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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Translation/In Moving Translation

마니글리에, 사물의 질서

by 인-무브 2026. 6. 23.

사물의 질서

 

파트리스 마니글리에(Patrice Maniglier) 지음

 

함은호(연세대학교 비교문학 석사) 옮김

배세진(정치철학자) 감수

 

 

아무런 예비 지식 없이 《사물의 질서(The Order of Things)》(OT)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이 텍스트의 제목과 ‘인간 과학human sciences의 고고학’이라는 부제 사이의 관계에 의아함을 느낄 수 있다.[1] 인간 존재자human beings라는 우리 자신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기획과 사물이 질서지어지는 방식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소박한 물음에 답할 수 있다면, 이미 《사물의 질서》의 핵심적인 의도를 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우선 다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고학이라는 단어는 통상 불가피하고, 실체적이며, 의문의 여지가 없고,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 여겨지는 무언가가 실은 매우 명확한 역사적 가능 조건들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에 연대를 부여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처음 믿어졌던 것보다 더 우연적인contingent 것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가령, 푸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Man’(즉 [대문자] 인간적인 것the Human)이란 (인간 과학에서 결국 그렇게 했듯이) 과학적 앎knowledge이 자신을 대상으로 삼기를, 그리고 (다양한 판본의 ‘인간주의humanism’에서 그렇게 했듯이) 철학적 사변이 자신을 가치의 원천으로 삼기를 영원토록 기다려 온 어떤 사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에서 경험적 앎의 실천에 영향을 미친 구체적precise 변형들의 귀결로 출현한 하나의 특수한particular 관심사라는 것이다[옮긴이: Man과 human 모두 ‘인간’으로 옮길 수 있으나, 양자를 구별하기 위해 Man을 따옴표 친 ‘인간’으로 옮겼다. 또한 Order, Representation 등 대문자로 표기된 개념어에는 원어를 병기하였다. 다만 하이데거를 암시하는 Being이나 Time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대문자] 존재’, ‘[대문자] 시간’으로 옮겼다]. 달리 말해, 인간 존재자들이 항상 자기 자신의 본성에 관한 과학적 담론을 생산하는 데에 골몰해왔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인간이 관심과 흥미의 대상─적어도 일부 인간 존재자들에게─이 된 것은 18세기 말 이후 [비교적] 최근의 일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고고학의 목표는 결코 순전히 사변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덧붙여야겠다. 고고학은 또한 (‘인간’, 광기Madness, 감옥Prison 등) 유사-영원적eternal 개념들의 토대를 허무는 시도인데, 이 시도는 그러한 개념들이 항상 불가피한 소여로 간주되어온 것은 아님을 입증함으로써, 그 개념들 역시 다른 무언가에 자리를 내줄 수 있다는 것─태어난 것은 죽을 수 있다─을 보여준다. 사변적인 것을 넘어서는 고고학의 이러한 특징은 《사물의 질서》 자체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 저작은 철학의 필연적 토대로서의, 그리고 과학적 앎의 정당한 대상으로서의 ‘인간’ 개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이 저작은 칸트적 딜레마─푸코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철학을 조직해 온─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철학에 정위해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에 관한 우리의 물음은 다음과 같이 재정식화될 수 있다. 과학적 관심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출현은 ‘사물의 질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푸코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가설은, 우리가 ‘인간 과학’[2]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자기 인식self-knowledge은 우리가 사물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방식이 전위되고 재구성된 결과라는 것이다. 《사물의 질서》에서 푸코는 ‘인간’─과학과 철학의 연구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탄생과 임박한 죽음에 대해 기술한다. 그는 세 가지 주요 시기인 르네상스, 고전주의 시대, 근대에 초점을 맞춰 사물을 질서지우는 일련의 상이한 방식들의 역사를 서술하고, 아울러 오늘날 우리가 ‘포스트모던’ 시기moment라 부를 만한 것에 대해 몇 가지 암시를 제공함으로써 이를 수행한다. 푸코는 이 마지막 시기를, 이 책이 출간되었던 1966년 당시 프랑스에서 절정에 달해 있던 구조주의 운동과 동일시한다. 따라서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주장했던 것처럼 [대문자] 존재에 대한 우리의 개념화가 인간적 조건에 상대적이라는 주장은 푸코에게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옮긴이: 주지하다시피,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표현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전도시킨 칸트의 이론화를 암시한다. 칸트는 물자체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주체 관념을 비판하면서, 주체를 인식의 중심으로 옮겨놓았다.]. 오히려 푸코의 요점은 정반대로 바로 이 ‘인간’이라는 통념 자체가 [대문자] 존재의 역사 내 특정 변형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을 정식화하는 것만으로 일련의 물음들 전체가 개방된다. 첫째, ‘인간’이 18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게 사실인가? 그것은 항상 철학적, 나아가 과학적 주제theme이지 않았던가? 둘째, 실제로 ‘인간’이 최근에야 이론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면, 이 과정에 대한 푸코의 묘사와 설명은 정확한가? 셋째, 왜 ‘인간’ 개념을 극복해야 하는가? 도대체 그것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 ‘인간학적anthropological’ 패러다임에 대한 푸코의 비판은 정말 설득력이 있는가? 넷째, 구조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이 패러다임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여겨졌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물의 질서》에서 푸코 자신은, 그가 그 우연성과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던 바로 그 인간학적 틀 속으로 다시 빠져드는 것을 피하는 데 성공했는가? 이어지는 [본론의] 논의에서는, 푸코가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그것이 사물의 질서화의 역사와 맺는 관계 속에서─이야기하는 방식을 부각시키면서, 이 물음들 중 일부에 답하고자 한다. 끝으로는 이 책에 제기된 몇 가지 반론들에 응답할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과학적 대상이자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인간’이 18세기 말 이후에야 비로소 존재해 왔다는 관념은 언뜻 매우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18세기 말 이전에 이미] 데카르트가 『인간론(Treatise of Man)』을 쓰지 않았던가? 로크와 흄이 ‘인간 지성human understanding’에 관해 쓰지 않았던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려는 시도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모든 문명과 모든 시대에 걸친 관심사이지 않은가?

