 아니라, 장애물에 부딪히며 발생한 갑작스러운 충격jolt이다.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같은 구별의 중요성[쟁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구별을 촉발한 문제로 되돌아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레비-스트로스가 『친족관계의 기본 구조(Les Structures élémentaires de la parenté)』를 쓴 것은 구조주의의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학에서 발생한 난점들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영역과 다른 많은 영역들에서, ‘구조’라는 단어는 교착 상태와 더불어 이를 명명하고 우회로를 재구축하려는 시도, 즉 자신의 발전에 의해 중단된 실천을 재개하려는 시도 모두를 가리킨다.

 

인류학과 언어학, 또는 대수학과 문학 비평 사이의 연결은 단순한 방법의 수입에 기반하지 않으며, 그들이 유사한analogous 문제들을 직면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실정적 구조 통념은 보다 일반적인 인식론이 아니라 마주침encounter에 관한 것이다. 철학이 결국 이 대화의 파트너가 되었다면, 그것은 철학이 구조주의의 바깥에서 이성(토대)이나 의미(해석)를 보충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구조주의적 문제가 사변적이고speculative 철학적인 쟁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를 이해할 때, 이 실증적positive(과학적)이고 사변적(철학적)인 차원을 분리해서는 안된다. 구조 통념은 오래된 자전거의 기어처럼 덜컥거리며 이러한 차원들 사이를 오간다. 이 작동은 철학의 역할 자체를 재정의한다. [철학은] 토대 혹은 근거로서 [과학] ‘이전’에 존재하지도, 해석으로서 ‘이후’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문제 설정적 과정의 필수적인 국면phase으로서 [과학과] ‘함께’ 존재한다.

 

구조주의를 1968년 당시moment 프랑스철학의 고고학적 조건으로, 그것의 문제 설정적 토대ground를 재구성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정의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일의적 입장이 아닌 문제로서 구조주의가 갖는 지위는 구조주의가 왜 그토록 ‘포스트-구조주의’라는 급격한 전도에 취약했는지를 설명해준다. 새롭고 진정한 문제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쓸모없는obsolete 것으로 만든 바로 그 대립들로 되돌아가며, 계속해서 새로운 해명clarifications을 요구할 것인데, 이는 구조주의의 역사에서 반복해서 되풀이된 과정이다. 문제, 실증성positivity, 마주침, 사변적 전환shifting. 이것들은 ‘구조주의’라는 이름 아래 일어난 구조 통념의 모험을 지도화하는 데 필요한 개념들concepts이다. 이미 만들어진 진리(혹은 이데올로기)의 성공적인 발전과는 거리가 먼 유효한[실제의] 구조주의effective structuralism는 다양한 학문 분야의 실천practice을 그 결과 혹은 효과의 측면에서 특징지었다. 이 유효한[실제의] 구조주의는 1968년의 ‘철학적 계기’를 규정했던 공통의 문제와 사변적 질문 속에서 서로 마주쳤던 여러 실천들의 실증성에 뿌리를 둔, 열린 문제 설정적 과정이었다(Maniglier, 2016).

 

2. 구조와 존재: 의미meaning의 구성인가, 기호signs의 존재론인가?

 

표준 구조주의 관념을 구성하는 두 번째 오해는 이 [사유] 운동을 언어적 혹은 상징적 구성주의constructivism, 즉 지각된 실재reality나 초월적transcendent 가치가 기호 체계의 기능작용functioning에서 비롯된 효과라고 보는 구성주의의 한 형태로 정의하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오히려 실재론realism, 즉 기호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과 달리 현실과 관계 맺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있는 환경milieus, 따라서 현실realities 그 자체라고 확언하는 기호학적semiological 실재론이다. 구조주의적 모험의 근간이 되는 문제는 기호라고 불리는 이 독특한peculiar 것들의 실재 유형 혹은 존재 양식을 다룬다.

 

이 [두번째] 오해는 구조주의를 ‘언어적 전회’ 속에 가두었다. ‘언어적 전회’ 자체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변이형variant으로 이해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칸트의] 이 혁명은 현실reality 그 자체에서 진리를 발견하려는 순진한 욕망을, 사유 범주가 필연적으로 현상적 실재reality를 선결정한다고 보는 비판적이고 반성적인reflexive 철학으로 대체했다. 칸트가 사유 범주들을 ‘초월론적transcendental 주체’라는 다소 모호한 실체 내에 위치시킨 반면, 언어적 전회는 이 범주들을 경험의 한계로서의 언어 안에 위치시켰다. 이 범주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 기획에서처럼 보편적인 논리적 형식 또는 대화적 형식을 취할 수 있는 한편, 신칸트주의 전통은 자연 언어, 또는 더 일반적으로는 날것의 주어진 경험을 조직하기 위한 모든 경험적 수단, 즉 기호 체계에 초점을 둔다. 기호 체계는 언어를 넘어 친족 체계, 신화, 정치 제도, 사회 조직, 에피스테메épistémès, 건축 등 문화를 구성하는 영역들을 포괄한다. 이 지점에서 표준 구조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실재론에 대립하여 물리적이고 도덕적인 현실realities이 상징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문화적 구성주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우리를 ‘언어의 감옥’(Jameson, 1972), 또는 사피어-워프 가설(즉, 언어 구조가 개념뿐만 아니라 지각까지 결정한다는 관념)을 모델로 한 ‘언어적 관념론’에 가둔다. 만약 의미가 언어 내에서 구성된다면, 우리는 오직 언어가 우리로 하여금 말하도록 허용하는 것에만 접근할 수 있다.

 

구조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구조주의자들은 기호의 의미가 그것의 대상(지시체referent)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주체가 의도를 갖고intentionally 의미했던 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오직 체계 내 기호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가령] 프랑스어 ‘mouton’의 의미는 영어의 ‘mutton’과 다른데, 후자는 ‘sheep’과 대립될 수 있는 반면, 전자는 그러한 대립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Saussure, 2011: 15).[옮긴이: 주지하다시피 영어에서 ‘sheep’은 살아있는 동물인 양을, ‘mutton’은 양고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반면 프랑스어 ‘mouton’은 맥락에 따라 양을 의미할 수도 있고, 양고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 언어학을 넘어, 라캉에게 [대문자] 아버지, [대문자] 어머니, [대문자] 오이디푸스의 형상들은 아이들의 실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라, 상징적 질서 내에서 욕망의 자리를 표상하는 기능들functions이다. 여기에 사물things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의미의 효과만 존재한다. 이는 구조주의를 존재에서 의미로 문제 설정problematic을 전환하는 현대 사상의 훨씬 더 큰 운동 내에 위치시킨다. 따라서 구조주의의 철학적 의의는 그 독특한particular 의미 이론─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적 지시reference 이론, 의미를 의식의 구성 작용act으로 보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해석학, 사용usage과 실천으로서의 의미라는 실용주의적 통념, 의미가 모순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변증법적 전통과는 구별되는─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는 이후 이러한 의미 중심의 철학 조류들 모두로부터 배척당했는데, 그중 전후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상학이었다. 현상학자들의 관점에서 구조주의는 의미를 부분적으로만 다룰 수 있었는데, 기호의 의미는 언어 내 기호의 위치에 의해 결정될 뿐만 아니라, 주체에 의한 맥락적 사용, 곧 의미작용에 대한 지향적intentional 이해에 의해서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Man’은 죽기를 거부한다(Merleau-Ponty, 1964; Ricœur, 1974). 모든 종류의 유물론자들에게, 의미에 대한 표준 구조주의적 설명은 지나치게 관념론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들이 보기에] 그러한 설명은 기호 뒤에 있는 물질적 차원들, 즉 실천, 사회적 이해관계(Goldmann, 1969; Bourdieu, 1998), 충동drives(Miller, 2015) 또는 신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최근 분석철학자들은 구조주의를 지시의 문제를 회피하는 상대주의relativism라고 비난했다(Descombes, 1986; Salanskis, 2016 참고). 표준 구조주의에 대한 최후의 비판은 그것이 모든 것을 보다 깊고 비밀스러운 발생적generative 실체에 의해 투사된 그림자로 환원하고, 오직 극소수의 학자들만 인간 경험에 대한 이론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암시함에 따라─이는 지식의 권위주의적 형태를 지지한다─, 근대성modernity을 특징짓는 낡은 비판적 제스처를 되풀이했다는 것이다(Rancière, 2017). 더 최근의 비평가들은 구조주의의 이른바 환원주의reductionism에 맞서 ‘비非환원주의’를 내세우며, 언어보다 존재론을 부각시킨다. 브뤼노 라투르(2004; 2013), 알랭 바디우, 그리고 다양한 ‘사변적 실재론자들’처럼 서로 다른 사상가들이 [그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언어에 대한 논쟁을 끝내고 사물 자체5)로 돌아가고자 하며 구조주의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내고 있다.

