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의 유산
파트리스 마니글리에(Patrice Maniglier) 지음
함은호(연세대학교 비교문학 석사) 옮김
배세진(정치철학자) 감수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프랑스철학을 다루는 권에 ‘구조주의의 유산’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린 것에 의아함을 느낄 수도 있다.[옮긴이: 마니글리에의 이 글은 『대륙철학의 역사(The History of Continental Philosophy)』 제7권에 수록되었다.] 결국 구조주의가 지배적이었던 시기는 1960년대의(어쩌면 고작 1966년부터 1968년까지의[1]) 짧은 기간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구조주의는 그 지도자들에 의해 곧바로 부인되었을 뿐만 아니라(그중 몇몇은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향했다), 철학과 인간 과학human sciences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한편, 레비-스트로스, 라캉, 푸코, 알튀세르, 들뢰즈, 데리다 같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들의 여러 개별 프로젝트로 점차 발전해나감에 따라 그 동일성 자체가 의문시되지 않았던가?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도 구조주의는 사회 과학의 새로운 횡단적 패러다임인 인지주의cognitivism에 의해 대체되지 않았던가? 이것이 일반적인 견해일지는 몰라도, 이 논문의 근간이 되는 확신은 구조주의가 20세기 전후 프랑스철학의 근본적 매트릭스─사회과학 내에 구조적 방법이 도입됨에 따라 제기되었던 철학적 문제들을 두고 분기하는 답변들, 그 답변들의 성좌로 현현했던─였으며, [한 시기에 국한되거나 손쉽게 대체되지 않고] 20세기 말까지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글은 구조주의를 둔중하고 도그마적인 동일성을 지닌 긍정 명제들의 규정된 집합이 아니라, 문제 설정적problematic 통일성을 나타내는present 하나의 운동으로 이해한다.[2] 이러한 통일성은 여러 경험 과학에서 이루어진 방법론적 쇄신에서 비롯되는데, 이 쇄신을 통해 과학들은 과학적 영역에 도입된 새로운 실체─가령,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기호sign라고 불렀던 순전히 차이적이고 위치적인 실체─의 매우 기이한 존재론적 본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거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확립할 수 없다는 것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 글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프랑스철학의 가장 중요한 저작들 중 일부(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도미니크 르쿠르, 자크-알랭 밀러, 장-클로드 밀네르, 미셸 페쇠, 장 프티토의 저작들)가 다음의 관념idea, 즉 구조주의는 주체성subjectivity 통념notion을 기각하기는커녕 세계 내 주체의 출현emergence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철학적 틀을 제공한다는 관념─1968년 직전에 라캉과 알튀세르에 의해 처음으로, 오해를 살 만큼 유사한 용어들로 제시된─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 철학자들 대부분은 『분석잡지(Cahiers pour l'analyse)』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저널에 기고하면서 지적 경력을 시작했는데, 회고적으로 볼 때 이 저널은 향후 수십 년간의 문제설정problematic을 무대에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라캉의 세미나가 고등사범학교(the École Normale Supérieure)로 옮겨왔을 때 그 세미나에 참석했던 알튀세르의 제자들에 의해 창간된 것으로서, 『분석잡지』는 구조주의의 맥락에서 정신분석학의 인식론적 지위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옮긴이: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축출 당해 생트-안느 병원을 떠난 라캉이 알튀세르의 주선으로 고등사범학교에서 세미나를 개최한 것은 1964년의 일이며, 『분석잡지』가 창간된 것은 1966년의 일이다.]
이처럼 이해된 구조주의는 칸트의 딜레마─과학은 가능하지만,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바로 그 세계 내에 어떻게 주체가 나타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거나(왜냐하면 이 세계의 초월론적 구조는 진정으로 자기 규정적self-determined 주체를 위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때문에), 아니면 주체가 세계에 존재하지만, 실재reality 내 무언가가 과학적 객관화[대상화]objectification에 저항한다는 점을 받아들이거나─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구조주의는 칸트와 달리 과학과 주체성을 양립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주체성이 나타날 수 있으면서도 과학적으로 객관화된 이 세계란 자연이 아니라, (레비-스트로스의 정의에서처럼)[4] 상징적 체계들의 집합으로 이해된 문화였다. 여기서 ‘상징적symbolic’이라는 용어는 특정 기능(의사소통 기능)을 가리키기보다는 특정한 존재 유형, 즉 그 동일성이 체계 내 대립 관계와 구조적 위치에 달려있는 차이적이고 위치적인 실체의 존재 유형을 가리킨다. 달리 말해, 구조주의는 기호 개념concept을 통해 새로운 초월론적 ‘존재론’을 제시함으로써 객관적objective 과학과 주관적/주체적subjective 경험을 양립 가능하게 만들 가능성을 제시했다. 문화 체계 일반인 바를 고려할 때, 그 체계 안에서 주체가 생겨나는 것이 가능하며, 어쩌면 필연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주장이다. 이로써 핵심guiding 질문은 초월론적인 것이 된다. 주체가 세계에 나타나 작동할 수 있기 위해, 문화의 존재론, 즉 기호의 존재론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하의 논의에서 나는 존재론적 개념concept으로서의 구조와 효과로서의 주체성 간의 관계가 1968년 이후post 프랑스철학의 핵심 난제 중 하나였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산적인 문제issue로 남아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1. 구조주의에서 하이퍼구조주의로: 구조의 존재론과 효과로서의 주체성
구조주의가 주체성 통념을 기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진정으로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주체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관념idea은 1960년대 라캉의 가르침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었다.[5] 라캉에 따르면, 정신phyche을 자아, 이드, 초자아라는 심급들agencies로 나누는 프로이트의 두 번째 지형학topography은 “구조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논리적으로 정교화하도록 만든 것, 즉 주체─구성적 분열division에 사로잡힌─에 의해 가장 잘 정의되는 어떤 변증법에 입각한 분석 경험의 재작업”에 다름 아니다.[6] 라캉은 “주체의 매우 특수한particular 양태”, 즉 “말하자면 주체가 그 대상으로부터 내적으로 배제되는” 양태에서 “구조주의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표지”를 발견한다.[7] 이 문장을 설명하려면 이 글에 허락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겠지만,[8] 그럼에도 두 가지 예비 질문에 간략하게 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흔히들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가 우리 삶에 대한 설명에서 주체성 통념을 완전히 배제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폴리체의 획기적인 1928년 저서 『심리학의 토대에 대한 비판(Critique des fondements de la psychologie)』을 수용하면서, 라캉은 정신분석학이 진리 통념 없이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더욱이 이 진리는 객관적이고 실체적인substantial 것(마치 자아의 환상 뒤에 무의식의 실정적이고 결정론적인 힘이 군림하는 것처럼)일 수 없으며, 진정으로 주관적인[주체적인]subjective 것이어야 했다. 이러한 주장에는 타당한 논거들이 있다. 사르트르가 지적했듯이, 만약 치료를 통해 나의 증상과 꿈의 기원에 있는 것으로 드러난 그 소망들wishes이 소박한 사실이나 세계에 대한 단순한 데이터에 불과하다면, 또는 내가 그 소망들에 상호주관적인intersubjective 방식으로 혹은 ‘타자’로서 관련되는 것이라면, 나는 왜 그 소망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들을 ‘나의 것’으로 간주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왜 나는 가령 분석가의 소망들보다 이 소망들을 [‘나의 것’으로] 떠맡아야 하는가? 만일 내가 이 소망들을 떠맡지 않는다 해도, 치료는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가?
그런데 만약 주체가 물thing도 아니고, 칸트가 제시한 것처럼 투명하고, 자기 규정적이며, 자기 구성적인 행위 역량capacity도 아니라면 어떨까. 우리는 다소 은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주체는 (주체를 도덕 법칙의 합리성과 엄밀하게 동연적인 것으로 보는 칸트에게 그러한 것과 달리) 결코 그 자신의 발생engendering과 동시적contemporary이지 않고, 일치coincident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주체는 항상 자기 자신보다 뒤처져 있고, 항상-이미-결정된having-always-already-decided 것으로서 스스로를 발견하며, 이러한 지연delay 자체를 통해 자신을 구성한다. 하지만 이 일차적인 이미-여기-있음being-already-here은 주체가 자신을 하나의 사실로 기록할 수 있게 해주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주체의 역설적 본성을 가리키기 위해 라캉은 ‘분열된 주체split subject’라는 유명한 용어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특징지어진다. “나는 내가 있지 않은 곳에서 사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사유하지 않는 곳에 있다”.[10] 그러나 이는 내가 다른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 의미하는 바, 나는 바로 이 전치displacement에 다름 아니다. 아울러 라캉은 기호와 사실 간의 일치correspondence에 있지 않은 그러한 진리는 수사학적 의미에서의 비유들figures─여기서 기호는 어떤 사물을 지시함으로써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한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의 전치로 기능한다─속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암시한 바 있다. “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와 같은 진술proposition의 진리는 “우리는 꿈과 같은 존재이므로 우리의 자잘한 인생은 잠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진술의 진리와 동일한 종류의 것일 터이다.[옮긴이: 윌리엄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이경식 옮김, 문학동네, 2009, 101쪽.]
주체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그다지 독창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실상 최소한 헤겔에서부터 사르트르까지, 키르케고르와 하이데거를 거쳐 이어지는 아주 오랜 전통 또한 주체를 자기 자신과의 일치 불가능성에 의해 주어지는 자기 관계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르트르에게서처럼] 자신이 아닌 것이자 자신인 것이 아닌 불가능한 존재의 형태를 취하든, [헤겔에게서처럼] 동일성과 차이가 동일한 존재의 형태를 취하든, [키르케고르에게서처럼]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과업인 존재의 형태를 취하든, [하이데거에게서처럼] 궁극적으로 자기 안에/스스로 있을 수 없는 탈존적 항의 형태를 취하든 말이다.
그러나 [주체에 대한 라캉적 정의에서] 독창적인 것은, 이 역설적 요소가 철학적이고 선험적인a priori 접근을 통해서만 다뤄질 수 있는 기원적인 것이기는커녕, 구조주의와 같은 과학적 접근에 의해 ‘가장 잘 정교화된다’는 주장이다. 이로써 즉시 두 번째 예비적 질문이 제기된다. 구조주의가 주체성에 대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소쉬르는 의미가 주관적subjective 의도에 있지 않으며, 기호들 각각의 대립에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11]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철학적 입장을 “초월론적 주체 없는 칸트주의”로 규정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12]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주의적인 ‘주체 없는 과정’을 옹호하지 않았던가?