 

물론 여기서 ‘인간’이라는 단어는 다의적equivocal이다. 푸코에게 있어서, ‘인간’은 특정 사물을 가리키지 않으며, 오히려 특정 질문question을 가리킨다. ‘인간’이 과학이라는 관념 자체에 제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 말이다─이 문제의 출현이야말로 우리가 그 연대를 특정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을 과학적 앎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 어떤 내재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단지 우리 인간이 [과학의 대상이면서] 또한 과학의 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을 다른 과학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취급하는 발상idea이 지나치게 환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 과학에 대한 철학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옮긴이: 인간 과학이 인간을 ‘과학적 대상’으로 간주함에 따라, 인간에게 고유한 차원─가령, 체험Erlebnis의 차원─을 놓치게 된다는 ‘철학적’ 비판에 대해서는 딜타이의 입장을 참고할 수 있다. ‘정신 과학’을 독자적인 방법론으로 세우고자 했던 딜타이의 입장은 ‘자연은 설명하고, 정신의 삶은 이해’한다는 테제로 요약된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이유로 인간 과학의 인식론은 ‘이해understanding’와 ‘설명explaining’을 양립 불가능한 두 방법론적 접근으로 대립시킨다.[3] 기이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와 같은 물음은 데카르트, 로크, 흄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말 이전 사유 속에서] 인간이 사물의 위계에서 특권적 위치를 차지했을 수 있지만─[데카르트에게서처럼] 신체에 더하여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이든, [라이프니츠에게서처럼] 피조물들 가운데 신의 형상이기 때문이든, [로크에게서처럼] 스스로를 기억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든, 혹은 그 밖의 여러 이유에서든 간에─, 인간이 앎의 주체이자 동시에 대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푸코가 《사물의 질서》에서 사용하는 개념으로서의 ‘인간’은 앎의 주체와 대상 간의 이 분열, 이 이중성을 의미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많은 사상가들이 인류를 본질적으로 분열된 혹은 이중적인 실체로 정의했다(가령, 파스칼: 인간은 천사이며 동시에 짐승이다). 그러나 푸코에게 문제가 되는 이중성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이며, 두 요소의 더함addition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분할을 가리킨다. 따라서 푸코의 고민은, 다소 건방지게 들릴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 있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흄과 같은 총명한 사람들이 어떻게 어떤 가능한 과학적 대상, 즉 [과학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대상 일반이 그에 대해서 존재하는 그러한 대상의 기이함을 감지하지 못했는가? 그 문제가 이러한 용어들로 제기되기 위해 칸트에 이르기까지 기다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칸트가 더 예리한 지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가?

 

푸코의 답은 다음과 같다. 고전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즉 대략 17세기 초부터 프랑스 혁명(1789년) 무렵까지의 시기에 저술 활동을 했던 저자들─에게, 세계 안에 앎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사물들이 인식되도록known 스스로를 내어준다는 사실은 어떤 특정한 대상(‘인간’)에 달려있지 않으며, 오히려 사물들의 본성의 일부이다─사물들은 그 본성상 인식 가능한knowable 것이다. 이는 앎이 그들에 의해 이해되고conceived 실천된 방식에서 확인될 수 있다. 푸코는 한편으로 데카르트와 여타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끌어옴으로써, 다른 한편으로 이를 경험적empirical 앎의 세 영역인 ‘일반 문법’, ‘박물학’, ‘부의 분석’과 비교함으로써 이를 논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가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은 (앎에 관한 어떤 명시적이고 논리정연한articulate 담론이라는 의미에서의) 앎에 대한 고전주의적 관념이라기보다는, 경험적empirical 영역들의 실천 자체에 함축된 요건들의 목록, 즉 한 대상object이 객체object가 되기 위해─그것에 관하여 참이거나 거짓인 진술을 행하는 것이 가능한 영역에 진입하기 위해─충족해야 하는 요건들의 목록이다. 무언가에 앎의 잠재적 대상이라는 자격을 부여하는 ‘조건들’의 이 같은 목록이 바로 푸코가 ‘에피스테메’라고 부른 것이다. 이 간략한 규정은 그것이 해명하는 것보다 더 많은 쟁점을 개방하지만, 우리는 이를 잠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후의] 분석 과정에서 이 개념[에피스테메]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발견하기를 기다릴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에 관한 푸코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의 본성은 앎이 일종의 재현representation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푸코는 기술적인technical 의미에서 ‘재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그가 보기에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를 특징짓는 바를 포착하기 위해 고안한 개념이다. 재현이란 그 자체 다른 무언가에 관한 것이다(이 점에서 훗날 브렌타노Brentano가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부른 것과 비교할 만하다). 이는 재현이 다른 무언가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동시에, 재현이 스스로를 다른 무언가에 관한 것으로서 드러낸다는 점을 의미한다. 푸코는 데카르트주의적 논리학 편람인 포르 루아얄Port-Royal 『논리학』의 유명한 구절에서 이 관념의 예시를 발견하는데, 거기에서 아르노Arnauld와 니콜Nicole은 지도와 초상화를 기호의 첫 번째 예로 든다. 이것들[지도와 초상화]은 자신이 다른 무언가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즉, 아무도 왕의 초상화를 왕 자체와 혼동하지 않을 것이며, 이탈리아의 지도를 이탈리아 자체와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OT, 71; FMC 78-79)[옮긴이: FMC는 Les mots et les choses 플라마리옹Flammarion 출판사 판본을 가리킨다. 다른 판본으로는 보다 앞서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이 있다.]. 하나의 기호에 있어서 그것이 다른 무언가에 관한 것임이 명백하고 본질적일 때, 이 기호는 재현이다.