 

이러한 논쟁들이 흥미로울 수는 있지만, 이들[위의 비판들]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구조주의의 유효한[실제]effective 역사를 면밀히 살펴볼 때 드러나는 바, 구조주의는 의미 이론을 여러 영역에 적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를 발견한 것이었다. 기호는 우리가 의미를 가지고서 보충하는supplement 지각적 소여가 아니다. 반대로 그 지각된 실재reality 속에서, 기호는 그 자체로 오직 대립을 통해서만 주어진다.[옮긴이: 소리나 글자 같은 물리적 실체가 존재하여 이를 지각한 뒤 여기에 의미를 덧붙이는 게 아니라, 대립 속에서 그것이 비로소 어떤 소리 혹은 글자로 지각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기의와 기표 모두 차이적differential 실체이다. 기호의 의미가 대립 체계 내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보다 심원한 문제의 결과일 뿐이다.

 

이 문제는 19세기 언어학의 지극히 실용적인practical 맥락 속에서 발생했는데, 당시 연구자들은 상징적 현상을 관찰하고 이를 경험적으로 분석하려 했다. 소쉬르는 음소가 어떤 단순한 방식으로 주어지거나 관찰될 수 없다는 점을 최초로 이해함으로써 구조주의적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대 가장 선진적인 언어학파였던 신문법학파neogrammarians는 음소들을 화자의 조음articulations으로 환원하고자 했는데, 이는 그것[조음]이 가장 엄밀한 방식으로 관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쉬르는 이러한 방법이 그것이 이론화하고자 하는 바로 그 현상의 완전한 해소dissolutions로 이어질 것임을 깨달았다. 주의깊은 관찰이 드러내는 바, 언어의 관찰 가능한 현상(조음 동작이든 청각적 소리든)은 연속적(발성 운동이나 음성 연쇄에서 이미 주어진pregiven 요소들을 지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면서 또한 불규칙적(어떤 단어나 음소의 모든 사례에서, 그리고 오직 그 사례들에서만 나타나는 실정적이고 관찰 가능한 요소를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다. 기호가 지각된 실체로서 먼저 존재하고, 이후 우리가 기호에 의미작용을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기호의 지각 자체가 이미 그 의미작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idea은 기의와 기표는 분리될 수 없다는 소쉬르의 유명한 테제로 이어졌다.

 

소쉬르의 또 다른 유명한 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언어에는 차이만이 존재할 뿐, 실정적 항은 존재하지 않는다”(2011: 120). 기호의 유일한 반복적 측면은 다른 기호와의 차이이지, 어떤 실정적 속성이 아니다. 우리가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든 간에,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것이 다른 단어와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어의 ‘r’을, 이 발음이 변별적 가치를 갖지 않는 한에서, 얼마든지 굴려 발음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sheep’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는 마음 속으로 털이 복슬복슬한 또는 털이 깎인 동물을 그려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깃덩어리─mutton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를 상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사회적 실체로서의 언어 현상이 구체적 발화 행위의 반복적 모방으로부터는 결코 발생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행위는 그것이 다른 행위들과 대립을 이룰 수 있는 체계, 즉 언어 내에 이미 위치해 있지 않는 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랑그파롤 간의 관계, 더 일반적으로는 구조와 발생 간의 관계는 오직 기호의 존재 양식이라는 문제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선험적인 형이상학적 전제commitments(전체the global는 부분the local에 선행할 수 없다, 발생genesis은 구조에 선행한다 등)에 기대어 파롤에 앞선 랑그의 선재pre-existence를 논박하는 이들은 기호가 제기하는 문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유효한[실제의] 구조주의는 차이들의 체계 내에서 정의되는 위치, 즉 구조적 동일성structural identity이라는 새로운 동일성 통념을 도입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트루베츠코이의 1939년 저작 『음운론의 원리(Principes de phonologie)』는 비표준적 의미에서의 구조에 대한 최초의 도표를 담고 있다. 독일어 자음 체계에 대한 그의 도표(그림 39.1 참고)는 이 구조적 동일성 통념을 완벽하게 예시한다(Trubetzkoy, 1969: 72).

 

 

예를 들어, 여기에서 음소 ‘k’의 동일성은 순수하게 위치와 관련된positional 방식으로 재현/표상될represented 수 있다. 이 구조적 동일성은 소리뿐만 아니라, 문자 언어의 시각적 표시marks와 같은 다른 모든 유형의 대상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한다works. 그 대립이 동일한 위치 공간positional space을 생산하는 한, 그것들은 동일한 구조(이 경우, 동일한 언어)의 일부이다.

 

이러한 기호학적 실체는 물질적이거나 유형적이지 않지만(기호학적 실체는 어떤 특정 발화 행위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적real이다. 소쉬르는 기호가 “무형적” 혹은 “정신적spiritual”이지만, 또한 “실재적”이라고 주장했다(2011: 15).6) 트루베츠코이는 음소를 가리키기 위해 “음성적 관념phonic idea”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정신적 표상과 구별되는 기호의 “무형적” 본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1969: 149). 기호는 그 구조적 성격으로 인해 관념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sensible의 대립에 저항한다. 구조주의는 존재론을 포기하기는커녕 실체의 새로운 체제regime와 영역을 도입했다.

 

이 문제는 이후 일련의 과학적 맥락들에서 재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신화 연구에서 왕과 목동처럼 겉보기에 무관해 보이는 인물들이 동일한 대립을 실현한다면actualize, 그것들은 동일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문화 과학을 통계적 방법에 기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이유이다. 통계적 방법은 실정적이고 관찰가능한 특성들traits의 반복을 전제하는데, 그러한 특성들은 발견된다 하더라도 완전히 빈약하거나 진부한 것이기 때문이다(Lévi-Strauss, 1990; Maniglier, 2016 참고). 구조 개념이 역사학history에 자리 잡은 것은, 그 아래에 흐르는 장기 지속longue durée의 총체성을 위해 일화적 사건들을 도외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미셸 푸코가 주장한 것처럼, 역사학의 기본 대상인 사건의 비규정적indeterminate 본성을 다루기 위함이었다. 푸코는 자료 혹은 문서의 두 집합 간 불연속성의 측면에서 사건을 개념화하였다(1970: 5). 『말과 사물』에서 그는 정치경제학 내 노동 개념의 도입과 생물학 내 생명 개념의 도입이 동일한 역사적 사건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감금이 17-18세기 주권 권력sovereign power의 맥락과 19세기 규율 권력disciplinary power의 맥락에서 다르게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에서처럼, 동일한 사실이 서로 다른 역사적 사건들을 지시할 수도 있다. 구조적 방법은 사건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실질적practical 기준을 제공했다. 사건은 그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사건은 사실들이 서로에 대해 갖는 정렬된ordered 위치를 전치시킨다displaces(Maniglier and Zabunyan, 2018).