구조주의가 주체성 이론을 요구한다는 점을 가장 탁월하게 논증한 이는 당시 겨우 스무 살이었던 자크-알랭 밀러─훗날 『분석잡지』의 편집자가 되었고, 결국에는 라캉의 사위이자 유산 상속자가 된─이다. 이 논증은 「구조의 작용(Action de la structure)」이라는 논문에 제시되었는데, 나는 이 논문이 그의 세대의 기본 프로그램을 정식화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밀러는 만일 구조주의가 주체성 이론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구조주의를 문화 과학의 모든 영역으로, 특히 인간학/인류학anthropology으로 확장하는 것은 무효하다고 쓴다. “말하는 주체를 배제함으로써 야기되는 변질alteration이 무효화되지 않는 한, 언어학에 고유한 구조는 그 기원 영역을 넘어서는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13] 왜 그러한가? 첫째, 언어학은 소쉬르가 랑그langues라고 부른 추상적 대상을 연구하는 반면, 인류학은,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모스의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 통념의 진정한 의미란 바로 “객관성 속에 주관성을 재통합하는” 것임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며 인정했듯이, 인간을 그의 행위(말하기, 일하기 등) 전체를 포함하는 살아있는 총체성 속에서 연구한다.[14] 그러나 둘째, 만약 구조주의가 구조의 효과 중 하나로서 주체(그 혹은 그녀 자신이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모든 의미의 기원이라고 여기는 바로 이 주체)의 출현emergence을 설명할 수 없다면, 구조주의는 구조의 실제 기능작용functioning에 대한 설명을 가장 고전적인 철학적 인간학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효과로서의 주체성을 해명하지 못한다면,] 설령 언어적 수행performance이 언어 체계 내에서 선결정된 가능성의 실현actualization에 불과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다른 가능성이 아니라 이 특정한particular 가능성이 실현된 까닭을 실현된 까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선택한’ 주체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결국 리쾨르의 작업이 설득력 있게 보여준 것처럼, 구조주의에 의해 훼손되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주체성, 맥락, 지시, 실천practice─이 사용use 혹은 발화라는 또 다른 층위로 되돌아올 것이다.[15]
따라서 「구조의 작용」은 구조주의가 완전히 일반적인 구조 개념(이로써 구조 개념은 밀러가 논리logic라고 부르는 것, 즉 상징 체계 일반의 형식에 대한 이론에 속하게 되며, 그는 이를 ‘기표의 논리’라고 부를 것이다)으로, 곧 모든 상징 체계의 작동workings에 주체 효과가 함축되어 있음을 설명, 더 정확히는 정식화할 구조 개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조주의에 대한 철저히 개념적인 접근과 주체성에 대한 인과 이론, 이 두 가지 측면은 훗날 장-클로드 밀네르가 ‘하이퍼구조주의’라고 부르게 될 것을 규정한다.[16]
그런데 [앞선 두 가지 예비적 질문에 더하여] 마지막 예비적 문제concern가 제기된다.[옮긴이: 마니글리에는 예고한 대로 두 가지 예비 질문─주체의 문제를 다루는 첫 번째 예비적 질문과 구조주의적 주체성 이론의 가능성, 더 나아가 필요성을 시사하는 두 번째 예비적 질문─을 제시한 뒤, 그러한 논의에서 한 가지 추가 질문이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구조주의가 실제로 그토록 일반적인 수준에서 기능할 수 있는가? 언어, 의복, 친족관계, 의례, 신화 등 문화의 특정 영역을 다루는 각 학문 분야의 과제는 그 상징 구조의 실제actual 주체 효과에 대한 구체적인specific 설명을 제시하는 것 아닌가? 모든 일반적 구조 개념이 그것을 도입한 여러 학문 분야들 내에서 구조적 용어가 사용되는 다양한 방식을 포괄하기에는 너무 정밀하며precise, 진정으로 유의미한 것이 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아닌가?
구조와 주체성 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논리적’ 접근을 지지하는 최상의 논증은 밀러의 1964년 논문 「구조의 작용」이 아니라 밀네르의 후기 저작 『구조적 대항해』(2002)에서 발견된다. 밀네르의 이 저서는 [1960년대라는] 프랑스의 해당 시기에 대한 몇 안 되는 진지한 역사적 해석 중 하나이자 동시대 프랑스철학이 구조주의에 갖는 새로운 관심을 드러내는 주요 징후sign이다. 언어학자인 밀네르의 논증은 구조 언어학이 제기한 철학적 쟁점들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강점을 보인다. 그는 구조 언어학이 언어의 구조적 차원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구조 언어학이 이 구조적 차원을 통해 언어적 실재를 정의했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체계에 속한다는 것은 기호의 속성이 아니라, 그 존재existence와 본질에서 기호를 구성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언어에서 언어 특유의specific 모든 것, 따라서 구조적 수준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것, 구조 언어학은 정확히 이것을 목표로 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성한다”.[17] 따라서 구조주의는, 그것이 우선 언어의 구조 자체로의 환원인 한에서, 언어학적 모델의 모든 문화 현상으로의 확장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 기호 개념의 다양한 문화 현상으로의 확장이 공통 기능(예컨대 로만 야콥슨이 주장한 의사소통 기능)이라는 전제에 근거하지 않으며, 공통의 문제적problematic 존재 양식에 근거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신화의 변이형variants이 마땅히 기호라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변이형이 의사소통에 기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차이성differentiality, 이원성duality, 공동결정codetermination 등 동일한 존재론적 특성─소쉬르가 최초로 언어에서 추출해낸─을 공유하기 때문이다.[18] 따라서 구조를 각각의 특정 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뒷받침해줄 구조의 일반 이론이 존재해야 한다. 만약 그러한 일반 이론이 실제로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이는 구조주의에 결정적인 반박이 될 것이다. 요컨대 구조주의는 하이퍼구조주의적이어야 한다.[옮긴이: 밀네르가 제시한 하이퍼구조주의의 테제들은 “개념적 절합articulations conceptuelles”을 통한 “최소한으로의 환원reductio ad minimmum”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밀네르는 구조주의가 이러한 환원 프로그램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다면, 이론적으로 불완전한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언급은 밀러가 「구조의 작용」에서 지적했던 ‘논리’의 본질nature을 소급적으로 해명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중요성을 지닌다. 그러한 해명이 드러내는 바, 이 ‘논리’란 실로in truth 하나의 존재론이다. 그러므로 『분석잡지』는 구조주의가 자신의 존재론적 차원을 자각하는 순간을 재현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분석잡지』의 주요 가설에 대한 보다 생생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 가설인즉, 우리는 소쉬르가 기호라고 불렀던 기이한 실체에 감응하기sensitive 때문에 주체로 구성된다. 물론 이는 이 대상들의 구성의 기저에 어떤 종류의 인지 기능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능은 얼마든지 맹목적이고 자동적인 데이터 처리 기능, 곧 상징적 기능일 수 있다. 담론의 기원 혹은 우리가 생산하는 기호들에 선행하며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어떤 기능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주체성 자체는 이미 주어진 대상들의 영역, 즉 언어 또는 담론의 영역에서 발생한 무언가이다.[19] 우리는 ‘그것이 말한다It speaks’라는 친숙한 구조주의적 표어에, 그것이 말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내가 말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덧붙여야 한다.
그러나 「구조의 작용」에서 밀러는 순전히 개념적인 혹은 논리적인 접근을 옹호하기 위해 또 다른 논증을 이용했다. 그는 개념concepts을, 하나의 이론적 영역에서 또 다른 영역으로 관념들과 방법들을 수출하기 위한 도구로 정의하는 캉길렘을 원용한다(캉길렘의 이 정의는 이후 『분석잡지』의 모든 호에 제사로 등장하게 된다).[20] 캉길렘에 따르면, 바슐라르는 과학이 외견상 상이한 두 지식 영역에서 동일한 문제 설정적 구조를 인식하는 ‘변증법’에 의해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전기 이론과 운동 이론 간의 변증법은 현대 물리학으로 이어진다.[21] 밀러는 구조 이론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외견상 상이한 이론 영역들─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더 정확히는 각각에 대한 알튀세르와 라캉의 재해석─의 심층적 동일성을 드러낸다고 여겼다. 라캉이 무의식은 의식의 배후에 있는 실정적 실체substance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알튀세르는 역사에서 ‘실제적인real’ 인과력은 우리가 믿기에 효력이 있는 결정의 수준들 배후의 또 다른 실체적 수준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반대로 그러한 인과력은 이 상이한 수준들의 표면에서, 그리고 그것들이 ‘절합된 복잡한 전체’에서 서로 관계 맺는 방식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22] 고로 원이란 물thing이 아니라 구조 그 자체이다. 이에 또 다른 수준의 실재reality를 정의하지 않으면서도 진정한 인과력을 갖는 어떤 구조 개념에 대한 신념이 알튀세르와 라캉의 작업을 연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구조적 인과성’ 이론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구조란 현상의 배후에 있는 또 다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부재하는 원인’, 즉 오직 그 해석/효과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원인이다.
이제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재정식화할 수 있다. 자신은 그 안에서 작동하는operates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작동의 연쇄를 촉발하는 바로 그 방식을 통해 작동하는 원인, 더 정확히는─의도적intentional 개념을 확실하게 방지할 필요가 있으므로─자신이 이끄는 바로 그 작동에 부재하는 원인 개념을 모색해야 한다. ‘결여의 인과성’(causalité du manque) 개념, 즉 원인의 부재가 원이 갖는 효과성의 원리를 이루는 인과성 개념은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다. 만약 모든 상징 체계에는 그로부터 배제되는 바로 그 방식을 통해 [그 체계에] 포함되는 어떤 항이 존재한다는 것을, 즉 그 자신의 불가능성이기도 한 어떤 가능성에 의해 [체계에] 포함되는 항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논증할 수 있다면, 그로써 상징 체계가 프로이트적 의미의 주체를 함축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구성할 수 없음을 보인 셈이 된다. 왜 그러한가? 우리가 보았듯이,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실정적 실체가 아니라, 오직 전치된 존재being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항, 즉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것의 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2. 봉합 그리고 기표의 논리: 자크-알랭 밀러
이러한 ‘기표의 논리’는 여러 단계를 거쳐 구성되었다. 첫 번째 시도는 『분석잡지』의 창간호에 실린 자크-알랭 밀러의 매우 영향력 있는 텍스트 「봉합(La Suture)」에서 이루어졌다.[23] 밀러는 결여된 것을 통해 인과성이 작동하는 관계에 ‘봉합’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 논증은 예상 밖의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밀러는 소쉬르적 의미의 기호에서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프레게가 『산수의 기초(Foundations of Arithmetic)』에서 시험적으로 산수를 논리로 환원하려 한 데서 출발한다. 마치 논리 그 자체 내에서 주체성의 흔적을, 즉 실체적substantial 동일성 없이 오직 전치시키는 기능만을 갖는 항을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 말이다. 밀러는 프레게의 추론에서 세 단계를 분리해낸다. 첫째, 수number는 어떤 개념에 대한 동일성 개념으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아가멤논과 카산드라의 자녀들”은 펠롭스와 텔레다무스를 가리키지만, “‘아가멤논과 카산드라의 자녀들’ 개념과 동일한” 개념은 2를 지시한다. 펠롭스와 텔레다무스는 그들의 모든 성질qualities을 박탈당하고 순수한 표지로 환원되는 것이다. 둘째, 프레게는 “자기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대상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 개념의 외연은 비어있지만null, “’자기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이라는 개념과 동일한” 개념의 외연은 비어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영zero이다. 영은 어떤 대상도 포섭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대상이다. 셋째, “3까지의 모든 수들의 수열”이라는 개념이 3, 2, 1 그리고 0이라는 네 개의 항을 포섭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결과적으로 영은 수와 대상 간의 관계 내에 불균형을 도입한다. 다시 말해, 항상 대상보다 수가 더 많다. 사물의 측면에서 부재로 나타나는 것이 이름의 측면에서는 과잉으로 기능한다. 이 불균형은 자연수의 전체 계열을 발생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무nothing를 무언가로 표상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계열의 일의적 순서로 배열될 수 있다는 듯 말이다. 영이 포섭하는 결여는 존재하지 않지만, 효력을 갖는다. 그 결여는 작동한다. 그 자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영은 그것이 계열 내 다른 모든 항에 부과하는 전치에 다름 아니다.