 

반면 재현이 다른 무언가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 불확실해질 때, 재현이 우선적으로는 그 자체로 있는 무언가이고 단지 이차적으로만 다른 무언가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여기서 재현은 오직 누군가를 위해서만, 그리고 오직 누군가에게 나타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는 통념이 등장한다. 재현의 재현성은 재현의 [범위] 바깥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 주체라 부르는 무언가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근대 특유의 물음들이 등장한다. 이 ‘주체’는, 아마도 뇌의 특수한 배열configuration 덕분에 재현을 분비하는 경이로운 능력을 지닌 어떤 동물처럼, 그 자체로 세계 안의 한 대상인가? 아니면 칸트가 주장하듯, ‘대상’─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에 대해 말하기 위한 조건 자체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언가, 곧 세계 바깥의 어떤 것인가? 물론 이는 근대 철학을 조직하는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는 경험주의적empirical 전략과 초월론적 전략 사이의 분할을 따라 근대 철학의 여러 실증주의적 경향들과 다양한 관념론적 조류 모두를 산출한다.

 

질서와 재현

 

근대적 배치를 상세히 살펴보기에 앞서, [기존] 문헌에서 과소평가되어온 푸코 논증의 한 측면을 강조하고자 한다. 푸코의 목적은 실로 이러한 재현Representation으로서의 앎이라는 개념화와 [대문자] 존재 자체에 대한 특수한 개념화─질서Order로서의 [대문자] 존재─간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데 있다. 고전주의 사상가들이 사물은 오직 다른 사물들과의 질서 잡힌 연결망 내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 존재하고 그 사물인 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던’(반드시 명시적 형태로 그런 것은 아니며, 그 사상가들이 사물을 경험적 앎의 잠재적 대상으로 취해 논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선전제로서 푸코에 의해 재구성된 그러한 믿음) 이유는, 그들이 사물을 안다는 것은 곧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에피스테메’란 존재론인 동시에 인식론이며, 이 점에서 푸코가 《사물의 질서》에서 전개하는 앎의 역사는 하이데거적 의미에서의 [대문자] 존재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문자] 존재에 관한 고전주의적 이해conception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자. 질서Order는 재현Representation과 마찬가지로 매우 엄밀한 개념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 (1) 사물은 특정 질서 속에 위치지어질 뿐만 아니라, 그 실존existence과 본질 양면에서 구성된다는 의미에서 이 위치에 의해, 즉 위치 정의된다.[4] (2) 사물들의 관계는 사물들에 외부적인 격자를 투사한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를 조직하는, 그리고 그러한 조직을 통해 그 관계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사물의 본성에서 유래한다. 이것이 푸코가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관념, 즉 측정은 궁극적으로 질서로 환원될 수 있다는 관념에서 고전주의 시대의 문턱을 볼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는 제3항에 대한 호소를 함축하는 절차(두 사물을 그 크기에 기초하여 비교하는 것, 즉 측정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양자를 제3의 것, 즉 미터와 같은 표준에 연관시키는 것을 수반하는 것처럼 보인다)를, 데카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단지 두 ‘외부 항’을 고려할 것을 요구하는 절차로 환원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실제로 이 두 외부 항 이외의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서 A와 B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가 무엇인지 인지할 수 있다”(데카르트, 『정신 지도를 위한 규칙』 규칙 6, OT, 59; FMC, 67). [데카르트에 따르면,] 항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것, 즉 그 자체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을 골라내고, 이어서 다른 모든 항들을 첫 번째 항으로부터의 상대적 거리에 따라 점진적으로 차이나는differing 것으로 정의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Order의 존재론은 어떻게 재현Representation으로서의 앎에 대한 개념화를 해명할 수 있는가? 다음의 세 가지 논평이 이 두 개념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이 질서Order는 자기 자신에 내재적이므로, 그 자신인 바이기 위해 말해지거나 상상될 필요가 없다. 이는 (푸코가 《사물의 질서》 2장에서 재구성하는 바와 같은) 르네상스 세계와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르네상스 세계에서 사물은 다른 사물들과의 유사성resemblances 덕분에 그 사물인 바로서 존재하고, 이 유사성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종류의 유사성에 의해 표지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어떤 사물의 동일성은 항상 해석되고, 판독되고, 해독되어야 한다. 푸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해석Interpretation으로서의 앎이라는 개념화가 유사성Resemblance으로서의 [대문자] 존재라는 개념화에 근거했던 것처럼, 재현Representaiton으로서의 앎이라는 개념화는 질서Order로서의 [대문자] 존재라는 개념화에 근거해 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적 존재론의 경우, 사물들은 항상 해석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해석하는 것이고, 기호이면서 동시에 기호의 기호였던 반면, 고전주의 시대의 경우, 사물과 기호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다. 사물들은 현전하는present 반면, 기호는 이차적으로 오며 사물을 재-현하는re-present 역할을 할 뿐이다. 즉, 사물 자체는 기호를 필요로 하지 않고 전적으로 그 사물인 것으로 존재한다. 둘째, 우리는 사물들이 질서 잡혀 있는 것처럼 그 재현들도 질서 잡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며, 나아가 하나의 기호가 하나의 사물을 지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사물이 사물들의 연결망 속에서 차지하는 것과 동일한 위치를, 그 기호가 재현들의 연결망 속에서 차지하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달리 말해, 기호와 사물은 일대일 유사성에 의해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상동성homology에 의해 관련된다.[5]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셋째, 내재적인 것으로서의 질서Order라는 통념은 그 자체로 질서가 자기 자신 내에서 스스로를 재현함을 함축한다. 실제로 각각의 항 X는 ‘그것이 표준 항 A와 얼마나 다른가’로 환원되는 동일성을 갖는다. 즉, X는 규정적 비non-A이며, X와 Y는 A로부터 다소간 차이 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사물들의 전체 집합은 이처럼 하나의 일차적 항으로부터 낸 차이의 농담(濃淡) 위에 투사된다. 이런 의미에서 전체 연결망은 자기 자신 위에 접혀 자기 자신 안에서 재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푸코나 그 이후의 문헌 모두 그다지 명료하지 않으므로, 이를 최대한 명확히 해보자. (1) A와 B라는 두 사물이 주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아는 유일한 것은 그것들이 구별된다는distinct 것뿐이다. (2) 우리는 그것들에 관한 어떤 앎을 획득하기 위해, B가 (이제) 규정적 비-A(즉, A와 다름의 특정한 양식way, A로부터 차이남의 특정한 정도)이도록 B의 동일성을 A에 투사한다. ‘규정적 비-A’라는 이 새로운 항은 A 안에서의 B의 재현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네 가지 항, 즉 A, B, A의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 그리고 규정상 A와 다른 것the determinate different-from-A이 있다. 재현의 정식formula은 다음의 상동성에서 주어진다. A 대 B의 관계는 A와 동일함 대 A와 다름 간의 관계와 동일하다. (3) A와 동일한 것(A´)과 A와 다른 것(B´) 간의 관계는 그 자체로 A의 자기 동일성과의 동일함과 A의 동일성과의 다름에 의해 재현될 수 있으며, 이하 마찬가지이다. 달리 말해, 사물들의 질서 잡힌 체계는 자기 자신 안에서 재현들의 질서 잡힌 체계를 산출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재현하는데, 이 체계는 결국 자기 자신을 무한히ad infinitum 재현한다.