 

구조주의의 이러한 실천적practical 측면은 철학과 연결되었는데, 이는 그것이 의미작용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도입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호의 존재 자체에 관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의미에 선행하는 지각 가능한 실체로서의 기호 개념에 너무나 안이하게 의존해왔던 철학(가령 Aristotle, 1884: 16a4-16a9)은 이제 차이적이고 순전히 위치적인 실체 통념이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형이상학적 직관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차이가 있으려면, 두 사물이 서로 다른 점을 보이는 어떤 실정적 특질quality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실체들이 ‘순전히 차이적’이라면, 어떻게 서로 구별될 수 있는가? 즉, 이 문제는 존재론적 질문을 제기한다. 구조주의의 진정한 철학적 쟁점은 어떤 의미 이론이 아니라 기호의 존재론에 있다.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데리다, 리오타르에게 중요했던 것은 인간의 죽음이나 주체 비판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경험적 영역에서 이루어진 구조적 분석의 발견들을, 즉 순전히 차이적이며 위치적이지만 또한 실재적인 실체들을 설명할 수 있는 존재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기호의 존재론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아마도 데리다의 작업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소쉬르가 (음성 언어를 포함하여) 모든 기호의 모델은 에크리튀르writing라는 소쉬르 자신의 직관의 함의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소쉬르는 현전presence을 특권화하는 존재론적 편견의 희생자로 남았다. [현전을 특권화하는] 이러한 관점에서 음성은 기호의 현전인 반면, 에크리튀르는 흔적, 매개, 지연deferral, 즉 기호의 시간화이다. 

 

그러나 데리다가 원-에크리튀르archi-writing라고 부르는 이 원초적 쓰기writing는 일차적인 음성 언어에 대한 이차적인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다. 흔적은 현전의 기록이 아니라 무한히 지연된, 기원 없는 흔적이다. 데리다는 기호에 대한 소쉬르의 차이적 존재론이 시간적 요소를 요구한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차연différance 통념을 발전시켰다. 기호의 존재는 차이뿐만 아니라 차이화[와 지연]differing의 과정에 의해 구성된다(Derrida, 1982). 이러한 존재 양식은 필연적으로 열려 있으며, 역사에 선행하는 시간성에 얽혀 있다.

 

경력 초기에 데리다는 기호에 대한 이 놀라운 존재론에 비추어 20세기 현상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재검토했다. 첫 번째 문제는 『기하학의 기원(The Origin of Geometry)』에 나타난 후설의 이념성ideality 통념이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기하학 도형이 어떤 특정한 의식 작용act에서도 결코 소진되지 않고(‘심리주의적’ 테제와 반대로) 가능한 의식 작용의 무한한 계열에서 초점으로 기능한다면, 이는 정확히 그것이 기호이기 때문이다. 삼각형the Triangle은 칠판 위에 그려진 특정한 삼각형이 아니라는 플라톤의 주장은 옳았으나, 이는 그것이 이데아, 곧 순수한 가지적intelligible 본질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기호이며, 기호의 존재는 결코 어떤 특정한 경험적 표현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호는 무한히 지연된 채 남아있다. 두 번째 문제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 통념과 관련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존재Being와 존재자being 간의 차이는 소쉬르적 기호의 차이적 본성에 기반한다. 우리가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그러한] 언어의 존재 양식으로 인해, 비로소 우리는 존재Being 그 자체라는 질문에 접근할 수 있다.

 

들뢰즈, 푸코, 알튀세르, 리오타르에 대해서도 유사한 독해가 가능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효한[실제의] 구조주의는 우리의 경험이 언어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기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기호의 독특한 실재 양식에 주목하게 했다. 소쉬르는 이것이 철학적 문제이자 “철학적 접근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어” 온 문제임을 이해했는데, 이 문제는 마침내 1968년 시기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 다루어지게 되었다(Saussure, 2006: 163). 이것이 구조주의의 진정한 철학적 쟁점이다.

 

3. 구조와 총체성: 형식적 전일론holism인가, 변형적 비교주의comparativism인가?

 

표준 구조주의 관념에 관련된 세 번째 근본적인 오해는 구조주의를 비교주의comparativism가 아니라 전일론holism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다. 진정한 구조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범주는 총체성totality이 아니라 변형transformation, 더 정확히는 변이variation이다.

 

구조주의는 오랫동안 다음의 단순한 테제와 동일시되어 왔다. 전체는 그 부분에 선행하며 부분을 결정한다. 이 테제는 구조주의를 원자론─사물을 요소들의 집합으로 이해하는─이나 19세기 과학의 실증주의─그 자체로 주어진 고립된 사실들로부터 이론을 구성하는─와 대립시킨다. 요소에서 시작하여 전체로 나아가는 모든 형태의 원자론에 반대하여, 구조주의는 전체에서 시작하여 부분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구조주의’라는 용어를 창안한 야콥슨이 1929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구조주의를 정의한 방식이다.7) 마찬가지로 소쉬르는 어원학에 반대했다. 어원학은 어떤 단어를 고립시켜 그 역사를 추적할 것을 주장하지만, 단어는 오직 다른 기호들의 집합 내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체로서의 언어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사회적 구조 관념은 개인과 그들의 행동에서 그들을 하나의 총체성으로 통합하는 관계로 [시선을 옮기도록] 우리의 관점을 전환시켰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소위 영국 구조주의 학파와 뒤르켐은 이 총체성에 자율적 존재existence를 부여했다(Radcliffe-Brown, 1952: 192 참고). 게슈탈트 학파와 같은 구조 심리학은 (모양 또는 색의 지각 같은) 정신 현상이 국소적 자극뿐만 아니라, 그 주변 환경 혹은 지각 장perceptual field에 의해서도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뮐러-라이어 착시로 예를 들자면, >──< 대 <──>에서처럼 선분의 양 끝에 열린 형태 또는 닫힌 형태가 놓일 때, 선분의 길이가 다르게 보인다(Köhler, 1947). 이와 유사한 전일론적 강조는 과학사(쿤), 역사 일반history in general(브로델), 미학(파노프스키) 등 다른 여러 영역에서 발견될 수 있다. 철학에서는 부분들의 총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총체성totality의 존재론적 지위를 중심으로 구조와 관련된 문제들이 제기되곤 했다. 유기체나 건축물이 구조화된 실체의 모델 역할을 했는데, 이러한 모델에서는 요소들의 배열이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 그들의 관계 형태를 유지한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매우 일반적common이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이 정의는 구조주의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콰인에 이르는, 라이프니츠와 헤겔에게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전일론적 정향holistic orientation과 구분 짓지 못하며, 너무 포괄적이어서 구조 통념을 모호하게, 심지어 불분명하게 만든다.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더 심각한 것은, 구조주의의 문제 설정적 과정에서 ‘구조’가 방법으로서 운용된operated methodologically 방식이 완전히 간과된다는 점이다.

 

‘구조’ 개념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유명한 설명은 이러한 전일론적 대응물과의 네 가지 근본적 차이를 보여준다.

 

첫째, 구조는 체계의 특성을 드러낸다. 구조는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며, 그 중 어느 것도 다른 모든 요소들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서는 변화를 겪을 수 없다. 둘째, 어떤 주어진 모델에 대해서든, 동일한 유형의 모델 군group을 산출하는 일련의 변형들을 정렬할ordering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셋째, 위의 속성들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요소들이 특정한 변양modifications을 겪을 때 해당 모델이 어떻게 반응react할지 예측할 수 있게 한다. 넷째, 모델은 모든 관찰된 사실들을 즉각적으로 가지적intelligible이게 만들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1963a: 279-80)[옮긴이: intelligible은 종종 ‘이해 가능한’으로 번역되지만, 철학적 맥락에서는 감각적인 것(the sensible)과 구별되는 가지적인 것(the intelligible)을 의미하기에, 조금 어색하더라도 모두 ‘가지적’으로 옮겼다.]