물론 밀러는 영에서 주체의 흔적을 본다.
그 불가능한 대상, 논리[학] 담론이 스스로와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소환했다가 순수한 부정이라 배격하는rejected 대상, 즉 논리[학] 담론이 그것에 대해 무엇도 알고자 하지 않으면서 소환했다가 배격하는 대상, 그 대상이 수의 계열 내에서 작동하는 과잉으로 기능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 대상을 주체라고 명명한다. 대상이 내적으로 암시하는 담론으로부터의 그 대상의 배제가 바로 봉합이다. 이제 그 특성trait을 기표로 규정하고, 수에 기의의 위치position를 부여한다면, 우리는 결여가 그 특성과 맺는 관계를 기표의 논리로 간주해야 한다.[24]
전통적인 논리 형식이 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개념과 대상이 아니라 결여lacks와 표지marks를, 더 정확하게는 기표와 주체를, 즉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의미화하지 않지만 바로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다른 기표에 의해 의미화되는 기표를 다루는 또 다른 논리가 요구된다는 것이 밀러의 생각idea인 듯하다. 이는 기표란 다른 기표를 위해 주체(불가능한 혹은 모순적인 항)를 의미화하는 것이라는 라캉의 정의를 예시한다.
밀러의 구성construction은 라캉의 악명 높은 다음 구절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무의식의 주체는 과학의 주체이다”.[25] 하지만 그 이론적 구성의 지위는 불분명하다. 이는 단지 ‘봉합’(부재하는 원인causa in absentia)이 작용하는 방식의 한 예시일 뿐인가? 주체를 모든 구조적 영역에 존재케 하는 작동의 본성을 유비analogy에 호소함으로써 해명하려는 시도인가? 하지만 ’기표의 논리‘는 자신이 근거지우는 바로 그것에 호소함으로써 명료해질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앞의 두] 해석은 일종의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이 텍스트를 더 강한 주장을 하려는 시도로 읽어야 한다. 그 주장인즉, 가장 형식적이고 외견상 일의적인unequivocal 사유 형태조차도 상징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권한access, 즉 구조주의자들이 기표라고 부른 기이한 실체를 파악하는 우리의 역량capacity에 의존한다. 기표는 지시를 통해 기능하지 않는다. 기표들은 그중 하나가 무nothing의 자리를 점유할 수 있고, 기호들의 실정성과 기호들이 표시하는 무 사이의 불균형을 통해 각 기호가 다른 기호 위에 구축되는 자율적 계열을 촉발할 수 있기에 기능한다. 상징적 사고를 모든 사고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하는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The Savage Mind)』의 처음 몇 쪽들과 마찬가지로, 이는 형식 논리 자체의 이면에서 가장 근본적인 논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는 기호를 개념과 대상 간의 관계가 아니라, 결여와 표지 간의 관계에 의해 정의해야 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봉합」에서는 아직 이러한 ‘논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이를 찾기 위해서는 밀러의 1975년 텍스트 「매트릭스(Matrice)」로 눈을 돌려야 한다. 우리는 이 텍스트가 기호의 존재론과 맺는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그 논증을 다소 자유롭게 재구성할 것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위치적 실체이다. 즉, 기호는 그 자신의 위치 외에 다른 참조점reference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표지 자체에서 모든 것이 소거되고 남은 바, 즉 무nothing가 아니라면, 위치란 무엇이겠는가? 고로 위치적 실체는 자기 자신의 일부로서 그 자신의 부재를 포함하는 실체이다. 위치적 실체라는 이 개념 자체는 따라서 대상이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더하기-그 자신의-부재itself-plus-its-own-absence로 분열됨을 함축한다.[26] 이는 항Term→결여Lack→항(=항+무Nothing)→결여...의 반복을 위한 매트릭스를 제공한다. 이 항들(T′, T″, ...)을 구별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지만, 항의 계열과 그 부재의 계열이라는 두 계열을 고려할 때만 그러하다. 이 계열들은 평행하지 않고 어긋나 있으며lagged(décalés), 바로 이 어긋남(décalage)으로 인해 서로 관계 맺는다. 또한 이 계열들을 단 하나의 불가능한 혹은 분열된 실체─그들 중 어느 것도 될 수 없으면서 그들 모두인 실체, 곧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기에 마땅히 주체라고 불릴 수 있는 불가능한 대상─의 반복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밀네르는 『구조적 대항해』에서 기호의 차이적 본성에 근거하여 위와 유사하면서도 좀 더 간결한 논증을 제시한 바 있다. 첫째, 밀네르는 기호가 관계적 실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다른 항이 존재하지 않으면, 기호는 어떤 속성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음소 /p/는 ‘무성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영어에서) 이 자질에 따라 구별되는 항인 /b/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p/는 어떤 속성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속성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p/는 순전히 차이적인 항으로서 자신의 변별적 자질들에 의해 정의되므로, 이 속성들을 귀속시킬 실체substance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27] 둘째, 모든 상징 체계의 항들에 공통된 한 가지 속성이 있다. 바로 그들이 차이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항이 없다면 속성도 없으므로) 그 항들 모두가 참조하는refer 어떤 항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항 또한 [밀러의 논증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스스로와 관계 맺어야 한다. 결론은 이 항이 모든 발생occurrence으로부터 스스로를 비움으로써만absenting 존재하는 불가능한 혹은 역설적인 항, 즉 주체─이러한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noncoincidence에 의해 정의된 전통에 따르면─라는 것이다. “어떤 구조적 항이든 그 자체로 자기 자신과 동일하지 않다는non-identical 것을 인정한다면, 주체란 연쇄의 모든 항의 ‘자기 자신과 동일하지 않음not-identical’을 떠받치는 항이다”.[28]
이 논증에 대해 여러 이의 제기가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이 논증이 논쟁의 여지가 있는 두 가지 선전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첫 번째 반론에 따르면, ‘기표의 논리’ 관념은 그 자체 이 논리가 모든 상징적 과정에, 따라서 과학적 담론과 비과학적 담론 모두에 동등하게 유효해야valid 한다는 점을 함축한다. 여기서 문제는 그러한 주장이 상징적 과정을 다루는 동질적homogeneous 이론이라는 명목 하에 과학과 이데올로기 간의 구별을 지워버린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반론에 의하면, (만약 이러한 분석들이 유의미하다면) 이는 기호로서의(따라서 차이적 실체로서의) 문화적 현상에 대한 구조주의적 접근이 경험적 토대를 갖는다는 조건 하에서만 그러하다. 그러나 이 접근법은 노엄 촘스키의 생성 문법에 의해 비판받아 왔다. 이러한 반론들은 구조 개념과 주체 개념 모두를 다르게 해석하는 대안적 형태의 ‘하이퍼구조주의’를 등장시킬 것이다.
3. 형식적 생산성에서 존재 수학으로: 기표의 논리에 맞서는 바디우
[과학과 이데올로기 간의 구별을 옹호하는] 첫 번째 반론은 현대 프랑스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인 바디우의 초기 논문 「표지와 결여: 영에 관하여(Marque et manque: À propos du zéro)」에서 전개되었는데, 이 논문 역시 『분석잡지』에 발표되었다.[29] 나는 바디우의 철학적 기획 전체가 여기서 논의되는 쟁점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아갈 것이다. 자크-알랭 밀러는 산수가 순전히 개념적인 불가능성(“자기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 즉 어떤 사유 불가능한 것에 호소함으로써 구성된다는 프레게의 의심할 여지 없는unquestioned 주장에 기대어 ‘기표의 논리’를 형식 논리에 적용한다. 그러나 「표지와 결여」에서 바디우는, 논리는 밀러가 ‘봉합’이라고 부른 이 작동에 호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기호학적 사유의 제약에서 자유롭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한다. 바디우는 1960년대 알튀세르의 스피노자주의적 영감inspiration의 연장선상에서, 과학은 이데올로기와 달리 주체 없는 과정, 즉 그 형식적 장치apparatus의 내재적 생상성 안으로 완전히 포괄되는 과정이라는 주장을 옹호하며, 라캉과의 직접적인 대립 속에서 “과학의 주체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 반론의 핵심은 아주 간결하다. 프레게의 구성은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라는 정의에 기대어 있다. 그러나 바디우에 따르면, 논리 기호logical symbols는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논리에 대한 가장 형식주의적인 이해에 따라 바디우가 강조하는 바, [부정을 나타내는 논리 연산자 ‘~’ 같은] 논리 기호는 다른 문자에 대한 연산operation을 정의하는 문자로 간주되어야 하며, ‘봉합’과 무관한 순전히 구성적인 절차를 통해 이전에 문자(혹은 문자열)로서 도입된 것 외에 다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30] 마찬가지로, 영은 형식 이론의 다른 수준 혹은 층에서 이전에 정의된 어떤 것을 지시한다.[옮긴이: 과도한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바디우의 복잡한 논증을 아주 간략하게나마 부연하자면, 바디우는 독립적인 네 단계의 메커니즘을 도입하여 0을 연역한다. 모든 기호를 조합하는 M1(연결concatenation)에서 ‘x는 y와 동일하다’를 의미하는 이항 술어 I(x,y)를 비롯하여 x(I,x), I(x,x), ~I(x,x) 등의 표현들이 산출된다면, M2(구성formation)에서는 올바르지 않은 형식의 x(I.x)가 배제될 것이다. 또한 참인 진술만을 수용하는 M3(도출derivation)에서 I(x,x)는 수용되지만, ~I(x,x)는 배제되어 M2에 침전될 것이다. 바디우는 이러한 M3에 영이라는 고유명이 추가된 논리 체계 M4를 가정함으로써, M2에 침전된 ~I(x,x)가 M4에서 0으로 재도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영이 드러내는 것은 결여가 아니라, 층 간의 생산적 차이이다.] 왜냐하면 계층화는 모든 형식 체계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전 체계에 새로운 규칙과 기호symbols를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체계가 구축될 수 있다. 바디우는 자신의 논문에서 [대문자]사유 불가능한 것the Unthinkable에 전혀 호소하지 않고도 영을 연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형식적 증명을 제시한다. 대신 그는 영이 한 수준에서 도입되고, 또 다른 수준에서 배제되며, 최종 수준에서 재도입되는 상이한 층들을 활용하여 영을 연역한다. 형식 체계 내에서 결여는 항상 표지의 결여이며, 결여의 표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우리는 적어도 하나의 언어에서는(‘자리-표시자place-holder’에 의해 표지된 불가능한 대상으로서의) 주체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 언어는 논리[학] 자체이며, ‘과학’의 언어이자 모든 수학적 사유의 핵심이다. 따라서 “무의식의 주체는 과학의 주체”라는 라캉의 말은 틀렸다. 과학은 주체를 갖지 않으며, 바로 이것이 과학을 ‘이데올로기’ 혹은 상징적 사고─자신의 생산 과정을 은폐하는 바로 그 방식에 의해 특징지어지는─와 대비되는 것으로 정의한다.[31]
이 초기 텍스트는, 바디우의 성숙기 저작이 이러한 초기 입장에 대한 일종의 엄격한 개정판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존재와 사건(Being and Event)』에서 바디우는 분명한 ‘하이퍼구조주의적’ 관점을 지지한다. 첫째, 바디우는 밀러의 논증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뒷받침했던 논리주의적 수학 이해를 명시적으로 포기한다.[32] 둘째, 그는 주체가 이데올로기의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기능이라는 주장을 옹호하며,[33] 심지어 그러한 주체 이론과 존재론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밀러의 물음을 수용한다.[34] 셋째, 이 존재론은 구조─주체의 출현emergence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는─에 대한 일반 이론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라캉의 개념들을 ‘형식화formalize’하려는 밀러의 시도와 깊이 공명한다. 요컨대, 바디우는 자신의 후기 저작에서 구조 개념과 주체 통념 모두를 재정의하면서도, 하이퍼구조주의적 프로그램을 승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바디우의 고도로 정교한 구성을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다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구조적 존재론과 주체 이론의 양립 가능성을 증명하려는 시도의 핵심은 구조(이때 구조는 순수 다수성─그 자체로 다수성만을 포함하여 셈하기가 불가능한 것─을 단위들의 다수성, 즉 구조에 속하며 구별되고 셈해질 수 있는 요소들의 다수성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35])와 바디우가 메타구조라고 부르는 것 간의 불일치에 있다. 이 메타구조는 구조의 작동/작업operation을 구조 자신의 효과에 대해 반복하되, [전의 구조화 작용과 달리] 원소가 아닌 부분집합을 셈하여 이전에 구조에 의해 현시된 단위들을 재현한다re-present. 주지하다시피 어떤 집합의 부분집합의 수는 항상 그 집합의 원소의 수보다 더 많다. 바디우는 무한집합의 경우 이러한 차이가 측정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폴 코언의 중요한 정리(1963년에 발표)를 활용하여, [대문자]존재(즉, 다수 혹은 집합) 내에서 주체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위치 짓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무한집합들에는 원래 상황의 언어 내부로부터 구성될 수 없음에도 그 존재가 증명될 수 있는 부분집합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집합들은 ‘식별 불가능하다indiscernible’고 말해진다. 바디우의 주장은 진리가 그러한 부분집합들, 즉 우리가 이미 아는 것에 근거하여 존재existence를 부여할 수 없지만, 그 실현realization이 ‘강제될’ 수 있는 부분집합들이라는 것이다. 이때 주체란 그처럼 식별 불가능한 부분집합의 존재 가설에 따라 집합이 재조직되는 작업operation에 다름 아니다. 주체는 실체가 아니라, 진리의 전개 이전에는 그 근거를 마련할 수 없었던 진리의 귀결들이 세계 속에서 전개되는 작업이다.[36] 구조 자체의 본질적인 찢어짐tearing up이야말로 주체가 세계에 출현할 가능성의 조건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밀러나 밀네르뿐만 아니라 바디우에게도 주체성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은 [대문자]존재의 구조적 구성construal이다.