 

우리는 흑백사진 혹은 보다 적절하게는 적백사진red and white photograph의 예시를 통해 이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다. 색채의 풍부한 질적 스펙트럼은 그 부분집합들 가운데 하나로 투사될 수 있으며, 그로써 모든 차이를 상이한 거리─표준적 색조nuance의 빨강에서부터 순백의 하양에 이르기까지의 ─의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처럼 새로운 척도가 주어지면, 빨강의 다양한 농담을 보다 좁은 또 다른 색조의 부분집합으로 투사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물론 그 차이가 인간의 눈에는 덜 분명해지겠지만, 스펙트럼이 연속적이라면, 이 절차는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옮긴이: 우리는 세 장의 사진을 상상함으로써, 이 예시를 보다 적절히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모든 색이 표현된 평범한 컬러 사진 A를 상상해보자. 만약 이 사진의 모든 색을 빨강과 하양 사이의 스펙트럼으로만 표현한다면, 적백사진 A´를 얻게 될 것이다. 마니글리에가 말한 것처럼, 이는 무한히 반복 가능하다. 가령 적백사진 A´를 만들기 위해 적용된 스펙트럼을 색의 농담에 따라 빨강10, 빨강9, …빨강2…하양으로 단순화해보자. 우리는 범위를 좁혀 빨강6에서 하양에 이르는 또 다른 스펙트럼을 취하고, 이를 적백사진 A´에 적용하여 A´´를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이를 무한히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고전주의적 질서Order는 세계의 풍부한 질적 다양성 전체를 한 특질의 농담으로 환원하고, 이 환원을 자기 자신 안에서 무한히 반복하는 데에, 따라서 연속성의 형이상학적 원리에 자기 자신을 의탁하는committing 데에 있다.[6]

 

푸코가 《사물의 질서》 제1부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보여주는 바, 이러한 재현 통념과 질서 통념은, 17~18세기에 언어, 유기체, 경제적 교환이 앎의 잠재적 대상으로 이해되었던 방식을 설명해준다. 푸코로 하여금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질서와 재현 간의 이 상관관계, 즉 서로 다른 세 가지 경험적 탐구 영역에서 평행을 이루며 작동하는 상관관계를 발견할 가능성이다. 지면의 한계상 여기서 그의 분석이 지닌 정교함과 설득력 모두를 전달할 순 없으며, 독자들은 거팅(Gutting 1989)에게서 이 장들에 대한 탁월한 요약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다만, 푸코가 고전주의 시대에 있어서 사물의 재현 가능성은 그 본성의 일부이며, 그중 특정한 어느 하나(즉, ‘인간’)에 귀속되지 않는다고 썼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해명하는 것이다.

 

 

역사와 체계

 

‘인간’의 출현에 관한 고고학적 물음은 이제 다음과 같이 재정식화될 수 있다. 사물의 존재 양식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기에, 더이상 앎을 재현Representation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는가? 푸코의 대답은 역사History와 조직Organization이라는 두 단어에 초점을 둔다. 근대 에피스테메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더이상 한 특질이 이루는 일련의 농담 속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시간적 잇따름sequence에 속하는 것, 즉 역사적인 것이다(OT, 236-237, FMC, 230-232). 그러나 푸코는 또한 보다 심층적인 수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물의 역사화는, 사물이 더이상 원자적 항들로 파악되지 않고 관계들의 다발, 즉 유기체 혹은 ‘조직Oraganizations’으로 정의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대문자] 존재를 [대문자] 시간과 등치시키는 전형적인 근대의 역사적 존재론은 따라서 존재자를 체계로 파악하는 존재론에 의거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역사History와 조직Organization이라는 두 개념 간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이며, 그 관계는 어떻게 ‘인간’의 출현을 해명하는가?