 

 

1)과 관련하여, 대상 요소들(신화 이야기든 친족 체계든 정치 제도든…)의 체계성systematicity은 오직 이 대상(레비-스트로스가 ‘모델’이라고 부르는 것)이 변이vary 가능한 경우에만 가지적인 것이 된다. [가령] 또 다른 신화 이야기가 존재하여 한 이야기의 어떤 측면의 변양이 다른 변양들을 동반할 때에만, 우리는 그 신화 이야기가 구조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친족 체계를 비롯한 다른 구조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변이variation 없이는 구조도 없다. 이러한 구조 통념은 유기체나 건축물 같은 전일론적 은유와 다르다. 구조를 연구한다는 것은 그 내부로부터 요소들의 집합을 분리하여isolating 요소들의 내적 관계들을 통해 그 존재와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구조는 외적 변이형들variants의 장 내에 위치되어야 한다. 다른 체계들 없이 하나의 체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조의 ‘모델들’은 고립된 총체성이 아니라 위치 지어진 변이형들이다. 구조는 오직 비교의comparative 관점을 통해서만 가지적인 것이 된다. 즉, 구조주의는 전일론이 아니라 비교주의comparativism이다(그림 39.2 참고).

 

 

2)에 관하여, ‘전일론적’ 의미의 구조에서는 체계가 대상의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준다(가령 유기체에서처럼). 비교주의적 의미에서, 체계는 대상의 변이형들로 구성된다. 여기서 항들의 체계성은 부차적이며, 변양들의 체계성에 의존한다. 한 무리의 요소들을 연결하는 것은 그것들이 함께 변이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상호 조정된coordinated 혹은 뒤얽힌 변양들의 집합이 ‘변형군transformational group’을 이룰 경우에만 구조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중요하지만 종종 오해되는 이 통념을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변형’은 어떤 단일한 변양(두 항 사이의 관계)이 아니라, 여러 변양들의 연접conjunction을 가리킨다. 구조의 요소는 항들terms(예를 들어 이야기를 구성하는 모티프들)도 아니고, 변양들modifications(다른 모티프들이 동일하게 유지되면서 하나의 모티프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아니며, 오히려 변형들transformations(특정 변양들이 상호의존적, 즉 공변적covariant이라는 사실)이다.

이 변형들이 구조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군group’을 형성해야 한다. 수학에서 군은 어떤 연산이 부여된 집합을 가리키며, 이 연산은 집합의 두 요소를 결합하여 그 또한 집합의 일부인 세 번째 요소를 산출한다는 중요 성질property을 지닌다.[옮긴이: 이 글의 4절에서 언급되는 클라인 군Klein group을 예로 들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클라인 사원군이란 위수, 즉 군에 속한 원소의 개수가 4이고 가환인 비순환군이다. 가환군은 항등원과 역원이 존재하고, 교환법칙과 결합법칙이 성립하는 닫힌 집합을 의미하는데, 마니글리에가 언급한 중요 성질은 ‘닫힘성’에 해당한다. 다음의 표는 클라인 군의 대표적 예시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구조가 충족해야 하는 두 조건을 기술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하나의 현상은 변이형들을 가져야 하며, 또한 이 변이형들은 (앞서 트루베츠코이가 설명한 것처럼) 내부 공간을 형성하도록 닫힐 수 있는 체계로 조직되어야 한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구조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그 신화의 모든 변이형들을─그리고 오직 그 변이형들만을─ 생성하도록 반복하여 적용될 수 있는 연산을 발견해야 한다. ‘정관사’ 오이디푸스 신화는 그러한 변이형들의 행렬, 즉 그것[오이디푸스 신화]의 군이다. 각 변이형은 내용이 아니라, 그 변이형이 이러한 변형 사이클 안에서 점유하는 위치에 의해 정의된다(음소가 오직 그 위치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것처럼).

 

3)과 관련하여, (신화와 같은) 하나의 체계는 오직 구조 내 다른 가능한 체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결속력을 가지며, 이 구조는 현실적인 것the actual의 수준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의 수준에 존재한다.[옮긴이: 잠재적인 것에 대한 논의로는 들뢰즈의 「구조주의를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 그중에서도 차이화를 다루는 네 번째 규준을 참고.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질 들뢰즈 지음,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 래드클리프-브라운에 반하여, 레비-스트로스는 사회 구조란 “특정 사회에서 기술되는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로 구성될 수 없으며, 오히려 “변형 가능성들이 이루는 집합”에 있다고 주장했다(1963a: 279). 구조는 어떤 현실적 총체성의 형태가 아니라, 이러한 총체성의 변형으로 이루어진 잠재적 체계의 형태이다. 이로부터 중요한 두 가지 귀결이 따라나오는데, 하나는 존재론적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이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유효한[실제의] 구조주의는 잠재적인 것에 일종의 실재성a sense of reality을 부여한다. 변이형으로서 모든 실체는 그것이 될 수 있었던 것에 의해 정의되며, 그에 따라 그 자신의 동일성identity 내에서 대안들의 잠재적 장을 선전제한다presupposes.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에 선행하며 그것을 결정한다. 모든 소여는 잠재성의 현실화actualization로 지각된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 네 번째 장에서 실재적이지만 현실적이지는 않은 잠재적 장으로서의 구조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킨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구조는 특정 경험적 영역들에서 스스로를 현실화하거나 ‘극화dramatize’한다(1994: 216-21). 존재론적 관점에서, 구조는 경험의 선험적 형식도 아니고, 인간의 인지적 한계도 아니며,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총체성의 뼈대scaffold도 아니다. 오히려 구조는 잠재적인 것이, 그것에 의존하는 현실적 사물들에 대한 어떤 참조도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스스로를 결정하는 수단이다.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귀납적 추상화abstraction─오로지 관계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구조의 물질성을 도외시하는─의 과정에 의해서는 구조에 접근할 수 없다. 이러한 건축학적 의미의 구조는 고대 철학자 플로티누스로 하여금 건축 형태를 건물의 구조에서 [건물을 이루는] 돌을 추상한 후 남는 것으로 정의하게 했다. 비교주의적 의미에서 구조를 파악하려면, 정렬된 가능한 변이형들의 집합을 연역하고 이를 관찰된 현상들과 맞춰볼 수 있도록, 먼저 우리 자신을 잠재적 장에 위치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친족관계의 기본 구조』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여성 교환의 가설로부터 출발하여 가장 단순한 것(두 집단)에서 더 복잡한 형태들(복잡한 구조)에 이르기까지 이 교환을 조직하는 다양한 양식들을 연역하며, 이를 통해 각 친족 체계는 여성 교환 양식이라는 동일한 변형군의 변이형임을 보여준다.

 

‘구조’와 ‘모델들’의 수학적 의미는 이러한 연역적 방법과 짝을 이루며, 이 방법은 구조주의적 가설(발산하는 행렬, 즉 다양한 관찰 가능한 현상이 그에 대해 가능한 해결책으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의 본성에 관한)로부터 관찰된 데이터에 부합하는 변이형들의 발생generation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변이형들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에서 ‘모델들’이라고 불릴 수 있다. [첫째] 이 변이형들은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관찰 가능한 현실reality의 환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심오하게는, [둘째] 장난감 모델이 설명서에 따라 조립되듯이constructed, 변이형들의 구성이 변형적 가설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4)에 관하여, 구조의 요소들(그 변이형들)의 통일성은 이 요소들을 서로 다른 것으로 만드는 원리보다 더 높은 수준에 위치하지 않는다. 유기체의 통일성이 그 부분들(기관들)의 다양성을 초월하는 반면, 변형군의 통일성은 그 자신의 다양성과 동연하다coextensive. 다시 말해, 변형군의 통일성은 변이형들 사이에서 발견되며, 그들의 차이를 통해 변이형들을 서로 연결한다. 구조는 초월적 전체가 아니라, 요소들이 그들의 완전한 다양성 속에서 나타날 때 그들을 통합하는 내재적immanent 원리이다. 구조의 변이형들은 그들 자신의 차이를 통해 서로 관계한다. 구조는 그것이 조직하는 다양체multiplicity의 위에도 아래에도 위치하지 않는다. 구조는 그 표면에, 즉 요소들 사이에 있다.