그럼에도 『존재와 사건』은 여전히 그가 초기 논문에서 내린 결정들에 의해 규정된다고 볼 수 있다. 라캉적 질문에 대한 바디우의 독창적인 답변을 특징짓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표의 논리’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지속적인 회의skepticism이다. 첫째, 형식 논리보다 더 심층적인 논리를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디우는 기호의 특수한specific 존재론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37] 그는 존재론이 존재하는 것을, 그것이 존재하는 한에서 그리고 특정한 어떤 것이 아닌 한에서, 다루는 완전히 일반적이고 불특정한nonspecific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이 단일한single 존재론은 자연과 문화에 동등하게 유효하며, 바디우는 이 둘을 구별하고자 하지 않는다. 형식 논리가 전자[자연]에 대한 증상적 분석을 제시하기 위해(밀러가 프레게를 통해 하려던 것이 이것이다) 어떤 ‘다른’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디우가 주장하는 바, 수학은 독특한 특질의qualitatively distinctive 기호 체제를 구성하며, 이 체제는 완전히 자족적이다. 일반적인 발화 능력capacity이나 상징 기능의 관점에서 이 체제를 이해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다시 말해, 수학에 기호학semiotic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특히 결정적인 것은 다음의 사실인데, 바디우에게 있어 주체란 구조의 구성과 동연적인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구조 내에 위반적transgressive 요소, 즉 사건─자기 자신에 속하는 집합으로 정의되는─이 도입됨에 따라 발생하는 무언가이다. [옮긴이: 바디우에 따르면, 사건이란 Ex={x|x∈X, Ex} 즉,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는 집합이다. 이처럼 정의된 Ex는 집합의 자기 귀속 금지를 함축하는 정칙성 공리를 위반한다.] 모든 구조는 역설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던 밀러나 밀네르와는 대조적으로, 바디우에게 있어서 구조화된 집합은 어떤 역설적 요소를 내포하지 않고도 완벽하게 존재할 수 있다. 문제는 ‘주체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위해 존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주체가 발생할 수may 있으려면, 존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이다. 다시 말해, 이는 출현emergence의 문제가 아니라, 양립 가능성의 문제이다.[38] 이 점은 다음을 함축하기에 매우 중요하다. 바디우가 보기에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주체 되기는 기표에 그치지 않고 진리에 접근할 것을 요구하며, 이러한 접근은 그 정의상 희소하다. 주체성은 삶의 주어진 차원이 아니다. 바디우가 보기에 “‘항상’ 어떤 진리와 어떤 주체가 있다고 가정했던” 라캉과는 반대로,[39] 바디우는 수많은 말하는 존재들이 주체가 되지 않고도 평생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4. 이데올로기 이론: 르쿠르, 발리바르, 페쇠
다른 형태의 하이퍼구조적hyperstructural 관점─‘기표의 논리’에 전혀 호소하지 않는─에서 주체 이론을 제시하려는 이 인상적인 시도는 그럼에도 두 가지 반론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 반론들은 우리가 그려보고자 하는 20세기 후반 프랑스철학의 지형도 상에서 두 가지 새로운 토픽적 위치topical positions를 규정한다. 첫 번째 반론은 바디우의 첫 번째 이의제기[옮긴이: 앞서 2절 후반부에서 언급된 ‘기표의 논리’에 대한 두 가지 이의 제기 중 과학과 이데올로기 간의 구별을 옹호하는 첫 번째 주장을 기리킨다.]가 비롯되었던 인식론적 영역에 머물러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디우는 초기 논문과 후기 저작 모두에서 이른바 프랑스 인식론적 전통(당시 알튀세르에 의해 재해석되고 있었던)의 주요 테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40] 그 테제인즉, 과학은 진리의 발견─마치 그러한 진리가 적합한 지성에 의해 밝혀지기를 기다리며 저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창조creating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창조는 어떤 형태의 상대주의도 함축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리의 보편성을 정초한다(진리는 그 자신의 발생occurrence 조건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break’ 개념은 정확히 다음을 주장하고자 했는데, 과학은 세계에 대한 올바른 견해들을 계속해서 축적해가는 연속적 과정이 아니라, 사유 구조 자체를 완전히 재구성하는 일련의 불연속적 과정이다. 마치 진리가 항상 그 자신의 주체적 조건을 창조하는 것처럼 말이다.[41] 진리는 항상 혁명적이며,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바와 주관적/주체적 사유 역량 모두를 동시에 변화시킨다.
그러나 과학과 비과학 사이의 이 날카로운 구별은 바슐라르적 전통 내에서도 알튀세르의 여러 제자들에 의해 문제시되어 왔다. 그들은 이러한 구별이 과학을 이데올로기화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며, 인간 존재의 역사로부터 과학을 분리시킴으로써 과학을 (토템화한다고까지는 아니더라도)실체화한다고hypotasizes 주장한다. 따라서 이 구별은 과학 일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역사적 단절disruption의 효과들이 존재할 따름이라는 바슐라르의 핵심 통찰을 상실할 위험에 항상 놓여있다.
과학철학 및 과학사에 관한 후기 작업을 통해 우리의 과학 개념concept을 이끄는 이미지와 그 정치적 함의에 깊이 천착하게 되는 도미니크 르쿠르[42]는 일찍이 경력 초반에 다음을 지적한 바 있다. “바슐라르에 의해서 지시되고 있는 것, 그러나 사고되고 있지는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그것은, 과학사 개념을 구성하기 위하여 상상적 관계라는 개념을 이데올로기들에 관한 이론과 그것들의 역사에 회부해야 할 필요성이다”.[43] 이데올로기의 어휘로의 이러한 번역이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바슐라르의 상상력imagination 개념이 지닌 가장 큰 난점, 즉 그것의 절대적으로 비역사적인 성격이다. 바슐라르에게 있어 상상력이란 우리가 일상 세계를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자명한 지각들을 생산하는 기능이자 과학적 인식knowledge에 대한 장애물을 구성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르쿠르의 타당한 지적에 따르면, 이 개념은 인식에 대한 모든 일반적 철학을 거부하는(과학은 자신의 조건들을 끊임없이 전복시키는 역사적 과정이므로, 그 조건들을 선험적으로 규정지으려는 모든 시도를 사전에 무너뜨린다) 바슐라르 자신의 혁신을 약화시킨다. 왜냐하면 바슐라르의 ‘시학poetics’이 초월론적 인식 이론과 동등한 것일 때, 상상력은 과학의 무시간적 조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반대로 이 자명한 지각들을 생산하는 역사적 장치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정식화 이후, 르쿠르는 문화적 역사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기를 거부하는 과학사의 여러 실제practical 사례들을 제시해왔다.
정치철학에 대한 기여로 가장 잘 알려진 에티엔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에 대한 일련의 논문들(Écrits pour Althusser)과 『진리의 장소들과 이름들(Lieux et noms de la vérité)』이라는 짧은 저서에서 동일한 논증을 보다 개념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옹호한 바 있다.[44] 발리바르가 ‘과학적 이데올로기’[45]라는 캉길렘의 역설적 개념에 기대어 기계론의 예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 이데올로기는 벗어나야 할 부정적 조건일 뿐만 아니라, 역사에 기여하는 실정적 요인이기도 하다. 힘force, 절대 공간, 시간이라는 개념들에 대한 가능한 해석들(실체론적인 혹은 실증주의적인)을 둘러싸고 벌어진 형이상학적 (즉, ‘이데올로기적’) 논쟁들은 아인슈타인의 혁명적인 물리학 변혁의 관점에서 볼 때 ‘인식론적 장애물’로 기능하지만, 또한 뉴턴 고전 역학의 내적 모순들을 명시적으로 드러냄에 따라 그 위기를 예비한다. “[기계론의-발리바르]인식론적 장애물로서의 역할은 단지 과거만을 향해 있지 않다. 반대로 그것은 과학이 자신의 미래를 향해, 따라서 자신의 위기를 향해 나아가도록 변증법적으로 기여한다”.[46] 따라서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비대칭적 단절breaking-up의 관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보다 변증법적이다. 다시 말해, 과학의 재이데올로기화는 과학의 역사에 기여한다.