 

역사와 체계 사이의 연관은 특히 언어학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고전주의 시대에 언어들은 그 재현 기능에 기반하여 [서로] 비교되었다. 단어가 관념을 재현하는 방식이 언어의 조직, 즉 문법을 결정했으며, 언어들 간의 차이는 재현 기법techniques의 차이였다. 18세기 말, ‘굴절 이론’(《사물의 질서》 7장 4절)과 더불어 문법 체계는 그 재현 기능으로부터 자율적인 내재적 구조를 부여받는다. 문법 체계의 내적 복잡성은 더이상 그것이 전달해야 하는 것의 복잡성의 함수가 아니라, (1) 해당 언어가 그로부터 유래한 특정 언어의 함수이며(예컨대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인도유럽어의 일부 특성을 물려받을 것이다), (2) 의미와 무관하게 통사 체계의 일부 또는 전부에 맹목적으로 적용되는 언어적 진화 법칙의 함수이다. 따라서 언어들 간의 비교는, 그 안에서 재현이 완벽히 재현될 어떤 가설상의 완전 언어─각각의 역사적 언어가 이 유일한 재현의 언어Language of Representation의 한 가지 가능성을 현실화한 것인 양─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다. 비교는 이제 하나의 특수한 개별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직접 이행하며, 설령 양자 간 유비 관계가 성립할지라도, 그러한 관계는 기저에 놓인 완전 언어의 증거가 아니라, 양자 간의 우연적이고 역사적인 연결 고리link의 증거로 간주될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보프Bopp에서 소쉬르Saussure와 블룸필드Bloomfield에 이르기까지 19세기를 지배한 역사비교문법의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언어라 불리는 이 기이한 대상에 부여되어야 할 존재 유형sort에 관한 여러 사변들을 촉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어는 명백히 그 진화가 인간의 의지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오히려 오직 언어학자에 의해 발견될 수 있을 따름인 객관적 법칙을 따르므로, 인간이 손에 쥔 한낱 도구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언어는 오직 말하기라는 인간 활동 속에서만 존재하므로, 그 실존existence을 돌이나 행성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도 없다. 푸코가 그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객관주의적 테제를 옹호하는 독일 문헌학자 막스 뮐러와 아우구스트 슐라이허 대 제도주의 측을 대변하는 미국 언어학자 윌리엄 드와이트 휘트니 사이의 논쟁은, 새로운 언어학이 언어의 존재 자체를 문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본 푸코의 생각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푸코는 유사한 전환─비록 (먼저 대상을 체계로 재정의한 다음, 그것들을 역사화하는) 두 단계로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이 언어학에서뿐만 아니라 경제학과 생물학에서도 작동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세 학문분야는 그러한 전환과 더불어 [언어학, 경제학, 생물학이라는] 근대적 이름 아래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특수한 언어도 완전 언어─다른 모든 언어들 간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는─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수한 상품도 다른 상품들 간의 (교환) 관계 전체를 표현할 수 없다. 사물의 가치는 그것을 위해 얼마만큼의 어떤 특정 사물(금이나 토지)을 포기할 용의가 있는지에 따라 평가되지 않는다. 사물의 가치에 개입하는 것은 대상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무언가, 즉 인간의 노동과 생산 시간이다. 사물은 자신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무언가에 근거하여 비교 가능한 것이 된다. 이와 유사하게 종species의 동일성은 더이상 일정 수의 형질characters─유기체의 표면에 가시적으로 드러나는─이 이루는 반복과 조합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종의 동일성은 이 요소들이 조합되는 방식에 의해, 즉 그 조직Organization에 의해, 따라서 그 자체로는 재현되도록 주어져 있지 않은 무언가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 이와 같은 조직들 간의 유비 관계는 궁극적으로 (다윈과 함께)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의 흔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 모든 영역에서 재현Representation의 논리는 붕괴한다. 다시 말해, 사물들 간 차이는 더이상 그중 한 특정 사물과의 동일시의 정도 측면에서 표현될 수 없다. 사물은 내재적 근거 위에서 스스로를 재현하는 힘을 상실하며, 이러한 상실은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차이의 장 전체를 설명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을 사유 가능하게, 즉 비교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사물인 바의 일부가 아니다. 실재는 재현되게끔 되어 있지 않다. 만약 실재가 재현된다면, 이는 오직 한 특정 존재자의 어떤 우연적 특징 덕분인데, 그 존재자는 물론 ‘인간’일 것이다.

 

이와 상관적으로 사물은 서로 간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동일성을 갖지 않으며, 이제 관계들의 체계가 된다. 사물은 서로 간의 관계에서 완전히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 고유한 내부성을 부여받는다. 이와 같이 사물들 서로 간의 외부적 관계는 사물 고유의 내적 관계의 형태(즉, 그 ‘구조’)에 의존한다. 이에 따라 비교는 유비의 기예art가 된다. “한 유기적 구조와 다른 유기적 구조 사이의 연결 고리는 사실상 더이상 하나 또는 여러 요소의 동일성일 수 없으며, 요소들 간 관계의 동일성이어야 한다”(OT, 236; FMC, 230). 유비[관계]라는 사실은 더이상 사물의 본성에 따른 필연적 귀결로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의 동일성이 다른 사물에 대한 상대적 위치가 아니라 그 내적 구조로부터 유래하는 이상, 사물이 서로 관계 맺어야 할 내재적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푸코가 설명하듯, 이것이 바로 유비가 계기succession의 흔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이다(OT, 236; FMC, 230). 실제로 본질들 간의 개념적 관계(즉, 사물들 간의 유사성similarities)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의 존재existence가 다른 하나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보는 것이다[옮긴이: 정리하여 부연하자면, 근대의 에피스테메에서 유사성은 (르네상스에서처럼) 사물의 본성으로부터 도출될 수도 없고, (고전주의 시대에서처럼) 재현적 질서 내의 위치로부터 도출될 수도 없기 때문에, 역사적 계보를 통해 해명될 수밖에 없다.]. ‘사물의 질서’는 이제 ‘X가 Y를 낳았다’ 혹은 ‘Y는 X로부터 비롯되었다’와 같은 실재적이고actual 실존적인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근대의 존재론에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곧 관계들의 조직된 체계로 있는 것이자 역사적인 것이다.