 

내재적 표면이라는 이 주제는 구조주의 사상사 전반에 걸쳐 되풀이된다.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 관념을 재해석하여 구조의 ‘현존presence’ 양식을 그 ‘효과들effects’을 통해 파악하고자 했다.[옮긴이: 루이 알튀세르 지음, 배세진 옮김, 「『자본』의 대상」을 참고하라. 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자크 랑시에르, 로제 에스타블레 지음, 진태원·배세진·김은주·안준범 옮김, 『자본』을 읽자, 그린비, 2025.]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에서도 깊이에 반하는 표면이라는 주제가 지속적으로 언급된다. 이는 또한 본질 통념이 폐기되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변이형을 어떤 앙상블(변형군)의 요소로 만드는 것은 각 변이형에 공통된 특성들의 하위 앙상블의 존재도 아니고, 동일성의 중핵kernel도 아니며, 오히려 변이형들이 서로를 변형시키는 방식, 즉 그것들이 변이형으로 공동 구성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내재적 통일성과 동일성에 대한 차이의 우위, 이 통일성과 우위 두 가지는 구조 통념을 구성하는 두 측면이다.

 

요약해보자. 구조는 대상의 내부성interiority의 원리, 즉 대상이 스스로를 닫아버리는 방식이 아니다. 구조는 오히려 외부성exteriority의 장이며, 대상이 다른 대상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 그 대상을 구성한다. 구조의 체계성이 연결하는 것은 총체성의 요소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요소들의 변이형이다. 구조가 지시하는 것은 현존하는existing 실체의 형태가 아니라, 실체가 다른 가능성들과 공존하는 잠재적 장이다. 마지막으로, 구조는 초월적이지도 본질적이지도 않으며, 순전히 내재적이고 비본질적이다. 외부성exteriority, 변형transformation, 잠재성virtuality, 내재성immanence. 이것들은 그 유효한[실제적] 의미에서의 구조가 갖는 속성들이다. 사회과학자들과 철학자들 모두 구조와 변이형 사이의 긴밀한 연결을 간과함에 따라, 구조주의의 진정한 쟁점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고 구조주의를 ‘전일론’과 혼동했다.

 

1960년대 사변철학의 주요 흐름들은 모두 총체성의 문제에서 등을 돌렸다. 대신 그들은 구조에서 탈총체화의 측면을 강조했다. 데리다만큼 이를 잘 표현한 사람은 없었다.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1967년 컨퍼런스에서(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나중에 포스트-구조주의자들과 ‘해체주의자들’에 의해 전유되었다)[옮긴이: 마니글리에는 구조주의의 사건적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했던 데리다의 논의가 (아마도 구조주의에 비판적일) ‘포스트’-구조주의자들 및 ‘해체주의자들’에 의해 전유되었다는 사실에서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데리다는 구조주의는 전일론이 아니며, 오히려 구조를 탈중심화한다고 주장했다. 구조주의의 ‘단절’은 “중심 혹은 기원의 부재 속에서 모든 것이 담론이 되는 순간… 즉, 거기에서 근원적인 것이든 초월적인 것이든 간에 중심 기의가 결코 차이들의 체계 바깥에 절대적으로 현전하지 않는 어떤 체계가 되는 순간”이다(Derrida 1978: 354).[옮긴이: 마니글리에의 글에는 “the central signified, the original or transcendental signifier is never...”로 되어 있으나, 해당 글의 영역본 및 불어 원문을 번역한 국역본과 대조한 결과, 이는 인용상의 착오로 보인다. 덧붙여 해당 글의 우리말 번역은 『글쓰기와 차이』 국역본 외에도 철학유한회사 블로그에 공개된 김민호의 번역을 참고할 수 있다. https://blog.naver.com/limitedinc/221949485169(최종접속일: 25/09/04)] 이 주제는 알튀세르와 푸코의 작업에서 이미 명시적으로 나타났고, 리오타르에게서 반복될 것이었다. 따라서 총체성의 철학에서 차이의 철학으로의 이행은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로의 이행과 일치하지 않으며, 당시 행위자들에게 이는 지극히 명백한 것이었다. 구조주의가 제기하는 실제 쟁점뿐만 아니라, 포스트-구조주의에 의한 구조주의의 궁극적 ‘극복’이 제기하는 실제 쟁점 또한 모호하게 만든 것은 오직 그 이후의 오해들일 따름이다. 

 

구조에 대한 이 비교주의적 정의에 여전히 이의가 남아있을 수 있다. 이것[비교주의적 구조 개념]이 레비-스트로스 같은 인류학자에게는 타당할지 몰라도 다른 ‘구조주의자들’, 특히 언어를 고립된 자족적 체계로 이해하는 듯 보였던 소쉬르에게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오류이다. 소쉬르에 대한 후속 연구들이 밝혀낸 바, 소쉬르는 명확하게 스스로를 인도유럽어 비교 언어학을 이론화하기 위해 작업하는 비교 언어학자로 보았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전체를 읽어보면, 그가 언어를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방언들의 다수성multiplicities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소쉬르에게 “언어와 방언은 양적으로 다른 것이지, 본성상 다른 것이 아니며”(2011:93), “모든 방언은 다른 두 방언 사이의 이행transition이다”(1993: 30a). 달리 말해, 모든 언어는 그 자체로 다른 두 언어의 변형이다. 비교 언어학과 인도유럽어 프로젝트가 갖는 가장 심오한 의의는 [바로] 이것인데, 이는 프랑스어를 영어, 독일어, 히타이트어의 변이형으로 이해하고, 이 언어 집합 내에서 프랑스어를 재정의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문서화된[기록된] 언어들을 비교함으로써 재구성될 수 있는 인도유럽어 그 자체는 하나의 언어가 아니며, 오히려 이 모든 언어들이 비교 가능한 한에서, 그 변이형들의 체계를 표상하는represent 데 유용한 도구이다.

 

이러한 의미의 비교주의comparativism는 구조주의 전반에 걸쳐 반복된다. 예를 들어, 라캉은 1932년 논문에서 전일론적 구조 통념을 버리고 비교주의적인comparative ‘임상 구조clinical structure’ 통념을 발전시켰는데, 이 구조에서 신경증과 정신병psychosis 같은 다양한 정신병리는 변이형 혹은 변형으로 이해된다(Lacan 1975, 2006). 가령, 히스테리 진단은 더 이상 성격 유형의 요소들이 하나의 형태─환자를 특정 행동과 정서affect에 가두는limited─안으로 통합되는 방식을 파악하려 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하나의 성격 유형이 다른 유형들과 대조를 이루며 차이 속에서 관계하는 방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임상 구조 통념은 또한 보다 광범위한larger 구조적 매트릭스를 형성하는 더 크고 해결 불가능한 문제(‘거세’)를 지시한다. 푸코의 경우도 유사하다. 푸코의 에피스테메 통념에 대한 주요 오해는 그 개념이 문화 혹은 시대의 요소들의 본질적 집합을 포함하는 일종의 총체성을 표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피스테메 개념의 진정한 의미는 비교주의적이다. 에피스테메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문화 안에 갇혀있는지 묘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문화를 일련의 변형들 내에 위치시킨다. 구조 통념은 변형이라는 관념에 반대되기는커녕, 우리로 하여금 비교주의적 관점과 변형적metamorphic 존재론을 채택하도록 한다. 구조화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잠재적 대안들의 체계 내에서 변이형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의 놀이play 바깥에는 어떤 통일성이나 총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의 진리는 그것이 달리 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4. 구조와 사건: 현대의 엘레아학파eleaticism인가, 열린open 플라톤주의platonism인가?