이는 진리가 결코 인류의 일반 역사로부터 완전히 단절될 순 없음을, 따라서 진리가 (자신의 가지성의 조건을 스스로 창출한다는 의미에서) ‘영원하다’고 말할 순 없음을 의미한다. 즉, 진리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맥락 바깥에서는 기능할 수 없다. 따라서 과학의 역사는 문화적 역사로부터 분리될 수도 없고, 문화적 역사로 환원될 수도 없다. 진리는 국지적인 과정이다. 진리는 분명 세계관의 한낱 증상 혹은 사회적 모순으로 환원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상징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체계─진리는 이 체계의 전화transforming에 기여한다─에 가하는 바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이는 상대주의로 향하는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상대주의 대 보편주의라는 대립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다.[47] 전체 문제는 과학적 사건들이 혁명적 위력을 유지하도록 그 사건들에 의해 야기된 세계 속으로 전이하는 것의 문제로 귀결된다.[48] 바디우가 진리는 항상 동일한 지속력persisting power(한번 진리면 영원히 진리다)을 가질 것임을 보증하고자 하는 반면, 발리바르와 르쿠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과학이 시간으로부터 달아난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하더라도,[49] 과학이 끊임없이 자신을 시간으로부터 떼어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참되다.[50] 진리는 완전히 구별되는 두 사유 체제를 갈라놓는 사건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정, 혹은 더 낫게는 하나의 활동activity이다.[51]
이는 본 논문에서 다뤄지는 문제들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데, 상징적 삶의 일상적 상황들로부터의 근본적인 단절에서 주체 개념을 도출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과학적 담론들을 어떤 일반적인 상징 논리로 환원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단절들─과학의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가 아니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체성을 기표 혹은 진리의 일의적 논리 내에서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유형의 담론들에서 작동하는 주체 형성subjectification 체제의 다양성과 각 체제 내에서 작동하는 주체 형성의 상이한 형태들에 주목해야 한다. 이제 주체성 이론은, 역사적으로 산출된 사유 형태들이 명백하고, 직관적이며, 어떤 역사적 조건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자신의 생산[과정]production을 지워버리는 기술들techniques에 대한 이론으로 이해된다. 인식론적 단절breaks은 이미 주어진 직관들의 전치displacements가 되며, 따라서 탈주체화/예속화desubjectivization와 재주체화/예속화resubjectivization의 과정이 된다.[52] 다시 말해, 알튀세르가 후기 저작에서 주장했듯이, 주체성 이론은 이데올로기 이론에 다름 아니며, 그 역 또한 참이다.[53]
그러나 그러한 이론에 대한 가장 완전한 정식화는 발리바르나 르쿠르의 저작에서가 아니라, 『분석잡지』에 (토마스 에르베르라는 필명으로) 기고했던[54] 알튀세르의 또 다른 제자, 미셸 페쇠의 작업에서 발견된다.[55] 안타깝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작업은, 구조와 주체성 간의 관계에 관한 라캉과 알튀세르의 질문들이 경험적empirical 언어 이론에서 갖는 귀결consequences을 도출하고자 했던 몇 안 되는 철학적 시도 중 하나이다. 주저 『라 팔리스의 진리들(Les Vérités de la palice)』에서 페쇠는 상징적 과정─의미 생산과 정확히 동연적인─의 효과로서의 주체에 대한 이론을 생산한다는 야심찬 기획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 이는 전혀 생산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즉 자기 자신의 원인으로 기능하는 것을 결과로서 산출하는 메커니즘에 관한 이론이다.[56]
페쇠가 우선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의미가 언어 체계 자체에 속하는 언어 기호의 내재적 속성일 수 있다는 관념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의미는 항상 언표enunciative 맥락 내 특정 위치로부터 부여된다. 화자가 취하는 위치에 따라 동일한 단어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담론의 주체로 구성되지 않는 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저서 1부는 의미에 대한 지칭주의referentialist 이론들(특히 프레게와 러셀)이 필연적으로 언표 맥락─명백히 ‘나’와 결부될 때에만 의미를 갖는 ‘이것’, ‘여기’, ‘지금’ 같은 단어들을 통해 표현되는─에의 호소를 함축한다는 점을 증명하는 데에 할애된다.
그러나 페쇠는 “나는 지금 여기서 이것을 본다”가 의미의 실제적이고 본원적인 원천인 상황을 고려하기보다는, 의미와 주체성 모두에 대한 진정으로 유물론적인 이론을 주창한다. 그는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에 호소하는데, 이에 따르면 주체는 생산될 필요가 없는 것, 즉 ‘항상-이미-거기에’ 있는 것으로서 생산된다. 알튀세르는 다음의 유명한 짧은 대화를 통해 호명 개념을 예시한 바 있다. “어이, 거기 너!” “네, 저 여기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대답에 선행하지 않으며, 오히려 호명되는addressed 자 안에서 스스로를 인지함으로써 구성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지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주체가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항상-이미 여기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는 소급적 효과를 통해 기능한다.
그런 다음 페쇠는 그러한 역설적 자기-소거 과정의 언어적 조건들을 밝히고자 한다. 이는 몇 가지 테제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언어는 동질적이지 않으며, 다수의 이질적인 담론 구성체─여기서 각 용어의 의미는 환언paraphrases과 재정식화를 통해 정의된다(예를 들어, “케플러”=“행성 궤도가 타원형임을 발견한 사람”─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언어의 통사적 메커니즘은 서로에게 속하는 용어들, 즉 사물들을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해진 것으로서 환기시키는 용어들을 하나의 동일한 담론 과정 속에 기입할 수 있게 한다. 페쇠는 이러한 삽입을 ‘선구성preconstruct 효과’라고 부른다. 따라서 발화는 담론 구성체 내에서 정의된 가능성들을 실현하는actualizing 것(즉, 선택지들의 계열적paradigmatic 집합 내에서 선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일한 통합적syntagmatic 계열 내에서 서로에게 외재적인 담론들을 절합하는articulating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말해진 것, 따라서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환기시킴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페쇠는 “행성 궤도 타원형임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든 비참하게 죽었다”와 같은 문장─프레게의 유명한 주장에 의하면, 이는 진정한 명제가 아니다─에서 관계문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프레게가 그랬던 것처럼 이 문장을 (생각이나 진릿값이 아닌)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자연 언어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명제의 환상illusion으로 치부하는 대신, 페쇠는 이 문장을 다른 곳에서 말해진 것, 즉 그 자체 구성될 필요가 없는 것에 대한 호소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동일한 용어가 담론적 과정에서 구성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동시에 ‘항상-이미’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이중화duplication는 다음과 같은 역설과 재담에서 드러난다. “여기가 웰링턴 공작이 그 유명한 말을 남긴 장소입니까? ─ 네, 여기가 그곳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혹은 “이 나라에 식인종은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가 어제 마지막 한 명을 잡아먹었거든요.” 혹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세상을 구원한 그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경우에서 동일한 용어가 같은 담론 행위 내에 두 번─지금 여기서 실제로 말해지는 것의 일부로서 한 번, 언표작용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또 한 번─나타난다. 이러한 메커니즘(과 몇몇 다른 메커니즘)으로 인해 언어적 용어들은 “이중화되고 분할되어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로서 스스로에게 작용한다”.[57]
이 메커니즘은 주체성의 생산을 지탱한다. “선구성된 것의 효과를, 개인이 주체로 호명되는 동시에 여전히 ‘항상-이미 주체’로 존재하는 그 불일치의 담론적 양태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하다”.[58]
주체는 정확히 스스로를 항상-이미 거기 있기 때문에 구성될 필요가 없는 것과 동일시하는 바로 그 방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저 여기 있습니다”라는 표현에서 나는 무언가를 말하는 동시에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서 말한다. 다시 말해, 선구성 메커니즘은 자기 자신, 곧 스스로에 뒤처져 있으며(지연lag을 요구하는 동일성), 모든 구성에 저항하는 바로 그 방식을 통해 구성되는 자기 자신─이는 앞서 언급했던 주체성의 정의 중 하나이다─과의 관계를 사유할 수 있게 한다.[59]
이 짧은 스케치로는 페쇠의 풍부한 경험적·사변적 작업을 온전히 다룰 수 없으며, 분명 많은 이의 제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다만 구조주의의 급진화radicalization─밀네르가 하이퍼구조주의라고 불렀던─가 취했던 또 하나의 경로를 지시하기에는 충분했기를 바란다. 이 경로에서 효과로서의 주체에 대한 이론은 이데올로기 이론에 의해 뒷받침되는 담론 이론 위에 정초되며, 이를 통해 실제 담론들에 대한 정밀한 경험적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영국 해협 건너편에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영향 하에 담론 이론으로 자리 잡은 것 속에서 이 경로의 발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5. 기호의 존재론: 장 프티토
그러나 ‘기표의 논리’ 관념 자체에 대한 바디우의 반론에는 또 다른 답변이 존재하는데, 이 답변은 기호의 존재론이라는 문제 설정problematic을 재활성화시킨다. 바디우의 해법은 소쉬르적 의미의 기호에는 적용될 수 없는 존재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역설paradox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집합 동일성set-identity은 그 집합의 내용에 의존하므로, 수학적 집합의 동일성이라는 정의 자체가 소쉬르적 기호와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집합 동일성은 외연적이고, 내적이다(즉,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에 무관심하다). 반면에 소쉬르의 기호는 실정적 동일성을 갖지 않는다. 하나의 기호란 [그것 아닌] 다른 기호들을 제외한 전부이며, 다른 기호들 내 운동에 의해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기에, 그 동일성은 관계적이며, 외적이다.[60] 그러므로 바디우의 해법을 하나의 주체성 이론을 위한 설득력 있는 존재론적 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기호망semiotic networks 안에 얽혀있는 행위자인 우리에게 그 해법이 어떤 의미에서 유효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 구성에 대한 이론을 필요로 하는 종류의 존재는 수학적 구조의 존재가 아니라, 언어의, 신화 체계의, 정치적 담론의 존재이다. 이러한 요구 앞에서, 수학의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의 ‘상황’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디우의 시도는 은유적인 것에 불과해 보일 수 있다.