 

인간학적 원환: 경험적인 것과 초월론적인 것 사이에서

 

그러나 우리는 아직 다음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역사와 조직의 존재론은 왜 ‘인간’이라는 이 기이한 실체─존재자들이 재현 가능한 것이 되게끔 하는 저 존재자─의 출현을 함축하는가?

 

우선 다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제 존재자가 조직으로 정의되는 한, 존재자는 그 자신의 내부성, 곧 일종의 실존적existential 깊이를 갖는다. 존재자는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 있으며, 오직 이차적으로만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 그리고 다른 것들을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존재자를 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자의 본질에 외재적인 작용operation이며, 그에 따라 오직 존재자에 대한 인식하는 자knower의 관계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사물은 그] 재현을 항상 동일한 형태에 따라 배분하는 항구성constancy이기를 그치고, 자기 자신 안으로 되접히고, 자신의 부피를 정립하며, 우리의 재현 외부에 있는 내부 공간을 스스로 규정한다. […] 재현되는 것의 존재 자체가 이제 재현 그 자체의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게 된다”(OT, 259-260; FMC, 253).

 

둘째, 이와 상관적으로 사물이 자기 자신의 내부성 속으로 물러날 뿐만 아니라, 재현 또한 더이상 그것이 재현하는 바로부터 단순히 도출될 수 없는, 자율적인 실존의 형태를 획득한다. “생물, 교환의 대상, 그리고 말은 […] 그때까지 자신들의 본연의natural 장소였던 재현을 버리고, 사물의 심층 속으로 물러나, 생명·생산·언어의 법칙에 따라 자기 자신 위로 말려든다”(OT, 341; FMC, 324). 이는 언어, 생물, 상품이 다른 사물들과 병치되며, 동일한 평면 위에서 동일한 객관성을 부여 받고, 돌이나 행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더이상 세계 위에 덧씌워진 투명한 격자를 이루지 않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곧바로 이 대상들이 이중적 처신을 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이것들[언어, 생물, 상품]은 세계 속에서 다른 것들과 나란히 존재하는 실체들real entities인 동시에, 사물 일반이 재현의 대상이 될 수 있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자 다른 무언가에 관한 것이다. 이 특수한 실체들이 ‘인간’─앎의 대상-주체를 위한 이름인─의 구성에 그토록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푸코의 테제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어떤 통합된 과학의 직접적 대상이 아니라, 언어Language, 생명Life, 노동Labor이라는 이 ‘세 가지 경험성’의 중첩이 빚어낸 표면적 효과이다. ‘인간’이란 “경제학, 문헌학, 생물학의 법칙에 따라 살고, 말하고, 노동하면서도, 일종의 내적 비틀림과 겹침으로 인해 바로 그 법칙들의 상호 작용interplay을 통해 그것들을 알고, 그것들을 완전히 해명할 권리를 획득한” 존재이다(OT, 338; FMC, 321). ‘인간’이라는 저 실체는 생명, 노동, 언어─능동적 힘forces으로, 곧 객관적 힘powers으로 파악된 한에서의─에 의해 구성되는 동시에, 이 힘들 자체를 이론적 대상으로 취할 수 있다.

 

세 번째 설명에서는 모든 역사주의적 존재론에 내재적인 종류의 반성성reflexivity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실제로, 사물의 본성이 항상 상당 부분 우연한 역사의 산물이라면, 그리고 앎의 체계의 존재가 다른 사물들의 존재와 동등하다면, 앎 자체가 역사를 가진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앎은 그 자신의 대상의 일부이다. 세계에 대한 완전한 앎은 세계가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는지, 왜 이러저러한 특정 형태로 알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story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앎은 동시에 자신이 그 자신의 역사에 의해 조건지어져 있으며, 따라서 어떤 영원하고 보편적인 실재reality에 직접 접근한다고 주장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근대의 역사주의적 존재론에서 앎은 자기를 상대화하는 것(스스로를 자신의 탐구 영역의 일부로서 발견하는 것)이자 유한한 것(앎은 실재에 대한 직접적이고 무조건적인 접근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학적 패러다임의 도래에서 결정적인 요인은, 이 새로운 경험성들의 철학적 귀결이 지니는 불안정성의 인지recognition에 있다. 실제로 이는 다음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앎을 가능하게 하는 것 자체가 앎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특정 종이 진화 과정에서 어떻게 과학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story은 즉각 다음과 같은 반론을 초래한다.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의 구조를 과학적으로 발견하는 데에 X 또는 Y가 포함된다면, 이는 이미 [그러한] X와 Y를 전제로 승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그렇지 않다면 과학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옮긴이: 마니글리에는 여기서 설명의 대상이 동시에 설명의 조건이 되는 순환을 지적하고 있다. 간략한 예시를 들자면, 우리는 어떤 설명이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그러한 설명에서 논리적 추론이나 경험적 관찰이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생각 자체가 이미 논리적 추론 혹은 경험적 관찰을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X와 Y는 의심할 수 없는 인식적 원리인 동시에, 세계에 관한 우연적인 사실, 즉 모든 경험적 발견의 사안이 그러할 수밖에 없듯이 우연적인 것으로 남을 사실이기도 하다. 물론 이 문제─콰인Quine의 ‘자연화된 인식론’의 영향으로 분석 철학에 친숙한 것이 된─는 일찍이 초월론적 전략이라는 칸트의 철학적 발명의 핵심에 놓여있었다.