 

이러한 전일론적 오해를 표준 구조주의에 고유한 네 번째 주요 오해와 혼동해선 안된다. 네 번째 오해는 구조주의를 역사보다 체계를, 통시성보다 공시성을, 혁명적 사건과 단절보다 장기적이고 보수적인 연속성을 특권화하는 정태적 관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에 따르면,] 변형군으로서의 구조는 타자로부터 동일자로 되돌아가는 일종의 우회로 역할을 하며, 사물들을 차이들의 닫힌 체계 내에서 끝없이 순환하게 만든다. 아마도 구조주의에 가장 빈번하게 제기된 비난은 구조주의가 역사를 거부한다는 것, 달리 말해 ‘엘레아학파Eleaticism’―파르메니데스 같은 인물들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으로서 변화도 다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의 현대적 형태라는 것이다(Lefebvre 1971). 구조주의의 역사에 대한 최근 연구들은 이 또한 완전한 오해임을 보여준다. 구조주의는 파르메니데스의 편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편에, 사지가 찢긴 신이자 니체에게 있어 다수성multiplicity의 긍정을 상징했던 디오니소스(아폴론은 안정된 형태로의 통합을 표상했던 반면)의 편에 서있다.

 

소쉬르에 대한 오해는 다시금 많은 것을 드러낸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가 사후 두 제자에 의해 편찬된 외경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다. 두 제자는 보다 현대적인 듯 보였던 공시언어학 주제를 맨 앞에, 통시언어학에 대한 강의를 맨 끝에 배치하여 강의lessons 순서를 뒤집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전도는 그 저작의 의미를 완전히 변형시켰다. 소쉬르의 문제는 그 자신의 학문 분야인 역사 비교 문법학의 기술적이고 철학적인 함의에 관한 것이었다. 강의 순서를 뒤바꿈에 따라, 편집자들[제자들]은 이 문제를 덮어버렸는데, 소쉬르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이 문제를 명확하게 표현한 바 있다. “프랑스어는 라틴어에서 오지 않았다. 프랑스어는 특정 시기에 주어진 지리적 경계 내에서 말해진 라틴어이다”(2006:11). 소쉬르에 따르면, 특정 집단은 라틴어를 말함으로써 비로소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루마니아어 등을 말하게 된다. 언어에 본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연속성continuity’과 ‘변화alteration’의 이 결합, 즉 언어의 ‘통시적 동일성’을 설명하는 것은 언어와 기호 일반에 대한 모든 연구의 ‘첫 번째 문제’이다.

 

이 문제는 사소해 보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변하는데, 반복이 결국 예전 언어와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다른 어떤 언어를 만들어낸다는 게 왜 놀라운가? 그러나 소쉬르가 주장한 바, 공시적 동일성은 관찰 가능한 사례들 사이의 유사성resemblances에 기반할 수 없다. 더욱이, 공시적 동일성synchronic identity(‘같은’ 언어 내 ‘human’이라는 단어의 두 음성 발화)과 통시적 동일성diachronic identity(‘humanus’와 ‘human’처럼 서로 다른 언어에서 대응하는 두 음성 발화) 간의 차이는 어떠한 구체적인 사례에도 기반할 수 없다. [가령] 강세, 속도, 억양, 음질에서의 차이로 인해 생산된 매우 다른 소리들이 동일한 단어에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다. 소쉬르로 하여금 파롤(말)과 랑그(언어)를 구별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공시적 동일성과 통시적 동일성 사이의 구별이다. 통시적 동일성의 문제는 오직 랑그의 수준에서만 작동한다.[옮긴이: 앞서 마니글리에가 지적한 것처럼, 통시적 동일성의 핵심은 연속성과 변화의 결합이기 때문에, 사회적 관습과 규약의 체계인 랑그의 수준에서만 논의될 수 있다. 달리 말해, 고유하고 일회적인 개별 발화의 수준에서는 통시적 동일성을 논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소쉬르에게 있어, ‘체계’ 통념은 단순한 반복으로부터 진정한 사건을, 즉 구조 내 변이형intra-structural variant으로부터 구조 변이를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의미의 구조는 사건 통념에 대립되기는커녕 사건에 그것의 완전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건은 구조적 돌연변이mutation이다.

 

소쉬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반복을 통해 돌연변이를 만드는mutate 것이야말로 구조적 실체의 본성임을 보여줄 수 있는 공시적 체계 개념을 구축하고자 했다. 직관적으로 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언어는(또는 어떤 구조든), 오직 변별적 차이만을 보존하면서retaining 두 기호 사이의 혼동을 야기하지 않는 변이들을 괄호로 묶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주제에 대한 소쉬르의 최종 발언last word은 아니었다. 『일반언어학 강의』의 ‘기호의 가변성과 불변성(Mutability and Immutability of the Sign)’ 장에 따르면, 언어는 오직 “순간순간 기의와 기표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힘에 대항해 자신을 방어하는 데 근본적으로 무력한” 경우에만, 다시 말해 구조적 변화에 대항해 자신을 방어하는 데 근본적으로 무력한 경우에만 존재한다(2011: 75). 이 ‘가변성’은, 언어 또한 모든 현상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힘에 지배되어 마치 천천히 침식되는 바위처럼 바깥에서부터 마모된다는 진부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반대로, 구조는 언어와 모든 기호 체계를 변이에 ‘열어놓는다’.

 

고정된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이유를 시간의 효과에서 찾아선 안된다. 이는 기호를 연구하는 이들이 저지르는 중대한 오류이다. 고정된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음inability은 우리가 유기체로서 주목하고 관찰하는 존재의 구성에 이미 자리 잡고 있으나, 사실 그러한 존재는 두세 가지 관념이 순간적으로 결합됨에 따라 얻어진 환영phantom에 불과하다.(Saussure 2003: 387)

 

 

여기서 소쉬르적 구조주의는 엘레아학파의 모든 형태와 첨예하게 갈라진다. 기호는 그 존재being 자체로 인해 생성becoming을 운명으로 지닌다. 이 점은 소쉬르가 개진했던 입장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증명한다. 철학에서 존재는 오랫동안 생성과 대립해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기호의 (구조적) 존재가 기호의 생성을 개시한다. 생성은 존재의 열등한 형태 또는 존재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바깥에서 실체를 부식시키는 무언가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생성은 더 이상 구체적인 것과 연관되지 않으며, 존재도 더 이상 관념적인 것과 연관되지 않는다. 구조적이고 따라서 형식적이며, 그 구체적 표현들로 환원 불가능하기 때문에, 언어적 실체와 기호 일반은 변이한다. 구조는 불변항과 이 불변항의 불가피한 변이 둘 다를 확립한다는 생성의 플라톤주의Platonism of becoming.