이제 위치적이고 차이적인 존재론─이를 바탕으로 자크-알랭 밀러와 장-클로드 밀네르가 효과로서의 주체성 이론을 주장했던─은 소쉬르를 계승하는 구조주의자들의 가정, 즉 문화 현상은 그것을 차이적이고 위치적인 실체들의 체계로 취급하는 방법을 통해 가장 잘 과학적으로 객관화될 수 있다는 가정이 타당할 경우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주체성의 존재론적 도출[존재론으로부터 주체성을 도출하는 것]은 경험적 요구들claims에 의존한다. 그러나 ‘기표의 논리’ 관념이 대두된 바로 그 시기에 구조 언어학의 경험적 중핵은 생성 문법generative grammar의 성공으로 인한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다. 밀네르 자신도 생성 문법이 구조 언어학으로부터 도출된 존재론적 주장을 배제한다는 점을 명확히 간파한 이들 중 하나였다.[61] 촘스키가 소쉬르에 대한 비판에서 직접 분명히 했듯이, 생성 문법은 차이적이고 위치적인 동일성을 부여 받은 공동결정된codetermined 요소들의 집합으로서의 ‘랑그’ 개념화conception를, 타당하거나 타당하지 않은 문법성 판단을 생성하는 규칙들의 체계로서의 ‘랑그’ 개념화로 대체하는 것을 함의했으며, 철학적 문제question를 정신적인mental 것의 지위 문제로 전치시켰기 때문이다.[62] 그런 이유에서 밀네르는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으로서의 구조주의가 생성 문법에 의해 대체되었다고─후자 전자보다 더 성공적임이 입증되었다는 의미에서─본다.[63] 밀네르는 여전히 순전히 철학적인 관점에서 하이퍼구조조의의 중요성interests을 옹호하려고 하지만, 구조주의의 중요성이 정확히 그것이 표상했던represented 철학과 경험 과학 간의 절합에 있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만약 구조주의에 대한 촘스키의 반론에 답할 수 없다면, 우리가 재구성하고자 했던 바로 그 철학적 맥락은 완전히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분석잡지』 그룹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그들과 관심사를 공유했던 한 저자가 구조주의의 재활성화를 옹호하며 촘스키에 대한 반박을 시도했다. 프티토는 1985년 저서 『의미의 형태발생(Morphogenèse du sens)』에서 구조주의가 포스트구조주의적 비판과 신합리주의적 비판 이후beyond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주장을 분명하게 지지한다. “구조주의는, 구제불능의 유행 선동가들이 믿게 만들고 싶어하는 것처럼 한물간 것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개념concept에 부합하는 수학적 이념Idea을 발견하고 있다”.[64] 프티토 또한 구조주의에서 (음소와 같은) 새로운 대상이 경험 과학에 도입됨에 따라 제기되는 존재론적 도전을 본다. 더욱이 그는 밀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도전이 위치적 실체─어떤 위치를 점유한다고 할 수 없는 이 실체는 그 자신의 위치이다─통념과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흥미롭게도 프티토는 들뢰즈가 그의 유명한 논문 「구조주의를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How do we Recognize Structuralism?)」에서 이 문제를 누구보다 탁월하게 정식화했다고 평가한다. 프티토의 독창성은 첫째로 명시적으로 존재론을,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과학적 실증성에 기반하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범주적 장치의 초월론적 재구성으로 이해한다는 점에 있으며, 둘째로 그러한 존재론이 범주들의 도식화schematization─이러한 도식화 없이는 범주들을 경험 과학에 의해 산출된 실증적 현상들과 관련시킬 수 없다─를 제공할 수 있는 적합한 수학적 모델을 요구한다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프티토는 생성 문법이 제기하는 경험적 반론들에 답하지 않는 한, 구조 개념에 대한 어떠한 철학적이고 수학적인 해석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촘스키가 소쉬르에 대한 비판에서 명확히 했듯이, 논쟁은 규칙 기반 모델과 분류학적 모델 사이에서 벌어진다. 규칙 기반 모델에서 말하기란 한 모듈(규칙 체계)에서 다른 모듈로의 처리 과정을 거친 기본적인 심적 표상들에 형식 규칙들의 위계를 적용함으로써 무한한 수의 잘 짜여진well-formed 발화를 생성하는 것이다. [반면] 분류학적 모델에서 말하기는 다른 가능성들과의 대조를 통해 전체적으로globally 정의되는 어떤 가능성을 식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후자를 지지하는 두 가지 논증이 있다. 첫째, 생성주의generativism는 언어학에 구조적 방법을 처음 도입하게 만든 문제, 즉 우리가 실제로 지각하는 언어의 자기동일적 단위와 우리가 관찰하는 물리적 또는 음성적 신호signals 간의 관계 문제에 답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원어민 화자가 해당 음소를 지각하는 모든 경우occurrences,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서만 구현되는instantiated 실정적 음성 자질들의 집합을 통해 음소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과학적 사실이다. 신호들은 연속적이고 산재된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음소들은 불연속적이고 불변하는 단위들로 지각된다. 소쉬르가 음소는 (음성적 속성과 같은) 어떤 실정적 자질에 의해 정의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추상적 체계 내에서 상호 규정되는 순전히 위치적인 실체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가설을 세운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촘스키에 대한 두 번째 반론은, 다양한 모듈들(그리고 각 모듈 내부의 규칙들)이 단순한 순서sequential order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생성 문법이 성장할수록 점점 더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생성 문법을 완전한 재구성[65]을 요구하는 위기로 몰아넣었던─과 관련된다. 예컨대, 어떤 통사 규칙을 적용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일부 의미semantic 정보가 필요할 수 있다. 심적 표상들이 순차적으로 연결된 모듈(또는 규칙 체계)을 통해 일련의 다시 쓰기를 거치는 것과 달리, 우리는 하나의single 언어적 가능성을 식별하기 위해 다차원적 반응 체계를 필요로 할 것이다.[66] 결과적으로 분류학적 모델에 대한 촘스키의 반론은 그 자신이 확립한 학문 분야의 발전에 의해 반박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가 초기에 언어학에서 의미를 배제한 것과 더불어 언어학적 대상의 본질nature로서의 기호를 배제한 것 또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67]
이로써 프티토는 구조주의의 이론적·철학적 프로그램을 하나의 열린 연구 프로젝트로 재정식화할 수 있게 된다.[68] 구조주의는 위치적 실체 개념을 철학적으로 그리고 수학적으로 해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연속적이고 가변적인 기층substrata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실체에서 독립적인substance-independent 위치 체계로의 이행 또한 설명해내야 한다. 프티토의 주장은 르네 톰의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이론에서 구조주의가 필요로 하는 수학적 형식화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면의 한계상 그의 논증에 대한 암시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데에 그칠 수밖에 없다. 프티토의 주장은 음성적 공간의 음운론적 범주화와 물에서 얼음으로의 이행─정확한 온도에서 일어나며, 카타스트로피 이론의 모델이 되는─같은 물질적 상들phases 간의 물리적 전이 현상 사이에 성립하는 엄밀한 유비에 기대어 있다. 매개변수(온도)는 연속적이지만 형태론적 효과는 불연속적인(액체에서 고체로) 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음소(그리고 기호학적 실체)는 연속적인 음성 기층 위의 불연속적인discrete 형태론적 ‘카타스트로피’이다.[옮긴이: 맥락상 원문의 discreet는 discrete의 오타인 것으로 보인다.] 전이 상들은 기층에 특정 유형의 역학dynamics─혼돈 상태chaotic가 되지 않으면서도 평형 상태와 거리가 먼 이 특정 유형의 역학은 소수의 형태들에서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며, 카타스트로피 이론은 이러한 형태들을 정밀하게 이론화한다─을 부여함으로써 기하학화될 수 있다. 음운론적 체계는 음성적 기층의 역학에 토대를 둔 형태발생적 과정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카타스트로피 도식은 실체substance에서 형태form으로의 이행을 포착할 뿐만 아니라, 밀러가 구조의 작용action이라고 부른 것을 정식화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도식들은 “행위소 관계의 발생 장치generative devices가 되기” 때문이다.[69] 행위소 관계에서 항들은 양자택일 범주(이 음성 신호는 /p/이거나 /b/이다)로서가 아니라, (“/p/ 다음에는 /b/가 올 수 없다”와 같은 관계로 표현되는)기능적 연결로서 서로 관계 맺는다. 밀러가 상징적 ‘연쇄’ 속에서의 실현actualization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잠재적’ 체계를 해석하고자 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프티토는 불연속적인discrete 범주들의 체계(구조주의자들이 ‘계열체paradigms’라 부른 것)가 기층substratum으로부터 창발하는emerge 이유뿐만 아니라, 이 범주들이 실현하는 계열적 순서(소쉬르가 ‘통합체syntagms’라 부른 것)까지도 카타스트로피의 정식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계열적 단위들이 실현되는 통합적 연쇄를 그 단위들의 본성 자체로부터 연역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프티토는 형식적 통사론과 의미론적 해석의 분리를 거부하면서, A. J. 그레마스의 행위소 모델에 의거하여 자신이 ‘전환conversion’이라 부르는 것, 즉 계열적 체계의 통합적 연쇄로의 투사를 설명한다. 이러한 투사는 상징 체계에 내재하는intrinsically 담론적 본성을 보여준다. 마치 전통적 구조주의의 기반인 양자택일적 동일성으로 실재를 분할할 때, 필연적으로 서사적 양식formats이 촉발되는 것처럼 말이다.[70] 흥미롭게도 주체는 더 이상 체계에 속하되 오직 자신의 부재를 통해서만 그러한 역설적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주체는 상징적 항들의 계열적 연속 내에서 상이한 위치들에 대응하는 행위소이다. 존재론적 역설은 이제 주체의 편이 아니라 가치values─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이는 상징 체계의 실제 작동actual working 속에서 교환되고 순환되어야만 하는 대상들이다─의 편에 있다. 주체성이란 상징적 대상은 결코 실제 사물로서 현전하지present 않는다는 사실의 효과이다. 다시 말해, 상징적 대상들은 항상 부분적이고 상보적인 관점들로 분할되어 있다.[71]
이로써 구조주의의 두 가지 주요 문제─(음성적 기층 같은) ‘실체substances’로부터 ‘형태form’(상호규정적인 위치적 실체들의 체계)으로의 이행, 그리고 계열적 체계로부터 주체subjective 위치를 정의하는 통합적 계열로의 이행─가 동시에 해명된다. 이러한 움직임 이후, 이제 우리가 하이퍼구조주의 프로그램에 대한 밀네르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매우 근접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해법이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중대한 전치를 요구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상징 체계는 이제 창발하는emerging 형식으로 드러나며, 이 형식들의 기저에 있는 실재적 과정들은 형식들이 작동하는 것과 동일한 수준level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과정들은 기층의 특수한specific 역학 내에 있고, 형태론적 기호 분포는 마치 카니자 삼각형이 세 개의 불완전한 원판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처럼 기층으로부터 창발할 뿐이다. 그렇다면 기호의 존재론은 창발론적 관점에서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여러 차례 제안한 바를 따르는 동시에 고전적 튜링 머신 이외의 인지 시뮬레이션 모델들(가령, 연결주의connectionist 모델[72])에 의거하는 프티토의 후기 작업은, 뇌의 본성에서 그러한 메커니즘의 생리학적 실현realization을 발견하고자 한다. 물론 주류 인지주의와 강한 연계를 맺고 있는 이 독특한 형태의 ‘하이퍼구조주의’가 앞서 논의한 다른 형태들보다 반론으로부터 더 안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논의는 구조 개념의 형식적 해석construal과 존재론적 해석 간의 절합에 대해, 그리고 효과로서의 주체성 이론에 대해 사십 년 전에 제기된 물음들이 가장 동시대적인 과학적·철학적 논쟁들에서 여전히 유의미함을 증명한다.