 

그렇다면 칸트가 이 전략 덕분에 인간학적 원환을 벗어났다고, 베아트리스 안-필Béatrice Han-Pile(2010)이 주장했듯, 인간학적 원환은 사실상 근대 사유 내 다양한 실증주의적 경향들에만 적용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물의 질서》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자 분명한 본래의 의도는, 철학에서의 초월론적 전회의 어떠한 판본─푸코가 염두에 둔 것은 분명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로 인해 전후 프랑스에서 지배적이었던 현상학이다─도 인간학적 원환을 벗어날 수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푸코는 초월론적 철학이 ‘세 가지 경험성’에 특유한 어떤 ‘비틀림’ 덕분에 가능해졌다고 분명하게 진술한 바 있으며(“생명, 언어, 그리고 경제에 관한 과학의 새로운 실증성은 초월론적 철학의 정초와 상응한다”, OT, 265; FMC, 257), 뿐만 아니라 초월론적 철학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오히려 초월론적 철학은 이 세 가지 기이한 객관성 안에서 작동하는 이중화를 ‘경험적[인 것]’과 ‘초월론적[인 것]’ 사이의 차이로 재정식화했을 뿐이다. 이는 분명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대목 중 하나이며, 많은 주석가들은 푸코가 이 테제에 충분한 논변을 제시했다는 점을 부인해왔다(거팅 1989:222-223; 안-필 2010: 133).

 

지면의 한계상 이 반론에 완전히 답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한 가지 대답의 윤곽 정도는 그려보고자 한다. 앎의 주관적 원리들이 어떤 객관적 특징features(예컨대, 뇌의 특정한 모양, 사회 조직, 커뮤니케이션 도구 등)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인정하더라도, 이 순수하고 탈신체화된disembodied 초월론적 주체와 저 특수한 대상─동시에 우리 자신이기도 한─간의 관계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이 관계 자체는 순수한 사실인가, 아니면 이 또한 원리적으로 정초되어야 하는가? 이 같은 지적은 다음과 같이 재정식화될 수 있다. 대상들 중 초월론적 역량capacity과 어떤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이는 한 대상, 그로 인해 특별하고, 심지어 유일한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대상이 있으며, 이 대상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과학의 순수한 규범적 주체도 아니고 그 우연적 사실의 대상도 아니며, 오히려 어떤 불분명한obscure 의미에서 이 둘이 동일하다는 사실이다─우리는 경험적인 동시에 초월론적이다. 이는 어떤 해결이기는커녕, 헤겔에서 메를로-퐁티에 이르기까지, 후설과 하이데거를 포함하는 근대 철학의 전 시기에 걸쳐 천착하게 될 문제의 시작에 불과하다.

 

푸코는 여기서 칸트의 『인간학(Anthropology)』─그가 번역하고 1961년 박사 학위 논문의 일부로 서론을 집필한─에 관한 자신의 이전 작업에 기대고 있다(푸코 2008).[7] 거기서 푸코는, ‘인간’이 초월론적 철학에 제기하는 특수한 문제가 최초로 정식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칸트는 자신의 인간학을 ‘실용적인pragmatic’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이 문제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인간을 경험적 대상으로서 연구하지도, 단순히 ‘인간’ 안에서 형이상학적 ‘나’의 순수한 자유를 인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간’을 자연─우리가 점진적으로 마땅히 되어야 할 바, 즉 자유로운 자율적 행위자가 되기 위해 활용될 수 있는 자연─의 일부로서 연구했다. 그러나 그는 동일한 대상에, 예컨대 능력들faculties, ‘자아’ 혹은 감각에 초월론적 내용과 ‘인간학적’ 내용이 [동시에] 부여될 수 있다는 점 [또한]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특정한 경험적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로부터 파생된 철학적 귀결들의 불안정성을 지시한다. “경험적 내용에 초월론적 가치를 부여하거나, 구성하는 주체성의 방향으로 경험적 내용을 전치시키면서, 적어도 암묵적으로나마 인간학─즉, 획득된 앎(따라서 모든 경험적 앎)의 정당한 한계들이 바로 그 동일한 경험적 앎 속에서 주어지는 바로서의 실존의 구체적 형태들이기도 한 하나의 사유 양식─을 산출하지 않기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OT, 270; FMC, 261)[옮긴이: 이 구절에서 푸코는 칸트처럼 경험적 내용에 초월론적 가치를 부여하든, 현상학에서처럼 경험적 내용을 구성하는 주체성의 방향으로 전치시키든 간에 인간학을 산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마니글리에 또한 이를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논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두 가지 물음이 제기된다. 하나는 인간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이 있는지, 따라서 ‘인간’이라는 개념을 폐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결국 메를로-퐁티가 그러하였듯, 철학이 앎에 대한 어떤 절대적 근거도 제공할 수 없고, 초월론적 요건인 동시에 경험적인 사실이기도 한 원리들을 정식화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정당한 과제를 갖는다는 점을 그저 감수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 과제란 이처럼 [우리의 인식을] 조건짓는 구조들을 밝히는 것, 그러한 과제가 끝없이 계속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조건으로 기능하게 된 것을 가능한 한 멀리까지 나아가서 해명하는 것일 터이다. 푸코가 이 해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물음은 푸코 자신의 방법에 관한 것으로서, 그가 자신이 그토록 설득력 있게 재구성한 종류의 딜레마로부터 빠져나왔는지 묻는다.

 

구조주의: 인간학적 원환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

 

푸코는 이 책의 말미에서, 특히 세 가지 ‘대항 과학’─민족지ethnography, 정신분석학, 그리고 언어에 대한 순수 이론─에 대한 분석에서 인간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을 소묘한다. 푸코가 이후에 이를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인들이 《사물의 질서》를 구조주의의 걸작으로 받아들인 것은 옳았다. 푸코가 이 책에 ‘구조주의의 고고학’이라는 부제를 붙이고자 했음을 알고 있으며, 여기서 ‘정신분석학’은 라캉을, ‘민족지’는 레비-스트로스를, ‘언어에 대한 순수 이론’은 보다 막연하게 구조 기호학을 암시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푸코에 따르면, 이 모두는 “‘인간’을 해체할” 역량을 지닌다. 왜 그러한가?