 

구조는 변이를 초래하는 특수한specific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 속성은 실정적 원리─동적dynamic 체계가 그것의 평형 상태equilibrium를 깨뜨리는 임계점을 갖는 것처럼 어떤 지평을 가리키거나 변이mutations의 공간을 미리 결정하는─가 아니다.8) 이것이 소쉬르와 로만 야콥슨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였다. 그의 1931년 논문 「역사음운론의 원리(Principes de phonologie historique)」에서 야콥슨은 구조를 평형 상태의 확립을 향해 작동하는 일련의 경향들로 정의했으며, 이는 언어의 진화를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1962a: 2018). 그에 따르면, 구조는 체계의 동역학dynamics을 구현한다embody. 야콥슨은 종종 소쉬르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모든 목적론적teleological or finalist 원리에 대한 소쉬르의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쉬르는 통시적 관점은 항상 개별 화자들에게 되돌아가는 국지적인local 것이라고 주장했다. 체계는 결코 체계 전체의 수준에서 목적 지향적 과정으로서의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러나 소쉬르는 또한 체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도록 운명지어진” 것, 즉 우연에 대한 그 자신의 개방성을 조직하도록[우연에 대해 열려 있도록]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했다(2006:188). 야콥슨에게 있어, 체계는 동적이거나 혹은 정적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는 세 번째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체계가 그 진화뿐만 아니라 우발성, 즉 우연에 대한 개방성을 조직할 가능성 말이다. 소쉬르의 관점에서, 체계는 그 자신의 변형에 열려 있으나, 그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생성에 대한 소쉬르의 개념화conception는 진화가 아니라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다.

 

소쉬르의 기호 ‘가치’ 이론[기호가에 대한 이론]은 이러한 열린 구조 개념을 명확히 보여준다. 기호의 가치란 그 내용을 괄호 안에 넣은 채(트루베츠코이의 표에서 음소 ‘k’를 구성하는 대립들의 음성적 내용을 무시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상호 대립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항들의 체계 내에서 그 기호가 차지하는 위치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은 오직 발화에서의 질적 차이(더 길거나, 더 짧거나, 더 고음이거나, 더 저음이거나 등)로 인해 존재한다. 소쉬르에 따르면, 구조는 차이의 집합들 사이에 대응관계parallels를 만들어 냄으로써 대립적 틀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며, 차이적이고 유비적인 계열들을 형성한다. 음운론적 대립 p/b는 bat이 pat에 대해 갖는 관계가 bin이 pin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는 사실 때문에 존재한다. 구조의 사용을 통해 드러나는 이 구체적인 질적 차이는 때때로 다른 대립 집합에 대응될 수 있는 차이들의 정렬alignment을 생산한다. 즉, 돌연변이가 일어난다. 발화의 이러한 구조화된 성질quality은 [구조의 변이와] 무관한 방식으로 변이하는 것과 고유하게 구조적인 변이를 생산하는 것 모두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변이들은 구조의 직접적 효과가 아니라, 한편으로는 구조화된 데이터가 생산되는 방식의 효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데이터로부터 구조가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의 효과이다. 소쉬르는 [구조화된 데이터로부터 구조가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이 현상을 해석interpretation이라고 불렀다. 구조는 자신이 가능하게 만든 데이터로부터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구성하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변이mutations에 열려있다.

 

이러한 개방성을 앞서 논의한 구조의 변형적 성격character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조는 오직 변이형들의 집합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변이형들을 서로 관련시키는 체계성─돌연변이에 취약하고 따라서 또 다른 변이형들의 체계, 즉 또 다른 변형군을 생산할─과는 다른 유형의 사실이다. 심지어 어떤 측면에서는 이 두 속성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수학적 의미에서의 군 통념은 그것이 작용하는 변이형 집합에 제한된 연산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구조의 개방성을 강조한] 소쉬르와 [변형군 개념을 활용한] 레비-스트로스 사이의 모순으로 이어지는가? 그 반대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레비-스트로스는 수학적 군 통념이 문화적 데이터에는 불충분하다고 믿었다. 『벌거벗은 인간(L’Homme nu)』의 결론에서 레비-스트로스는 클라인 군의 사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러한 군들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 어느 것도 순수하게 형식적인 각도에서 그려진다면 그러할 것처럼 그 자체로 실체로서 자족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실제로 변이형들의 정렬된ordered 계열은 네 항의 첫 번째 순환을 거친 후 첫항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마치 미끄러짐 효과, 더 정확하게는 자전거의 기어 변속과 비슷한 작동action을 거친 것처럼, 논리적 사슬은 헐거워지고 바로 뒤이어 엇물린interlocking 군의 첫항과 맞물리며, 이 과정이 끝까지 반복된다.(1981: 650)

 

 

그러한 고리를 완성하기 위해 변이형들의 체계는 그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또 다른 체계에 호소해야 한다. 예를 들어, 토테미즘에서 우리의 사회적 질서는 우주론적 질서에 투사되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기표들의 체계는 오직 기의들의 다른 체계에 호소함으로써만 이 과정을 완성한다(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이 두 체계가 형식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포개질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이러한 유형의 변형이 모든 기호학의 기초를 구성한다”고 결론지은 이유이다(1981: 650). 의미 현상은 오직 이러한 변형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이 변형들은 기호 일반의 존재론을 특징짓는다. 즉, 기호들은 이러한 내적 전환shifting의 원리에 의해서만 그 구조가 활성화되는 체계 내의 변이형들이다.

 

「신화적 가능성에서 사회적 존재로(Mythical Possibility to Social Existence)」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이 점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모든 가능성의 체계는 그 체계가 예상하지 못한 가능성, 곧 그 체계를 초과하는 가능성을 도입함으로써만 닫힐 수 있다. 모든 문제는 필연적으로 다른another 문제와 소통한다. “한 집단은 자신들의 신화 중 하나의 여러 판본을 할애하여 그 집단이 직면한 문제의 사실과 모순되는 단 하나의 가능성을 제외한 다양한 가능성들을 검토한다. 그리하여 이는 가능성들의 범위에 공백lacuna을 남기고,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지 않은 이웃 집단이 그 신화를 넘겨받아 빈칸을 채울 수 있게 한다”(1985: 161-2). 체계를 닫는 데 필요한 이 해결책은 스스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레비-스트로스가 다른 곳에서 표현했듯이, “각각의 구조는 다른 구조와 분리되어 있기보다는 인접한 구조로부터 빌려온 어떤 항에 의존해서만 교정될 수 있는 불균형을 감추고 있다”(1990: 358). 한 신화의 변이형 체계를 확립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다른 신화의 변이형 체계에 속하는 변이형에 의존한다. 이러한 순환cycle은 레비-스트로스가 『신화학』 프로젝트의 ‘종결될 수 없는’ 프로그램이라고 부른 것으로 이어진다.

 

들뢰즈는 이 변이형을 구조가 열리는 지점, 즉 ‘빈칸empty square’이라고 명명했다. 이 열림을 외부에서 침투하는 초월적 요소의 효과가 아니라 구조 자체의 형식적 속성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조의 불완전성은 결함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nature이다. 라캉의 ‘실재’ 통념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바로 그 방식이 의미를 갖지 않는 것들을 생산하며, 그것들이 구조화structuration의 과정을 연장한다. 본질을 갖지 않는 것이 기호의 본질essence이며 기호는 필연적으로 우발적contingent이라는 것, 이것이 유한성의 플라톤주의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유형의 구조에 대한 일반 공식을 개발했는데, 1955년 「구조적 신화 연구(The Structural Study of Myth)」에 나오는 저 유명한 신화의 ‘표준 공식’이 그것이다(1963b: 228). 이 공식은 구조주의의 역사적·사변적 모험을 통틀어 가장 형식적이고 일반화된 방식으로 구조를 표현했다.

 

Fx(a):Fy(b)≈Fx(b):Fa⁻¹(y)

 

이 공식은 ‘또 다른extra 비틀림’, 즉 오직 “이러저러한 단계들을 보여주는 신화들에 부재하는 어떤 단계를 통해서만 변형 사이클을 완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고자 한다(1988: 56). 여기서 이 공식의 의미를 완전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Scubla, 1988 참고). 다만, 체계(닫힘) 통념과 개방성(우발성) 통념의 동연성co-extensivity을 강조함으로써 (유효하고 비표준적인 의미에서의) 구조를 가능한 한 정확한 방식으로 표상하려는represent 시도였다는 점만 알아두자.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구조주의의 가장 급진적인extreme 지점이다. 모든 구조는 탈자ecstasy의 지점이라 부를 만한 것을 포함한다. 즉, 구조는 정적이지도 동적이지도 않으며 탈-자적ex-static이다. 소쉬르의 가치 이론과 레비-스트로스의 표준 공식 모두 탈-정적 구조 개념을 가리킨다. 그들만이 아니라, 인간 과학에서든 철학에서든 모든 위대한 구조주의 사상가들은 구조와 사건 사이의 관계를 변형시켰다.