따라서 구조 개념에 대한 개념적이고 형식적인(즉, 존재론적이고 수학적인) 해석─모든 상징적 영역에 유효한 동시에 주체성 자체를 필연적 효과로서 설명할 수 있는─의 문제가, 구조주의 이후(그리고 구조주의에 반하여) 이론적·철학적 사유가 취했던 두 가지 주요 대립 방향인 인지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넘어 세기말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프랑스철학을 관통해왔다고 생각할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이 글의 포부는 동시대 프랑스철학 내 ‘현 순간present moment’을, 어떤 실정적인 공통 특징이나 집합적 통찰을 통해 정의하기보다는 수많은 대안적 경로들─몇몇 가장 중요한 동시대 철학자들이 추구해 온─을 생산하는 하나의 문제problem로(진정으로 구조주의적이라고 할 만한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구조 이론을 통해 표현된articulated 주체성 이론의 물음에 대한 네 가지 답변이 구분되었다. ‘기표의 논리’는 위치적이고 차이적인 실체의 체계에 필연적으로 속하는 역설적 항으로서의 주체 효과를 연역하고자 한다(밀러와 밀네르). 또 다른 경로는 상징적인 것의 특수성specificity을 거부하고, 진리─구성 불가능한unconstructible 집합의 창조로서의─의 여지를 남겨두는 집합론적 존재론에 주체성 이론을 정초한다(바디우). 세 번째 선택지는 이데올로기 이론과 담론─주체를 생산될 필요가 없는 것으로서 생산하는 메커니즘들의 집합으로 해석된─이론을 결합하고자 한다(발리바르, 르쿠르, 페쇠). 네 번째 제안은 구조주의에 대한 형태역학적 해석을 주장하는데, 이에 따르면 상징 체계는 특정 유형의 역학적 과정으로부터 창발하며, 상징적 교환 속에서 상보적 관점들을 분배한다(프티토). 이렇게 구조 개념을 해석하는 네 가지 길이 그려지며(기표, 수학소matheme, 담론, 형태론morphologies), (비유적figurative 전치로서의, 결과에 따르는consequent 내기로서의, 선구성된 항으로서의, 행위소로서의) 네 가지 주체 개념이 이에 상응한다. 이제 이 도표 안에 밀러의 제자였던 슬라보예 지젝, 영국 담론 분석 학파의 창시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포스트알튀세르주의적 주체성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한 다른 중요한 동시대 사상가들을 배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73] 따라서 우리는 구조주의가 문화 과학이나 철학의 발전에 의해 시대에 뒤처지기는커녕, 적어도 하나의 문제 설정적 공간으로서 여전히 동시대 철학의 주요하고도 비밀스러운 매트릭스로 남아있다고 생각할 강력한 근거를 갖는다. 물론 답변들은 전유되거나 보강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발견되어야 한다. 다만 그러한 발견은 우리에게 적어도 그 역사를 망각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74]

[1]: 1966년에 푸코의 『말과 사물』과 라캉의 『에크리』가 출간되었으며, 둘 다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다. ↩
[2]: Étienne Balibar, “Structuralism: A Destitution of the Subject,” Digerences: A Journal of Feminist Cultural Studies 14(1) (Spring 2003) 참조.[국역본으로는 에티엔 발리바르, 「구조주의, 주체의 파면?」, 『개념의 정념들』, 배세진 옮김, 후마니타스, 2025.] ↩
[3]: 해당 저널은 1966년과 1969년 사이에 총 10권 발행되었다. 미들섹스 대학교Middlesex University의 AHRC 지원 프로젝트인 “개념과 형식: 『분석잡지』와 현대 프랑스 사상” 덕분에 현재 온라인에서 모든 호를 열람할 수 있다(www.web.mdx.ac.uk/crmep/cahiers, 2010년 8월 접속). 텍스트들의 영어 번역본을 제공해준 피터 홀워드, 레이 브래시어, 크리스천 커슬레이크에게 감사를 전한다. ↩
[4]: 레비스트로스의 문화 정의는 다음을 보라. “문화는 상징적 체계들의 총체로서 그 중심에는 언어, 혼인, 규칙, 경제 관계, 예술, 과학, 종교가 자리한다”.(Introduction to the Work of Marcel Mauss, Felicity Baker [tran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87], 16).[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 박정호·박세진 옮김, 파이돈, 2023, 27~28쪽에서 인용.] ↩
[5]: 『대륙철학의 역사(The History of Continental Philosophy)』 제5권에 실린 에드 플루스Ed Pluth의 논문은 라캉에 초점을 두고 있다. ↩
[6]: Jacques Lacan, Écrits (Paris: Éditions du Seuil, 1966), 856; published in English as Écrits: The First Complete Edition in English, Bruce Fink (trans.) (New York: Norton, 2006), 727. ↩
[7]: Lacan, Écrits, 861; Écrits: The First Complete Edition in English, 731. ↩
[8]: 라캉의 주체성 이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Bruce Fink, The Lacanian Subject: Between Language and Jouissanc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참조. ↩
[9]: “나는 자아이지 이드가 아니다. 나는 나의 의식적이지 않은 정신psyche에 대해서는 어떤 특권적 지위도 갖고 있지 않다. ... 나는 나의 ‘이드’에 대해 타자Other의 위치에 있다”. (Jean-Paul Sartre, L’Être et le néant: Essai d’ontologie phénoménologique [Paris: Gallimard, 1943], 50–51; published in English as Being and Nothingness: An Essay on Phenomenological Ontology, Hazel E. Barnes [trans.] [London: Routledge, 1956], 90). ↩
[10]: Lacan, Écrits, 517; Écrits: The First Complete Edition in English, 430. ↩
[11]: 소쉬르의 언어 이론에 대한 논의로는 『대륙철학의 역사(The History of Continental Philosophy)』 제5권에 실린 토마스 브로든의 글을 보라. ↩
[12]: 폴 리쾨르가 규정한 바. “Structure and Hermeneutics,” in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 Essays on Hermeneutics, Don Ihde (trans.) (Evanston, I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4), 52. ↩
[13]: Jacques-Alain Miller, 「구조의 작용(Action de la structure)」, in Un début dans la vie (Paris: Gallimard, 2002), 61. 이 글은 1964년 9월에 작성되었으며, 장-클로드 밀네르Jean-Claude Milner와 이브 뒤루Yves Duroux 또한 이 글에 서명하였다. (그 관심사가 ‘담론 이론’으로 정의되는) 하나의 ‘카르텔’을 소개하고, 라캉의 새로운 학파에 합류하기 위해 작성된 이 글은 4년 후 『분석잡지』 제 9권에 게재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Miller, Un début dans la vie, 57을 보라. ↩
[14]: Lévi-Strauss, Introduction to the Work of Marcel Mauss, 33. ↩
[15]: Ricoeur, “Structure, Word, Event,” in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s, 79–97 참조. ↩
[16]: 밀네르는 『분석잡지』의 창립 멤버이자 「구조의 작용」의 공저자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언어학으로 전향하여 프랑스 언어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를 발전시켰는데, 이 작업은 노엄 촘스키의 영향 아래 구조주의에 대한 독창적인 비판을 제시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생성 문법에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Milner, Introduction à une science du langage [Paris: Éditions du Seuil, 1989] 참조). 라캉에게서도 영향을 받은 밀네르는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의 대결을 다루는 데에 작업의 상당 부분을 바쳤으며(그의 저작 L’Amour de la langue [Paris: Éditions du Seuil, 1978]를 보라. 영역본은 For the Love of Language, Ann Banfield [trans.] [Basingstoke: Macmillan, 1990]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구조적 대항해(Le Périple structural)』를 통해 역사적·개념적 토대 위에서 구조주의의 역사를 재검토하게 된다. ↩
[17]: Milner, Le Périple structural, 144. 밀네르가 ‘대상의 최소주의minimalisme de l’objet’라 부르는 것 또한 참조. “하나의 언어 체계를 알기 위해서는 그 체계 내에서 그것을 체계로 구성하는 최소한의 속성만을, 즉 최소한의 요소로 분석될 수 있는 속성만을 고찰하도록 스스로를 제약하는 수밖에 없다”(L’Œuvre claire, 97). ↩
[18]: 소쉬르에 대한 밀네르의 다음 구절을 보라. “확장하여 볼 때, 이 프로그램은 어떤 종류의 실재reality에도 적용될 수 있는데, 모든 실재는 오직 그 체계적 관계들의 관점에서만 고찰될 수 있다는 것(강한 구조주의적 가정)이 인정될 경우 그러하다. 극단으로 밀어붙여진 이 프로그램은 새로운 유형의 존재론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결국 정신분석학에서 철학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Le Périple structural, 38). 자세한 논의는 나의 글 La Vie énigmatique des signes: Saussure et la naissance du structuralisme (Paris: Léo Scheer, 2006)을 참조. ↩
[19]: 푸코는 특히 The Discourse on Language에서 이러한 구조주의적 주제에 강력한 표현을 부여하게 된다. ↩
[20]: “개념에 대해 작업한다는 것은 그것의 외연과 내포를 변이시키는 것, 예외적 특성들을 통합시킴으로써 그것을 일반화하는 것, 그것을 본래의 영역 바깥으로 수출하는 것, 그것을 하나의 모델로 삼거나 반대로 그것에 맞는 모델을 찾는 것, 요컨대 규제된 변형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형식form의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다”(Georges Canguilhem, “Dialectique et philosophie du non chez Gaston Bachelard,” in Etudes d’histoire et de philosophie des sciences [Paris: Vrin, 1970], 206). ↩
[21]: Gaston Bachelard, Le Rationalisme appliqué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49), 200–201. ↩
[22]: 『대륙철학의 역사(The History of Continental Philosophy)』 제6권에 실린 워런 몬탁Warren Montag의 논문은 알튀세르에 초점을 두고 있다. ↩
[23]: 「봉합」은 「구조의 작용」보다 나중에 쓰였음에도 보다 먼저 출간되었는데, 이는 「구조의 작용」이 1965년 2월 24일에 열린 라캉 세미나에서 처음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
[24]: Jacques-Alain Miller, “Suture (Elements of the Logic of the Signifier),” Jacqueline Rose (trans.), Screen 18 (Winter 1978), 32. ↩
[25]: Lacan, Écrits, 858; Écrits: The First Complete Edition in English, 729 참조. ↩
[26]: 소쉬르에 대한 밀러의 재구성이 흔적에 대한 데리다의 설명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데리다의 흔적 개념이 후설과 하이데거에 대한 참조와 함께 시간 통념을 함축하는 반면, 밀러의 설명에는 그러한 시간 통념이 부재한다는 점을 짚어두고자 한다. ↩
[27]: Milner, Le Périple structural, 160–65 참조. ↩
[29]: 알랭 바디우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대륙철학의 역사(The History of Continental Philosophy)』 제8권에 실린 브루노 보스틸스Bruno Bosteels의 글을 참조. ↩
[30]: “La relation … de dénotation … dissimule l’essence strictement fonctionnelle des renvois intérieurs au mécanisme logique” (Alain Badiou, “Marque et manque: À propos du zéro,” Cahiers pour l’analyse 10 [1969], 156). ↩
[31]: “따라서 봉합은 기표 일반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주체를 가로막는 의미화signifying 질서에 고유한 속성이다. 이름하여,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의 주체는 항상 존재하며, 바로 이것이 이데올로기를 인지할 수 있게 하는 표지이다.”(Ibid., 162). ↩
[32]: “나는 막상 알지는 못했지만 논리적·수학적 진술의 필연성은 그것이 의미의 모든 효과를 완전히 제거해버리는 데서 유래하는 만큼 형식적이며, 어쨌든 그러한 진술들 자체의 정합성 외부에서 그러한 진술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탐구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논리주의적 명제에 사로잡혀 있었다.”(Alain Badiou, Being and Event, Oliver Feltham [trans.] [London: Continuum, 2005], 5).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29쪽. ↩
[34]: “하지만 과정-주체를 존재에 대해 발언 가능한 또는 발언된 것과 양립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로, 나는 그것을 1964년에 밀레가 라캉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제기한 질문 속에서 지적한 바 있다. “당신의 존재론은 무엇인가?”가 그것이다. 우리의 약삭빠른 스승은 비존재에 대한 암시로 대답했다. 그것은 적절한 대답이기는 하지만 너무 간략했다”(ibid., 4). 『존재와 사건』, 28쪽. ↩
[35]: “이것이 구조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규정이다. 즉 현시된 다수에게 일자로-셈하기의 체제를 규정하는 것이 그것이다”(ibid., 24). 『존재와 사건』, 57쪽. ↩
[36]: 바디우의 주체성 이론에 대한 보다 상세하고 탁월한 분석으로는 Peter Hallward, Badiou: A Subject to Truth(Minneapolis, M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3)을 보라. 밀러의 ‘기표의 논리’에 대한 바디우 초기의 논쟁 및 보다 일반적으로 여기서 논의되는 철학적 맥락 전반에 대한 훌륭한 설명으로는 Bruno Bosteels, “Alain Badiou’s Theory of the Subject: Part I. The Recommencement of Dialectical Materialism,” Pli 12 (2001)을 보라. ↩
[37]: 바디우가 특수한 ‘논리’ 혹은 존재론이라는 관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시기moment는 『주체 이론(Théorie du Sujet)』이다. 그러나 바디우는 『존재와 사건』의 서문에서 이러한 시도를 자연의 변증법을 향한 무의미한 추구로 부인하게 된다. (L’Être et l’événement [Paris: Éditions du Seuil, 1988], 10을 보라). 하지만 그의 마지막 주저인 『세계의 논리(Logics of Worlds)』의 핵심에 자리 잡은 ‘대논리great logic’ 관념 자체가 여기서 소묘된 그림을 미묘하게 만들고, 특수하게 기호론적인 존재론의 유산에 대한 바디우의 입장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Patrice Maniglier and David Rabouin, “A quoi bon l’ontologie? Les Mondes selon Badiou,” Critique 719 [April 2007] 참조). ↩
[38]: 『존재와 사건』의 제15 성찰은 헤겔이 ‘생성적generative 존재론’, 즉 다수로부터 일자를 출현시키려 하는 존재론을 제시한다고 비판한다. ↩
[39]: Badiou, Being and Event, 474. ↩
[40]: 이러한 전통에 대한 논의로는 『대륙철학의 역사(The History of Continental Philosophy)』 제4권에 실린 Pierre Cassou-Noguès의 글을 보라. ↩
[41]: 이러한 관념은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The Archaeology of Knowledge)』에서 충분히 명료화한 초원론적 철학의 역사화 프로그램으로 이어지게 된다. 푸코에 관해서는 Béatrice Han, Foucault’s Critical Project: Between the Transcendental and the Historical, Edward Pile (trans.)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2)를 보라. 그리고 프랑스 인식론적 전통을 특징 짓는 진리와 역사 간의 이 독특한 연결에 관해서는 Enrico Castelli Gattinara, Les Inquiétudes de la raison: Épistémologie et histoire en France dans l’entre- deux-guerres (Paris: Vrin, 1998)을 보라. ↩
[42]: Dominique Lecourt, Lyssenko: Histoire réelle d’une “science prolétarienne” (Paris: François Maspéro, 1976), Prométhée, Faust, Frankenstein: Fondements imaginaires de l’éthique (Le Plessis-Robinson: Institut Synthélabo, 1996), and Déclarer la philosophi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7) 참조. ↩
[43]: Dominique Lecourt, Marxism and Epistemology: Bachelard, Canguilhem and Foucault, Ben Brewster (trans.) (London: New Left Books, 1975), 141. [국역본으로는, 도미니크 르쿠르, 『맑스주의와 인식론』, 박기순 옮김, 중원문화, 2003.] ↩
[44]: 발리바르의 정치철학 작업은 이번 권 중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사이먼 더피의 글과 『대륙철학의 역사』 제8권에 실린 로지 브라이도티의 글에서 논의된다. ↩
[45]: Georges Canguilhem, “Qu’est-ce qu’une idéologie scientifique?,” in Idéologie et rationalité dans l’histoire des sciences de la vie (Paris: Vrin, 1977). ↩
[46]: Étienne Balibar,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La Tour-d’Aigues: Édition de l’Aube, 1994), 146. ↩
[47]: “심지어 과학적 지식은 ‘절대적’이지도 않고 ‘상대적’이지도 않은 것으로서 진리 효과를 생산하는 한에서만 사유 가능하다는 점이 단절의 일반적 정의를 구성한다고 부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으리라”.(ibid., 158쪽, 나의 번역). ↩
[48]: 상대성 개념과 같은 과학적 개념의 특징은 그것이 “무한히 서로 뒤따르는 모순되는 연구 프로그램들 속에서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ibid., 155, 나의 번역). ↩
[49]: “과학은 ‘통상적general 시간’(세계의 시간, 인류의 시간, 보편 역사의 시간, 그 안에서 과학과 역사가 서로 거울인 것마냥 진보 혹은 상대적 진리라는 관념이 정반대로 과학을 뒤로 잡아당기는 그러한 시간)으로부터 벗어난다”(ibid., 161, 나의 번역). ↩
[50]: “[L]a science ne cesse jamais de s’en extraire” (ibid.). ↩
[51]: 바디우의 최근 저작 『세계의 논리』는 이 비판에 대해 강력한 답변을 제시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저작은 진리의 영원성을, 그것이 발생하는 세계로부터 그것이 야기하도록 기여하는 다른 어떤 세계로 운반될 수 있는 역량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중심으로 바디우를 다룬 논의로는 Maniglier and Rabouin, “A quoi bon l’ontologie?”를 보라. ↩
[52]: “모든 과학은 그 자체로 순수한 ‘대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주체의 형식적 규정들에 속하는 어떤 것에 대한 과학이다”.(Balibar,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130, 나의 번역). ↩
[53]: “주체에 의하지 않고 주체들과 관련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는 없다”.(Louis Althusser, “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in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Ben Brewster [trans.] [London: New Left Books, 1971], 170). ↩
[54]: Thomas Herbert, “Réflexions sur la situation théorique des sciences sociales et, spécialement, de la psychologie sociale,” Cahiers pour l’analyse 2 (February 1966), 그리고 “Pour une théorie générale des idéologies,” Cahiers pour l’analyse 9 (Summer 1968)을 보라. ↩
[55]: 미셸 페쇠(1938-83)는 알튀세르의 노선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 이론에 기여하고자 했으며, 매우 일찍이 실제 담론 기계들machines, 즉 컴퓨터가 담론 분석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상상했다.(Michel Pêcheux, Analyse automatique du discours [Paris: Dunod, 1969]). 그의 독창성은 마르크스주의적 이데올로기 이론과 컴퓨터 시뮬레이션 담론 이론을 결합시켰다는 데에 있다. ↩
[56]: “이는 라캉적 의미에서 기표의 그물망에 의해 구성된 비-주체 내부에서 (재현의) 과정으로서의 주체를 다룬다. 주체는 이 그물망─‘보통명사’와 ‘고유명사’, ‘전환shifting’ 효과, 통사적 구문 등─에 ‘사로잡혀’ 있으며,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자기 원인’으로 귀결된다.” (Michel Pêcheux, Language, Semantics and Ideology, Harbans Nagpal [trans.] [Basingstoke: Macmillan, 1982], 108, my translation). ↩
[59]: 주체성의 역설은 아이들이 “나는 마이크, 헨리,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의 형제가 있어”라고 말하는 식으로 흔히 저지르는 전형적인 실수에서 드러난다. 라캉은 이 예시를 즐겨 인용했는데, 이는 주체가 자신에 대해 말해지는 것 속에서 스스로를 복제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
[60]: “발생한 변화는... 만약 우리가 그 형태 자체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려 한다면,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 변화의 유일한 원천은 비교 가능한 형태들 내에 있으며... 형태론morphology에서 늘 그렇듯이, 운동movement은 가장자리에서 비롯된다”(Ferdinand de Saussure, Writings in General Linguistics, Carol Sanders and Matthew Pires [tran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129). 이 관념을 다룬 보다 세부적인 논평에 대해서는 나의 글 「La Vie énigmatique des signes」 180–85 참조. ↩
[61]: “그들은 부정적인 형식form뿐만 아니라 실정적인 질료matter에 의해 언어학적 대상의 정의로 되돌아간다.” (Milner, Le Périple structural, 39); 그리고 Milner, L’Amour de la langue, 61–5; For the Love of Language, 89–92 참조. ↩
[62]: Noam Chomsky, Current Issues in Linguistic Theory (The Hague: Mouton, 1964), 11–23 참조. 분류 모델과 변형 모델 간 대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의 글 La Vie énigmatique des signes, 131–212 참조. ↩
[63]: Milner, Introduction à une science du langage 참조. ↩
[64]: Jean Petitot, Morphogenesis of Meaning (Berne: Peter Lang, 2003), 19. ↩
[65]: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은 규칙 기반 모델로부터 ‘매개 변인’이라 불리는 접근으로의 이행으로 알려져 있다. Noam Chomsky, Some Concepts and Consequences of the Theory of Government and Binding (Cambridge, MA: MIT Press, 1982)를 보라. ↩
[66]: Ronald W. Langacker, Foundations of Cognitive Grammar, Vol. I: Theoretical Prerequisites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7)을 보라. 그리고 이에 대한 엄밀한 논증으로는 Bernard Laks, Langage et cognition: L’Approche connexionniste (Paris: Hermès, 1996) 참조. ↩
[67]: “우리는 도구 혹은 연장으로서의 언어를 연구하고 있으며, 이 도구가 사용되는 방식에 대한 명확한 참조 없이 그 구조를 기술하고자 한다”(Noam Chomsky, Syntactic Structures [New York: de Gruyter, 2002], 103). ↩
[68]: 프티토의 구조주의 독해에 대한 보다 입문적인 소개로는 Jean Petitot, “Structure,” in Encyclopedic Dictionary of Semiotics, Vol. 2, Thomas A. Sebeok (ed.) (New York: de Gruyter, 1986) 참조. ↩
[69]: Petitot, Morphogenesis of Meaning, 193. ↩
[70]: “심층 의미론이 분절/절합하는 내용들(삶/죽음, 자연/문화, 남성/여성, 신/인간 등)은 객관적 세계 내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 그 내용들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종의 심리적 충동들 혹은 이상들이며, 이 의미는 그 자체로 포착될 수 없고 오직 행위소 구조로의 전환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ibid., 49). 또한 ibid., 193–248을 보라. ↩
[71]: “오직 그러한 가치를 지닌 대상들의 순환만이 그것들의 주체성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대상들은 오직 경험과 행위들을 통해서만 주체의 일부가 될 수 있다(ibid., 49). 현대 인류학(Marilyn Strathern, Eduardo Viveiros de Castro, Roy Wagner)은 이러한 가설과 새로운renewed 형태의 구조주의를 위한 견고한 경험적 토대를 제공한다.(see Eduardo Viveiros de Castro, “Intensive Filiation and Demonic Alliance,” in Deleuzian Intersections in Science, Technology, and Anthropology, Casper Bruun Jensen and Kjetil Rödje [eds] [Oxford: Berghan Books, 2009]). ↩
[72]: Jean Petitot, “Why Connectionism is such a Good Thing: A Criticism of Fodor’s and Pylyshyn’s Criticism of Smolensky,” Philosophica 47(1) (1991) 참조. ↩
[73]: 지젝, 라클라우, 버틀러의 작업 모두 『대륙철학의 역사』 제8권에 수록된 논문들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
[74]: 영어 텍스트를 훌륭하게 편집해 준 팀 시크릿에게, 유익한 논평을 너그러운 편집 작업을 제공해 준 앨런 슈리프트에게, 이 문헌들을 소개해 주고 몇몇 쟁점들에 대해 함께 논의해준 이브 뒤루에게, 이 작업의 기원에 있는 에티엔 발리바르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작업을 내게 요청해주고 또 완성을 기다리며 인내해준 로지 브라이도티에게 감사를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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