 

가령, 알튀세르는 구조의 ‘사건적’ 본성을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조했다. 그는 처음에 역사적 구성체 내 ‘수준들’(경제적 수준, 사회적 수준, 정치적 수준, 이데올로기적 수준, 과학적 수준 등)의 상대적 자율성을 기술하기describe 위해 구조 통념을 사용했다. 마르크스에 대한 경제주의적 해석들이 항상 생산의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반대하여, 알튀세르는 이 수준들의 절합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할 수 없으며, 심지어 경제, 친족관계, 정치와 같은 초역사적 범주의 존재를 상정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역사적 구성체는 특정 생산 양식과 그것이 야기하는 모든 효과들에 의해 정의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수준들’의 절합과 결정에 의해서도 정의된다. 이와 같은 구조 통념은 투명한 무시간성atemporality이 아니라, 오히려 사건적 본성nature을 특징으로 한다.

 

마찬가지로,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서구의 에피스테메epistēmēs 체계(대략 르네상스, 고전주의 시대, 근대, 현대)를 재구성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그는 언어의 존재에 관한 물음question에서 이 불안정성의 근원을 발견한다. 푸코의 모든 작업과 마찬가지로 이 분석에서 관건은 우리의 역사적 실존을 한 구조가 다른 구조로부터 ‘전환되는shifts’ 한계 지점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이 점은 들뢰즈, 데리다, 리오타르의 추가적인 사례들을 통해 더 상세히 논의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기호와 구조의 불안정성을 분석하는 데에 자신들의 작업 대부분을 할애했다. 이러한 예들은 구조주의가 그 다양성 속에서, 심지어 그 논쟁들polemics 속에서 하나의 문제가 반복해서 출현하는 공간임을 드러낸다. [구조주의를 제외한다면] 어떤 존재론이 그 존재 자체가 변이를, 곧 우발성을 수반하는 실체의 실존을 설명할 수 있는가?

 

5. 결론

 

문제problem, 기호sign, 변이형variant, 개방성openness. 이것들은 구조 개념의 근본 범주들로서 유효한[실제의] 구조주의와 프랑스철학의 1968년 계기를 연결한다. 구조와 구조주의에 대한 수많은 오해들을 더욱 해체함으로써 다른 범주들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주의를 구조에서 모든 내용을 비워버리는 형식주의로 착각하는 것이 그러한 오해 중 하나다. 실제로 그 유효한 의미에서 단일 도식으로 환원 가능한 구조란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과 인간 과학에서 나타나는 형식주의의 극단적 일의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구조는 다중적 모호성multiple equivocalities으로 짜여져 있다.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구조가 우리에게 작용한다고 보는 새로운 [유형의] 결정론이 아니다. 오히려 구조는 가능성의 새로운 장을 구축하고, 대안적 경로를 개방하며, 구성적constitutive 효과를 갖는다. 구조는 미리 주어진 자유에 가해지는 외부 제약이 아니며, 오히려 가변성variability 그 자체 내에서 이 자유를 확립한다. 같은 맥락에서, 구조주의는 구조를 어떤 목적이나 기능을 향해 정향된oriented 것으로 보는 기능주의의 한 형태가 아니다. 비표준적 구조주의는 항상 목적론적 통념들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규제 혹은 통제control(사이버네틱한 의미에서)의 외양은 맹목적 메커니즘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이는 안정적이고 통제 가능한 체계를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체계를 통제 불가능하게 만든다. 구조는 철저하게 통치 불가능한ungovernable 것이다. 또 다른 혼동은 구조주의를 구조화된 영역(언어, 친족, 건축, 종교 등)의 자율성을 긍정하는 일종의 모더니즘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반면 유효한[실제의] 구조주의는 줄곧 우리 경험의 필연적으로 계층화된 이질적 ‘수준들’과 그 수준들의 절합을 탐구하기 위한 새로운 도구를 생산해왔다. [오해의] 목록은 계속될 수 있다. 구조 개념은 이러한 표준 구조주의의 막이 벗겨져 유효한[실제의] 구조주의가 드러날수록 더욱 명확해진다. ‘생성의 플라톤주의’라는 표현phrase은 이러한 은폐의 과정이 애초에 왜 일어났는지 묻는 질문에 단서를 제공한다. ‘구조주의’라는 이름 아래 사유에 무언가가 발생했고, 이는 오랫동안 사유를 구조화해왔던 대립들을 해체했다. 모든 진정한 사건들이 그러하듯, 이러한 본성의 사건은 은폐와 드러냄의 과정 속에서 그 자신을 반복하게 되어있다. 디오니소스와 구조의 결합은 아직 그 결실을 다 맺지 않았다.

 

 

미주

1) 이 텍스트는 본래 프랑스어로 쓰였고 이후 Alexander Campolo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세심한 작업에 감사드린다. 영역본이 없는 텍스트의 번역은 그의 것이다.

2) 이러한 비난은 구조에 대한 담론에서 항상 반복되는 주제topos이다. Kroeber(1948: 325)를 보라.

3) 교리와 방법 사이의 이러한 대립은 또 하나의 보편적 주제이다(Lefebvre, 1971: 136; Milner, 2002: 179 참고). 이 구별의 가장 정확한 판본은 레이몽 부동의 『구조 통념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A quoi sert la notion de structure?)』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여기서 부동은 구조의 ‘유효한effective 정의’(작동들/조작들operations의 앙상블)에서 ‘의도적intentional 정의’(특성 혹은 속성의 목록)를 분리해낸다(1971: 48). 

4) 이는 구조주의가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적 가치들과 점진적으로 화해하게 된 덕에 벗어날 수 있었던, 서구 역사의 자기 혐오의 시기에 속한다”(Dosse 1997: xxvi)고 결론지었던 프랑수아 도스뿐만 아니라, Descombes(1980), Dufrenne(1968), Frank(1989), Ferry와 Renault(1990)에게서도 반복되는 공통의 수사이다.

5) 여기서 구조주의는 메이야수(2008)가 ‘상관주의correlationism’라고 부르는 것의 한 형태일 것이다.

6) 소쉬르는 계속해서 말한다. “언어는 발화 못지않게 구체적이다… 언어 기호는 기본적으로 정신적psychological[spiritual - 마니글리에]이지만, 추상물abstractions은 아니다”(2011: 15). 그가 강의 후반부에서 덧붙이기를, “언어를 구성하는 기호들은 추상물이 아니라 실재적인 대상이다… 기호들은 우리 학문의 구체적 실체concrete entities이다”(2011: 102).

7) “현대 과학에서 검토되는 현상들의 집합은 어떠한 것이든 기계적 집합체agglomeration가 아니라 구조적 전체로 다루어지며, 기본 과제는 이 체계의 내적 법칙들─정태적이든 발달적developmental이든─을 밝히는 것이다. 과학적 몰두의 초점으로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외부 자극이 아니라, 그 발전 내부의 전제들이다. 이제 과정에 대한 기계적 개념은 그 기능에 대한 질문에 자리를 양보한다”(Jakobson, 1962b: 711).

8) 이러한 구조 개념은 수학자 르네 톰(René Thom)의 연구(1972)의 핵심이었으며, 장 프티토(Jean Petitot 2004)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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