 

첫째, 이 대항 과학들은 재현적 패러다임과 전면적으로 단절하고, 단호히 비非재현적 개념화를, 더 정확하게는 앎의 실천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캉에게 무의식이란 정신분석학이 그에 관해 정확하고 기술적인 정보의 총체를 제공할 대상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의식은 주체의 담론 내 어떤 간극으로서, 객관화[대상화]될 수는 없으나 경험될 수 있고, 담론 구조의 변형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라캉은 무의식을 ‘비존재non-being’로 정의한 바 있다. 무의식적 내용은 의식의 장막 저편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언, 꿈, 혹은 증상 속에서 오직 간접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8] 치료의 목적은 환자가 어떤 억압된 내용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관념을 라캉이 거부한 것 또한 사실이다. [라캉에게] 치료란 오히려 환자를 ‘실재real’, 즉 상징화할 수 없는 것과 대면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식의 내용은 ‘인간’의 유한성 위에서 스스로를 절합하거나, 차라리 벌어진 채 서 있다”(OT, 408; FMC, 386)는 푸코의 말은 전적으로 옳으며, 이 유한성은 재현되기보다는 치료 속에서 직접적으로 현시된다. 정신분석학은 일반 법칙들의 목록을 전개하는 앎의 과학적 체계body가 아니라, 전이transference로부터 발생하는 주체적 진리가 (그저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고, 동시에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독특한singular 것으로 나타나는 실천이다. 레비-스트로스적 인류학 또한 마찬가지로 실험적experimental이고 관계적인 실천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에서 쓴 것처럼, 인류학적 앎은 타자에 대한 기술이라는 이론적 기획이라기보다는 자기 이탈self-detachment 속에서의 실천적 훈련exercise이다. 민족지학자의 ‘대상’은 기록하고 설명해야 할 세계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만일 습속과 관습의 다양성을 통해 이미 분할된 상태로 주체에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개별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서 고통스럽게 떼어내야만 했을” 자신의 일부인 것이다(레비-스트로스, 1987[1950], 32-33)[옮긴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 박정호·박세진 옮김, 파이돈, 2023, 45쪽 참조.].

 

일반적으로 보아, 정신분석학과 인류학 모두 주체에 관한 진리가 실제로 존재하되, 이 진리가 객관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주체에 관한 진리가 반성적 탐구의 형식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선험적a priori 진리라는 것─초월론적 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이 진리는 주체의 실재적actual 변형 속에서만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실험적experimental이다.[9] 동시에 이 진리는 상대적[관계적]relative인데, 어떤 주체 상대적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변이항들의 체계 내에서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마치 인류학자가 질서 잡힌 방식으로 관계 맺는 보다 넓은 범위의 대안적 친족 체계들의 일부로서 자신의 친족 체계를 재정의하는 것처럼 말이다[옮긴이: 번역을 통해 이 구절을 온전히 옮기기 어려운 탓에 조금 첨언하자면, 마니글리에는 ‘relative’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일종의 말놀이를 하며, 의도적으로 ‘relative’에서 ‘관계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구조주의의 비밀은, 앎의 상대성relativity을 어떤 모호한 ‘주체-객체’에 귀속시키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데에 있을 터이다. 같은 맥락에서 구조주의는 역사적 틀을 벗어나는 변화의 형태를 구상한다. 실제로 푸코는 민족지가 ‘근대적’ 사회와 ‘비非근대적’ 사회를 비교함으로써, 한 문화가 자기 자신을 역사적인 것으로 지각하게끔 하는 변형들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OT, 410-411). 여기서 푸코는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Savage Mind)』 마지막 장에서 사르트르에게 가했던 공격을 암시하는데, 그에 따르면 역사란 신화의 근대적 형태에 불과하며, 따라서 상징적 사유의 한 변이형일 뿐이다.

 

구조주의가 인간학적 원환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비록 푸코는 이 점에 관해 유보적이지만─는 구조주의가 어떤 의미에서 고전주의 시대를 특징지었던 존재와 의미 간의 동일성을 재정립한다는 데에 있다. 근대가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의미를 갖게 될 가능성 사이에 분열을 도입함에 따라, 모든 것이 그것을 통해 그리고 그것을 위해 의미를 갖게 되는 이 특수한 존재(‘인간’)를 발명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구조주의는 존재론과 의미론의 새로운 화해를 약속한다. 푸코가 쓰길, “우리의 성찰reflection의 창공에는 존재론이자 동시에 의미론일 하나의 담론─아마도 접근 불가능한 담론─이 군림하고 있다. 구조주의는 새로운 방법이 아니다. 이는 근대 사유의 깨어난 의식이자 불안해하는 의식이다”(OT, 226; FMC, 221).

 

주지하다시피, 구조주의에서 특정 항의 의미는 가지적 통념과 맺는 연관association의 결과가 아니라, 다른 항들과의 대립의 결과이다. 따라서, 기호의 의미론적 측면은 항으로서 그것이 갖는 규정, 즉 하나의 존재로 정립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항들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항들이 관계 맺는 방식, 즉 그 구조이지, 말없는 존재에 내용을 부가하는 정신의 외재적 행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상징적 사유’란 전前논리적 사유 형식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해 감각적인 것을 사용하는 종류의 앎이며, “감각적 항을 통해 감각적 세계를 사변적으로 조직하고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구체의 과학”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야생의 사고』는 전통 문화를 특징지었던 의미와 존재의 통일성이 “정보의 우주─[…] 전달 과정에 있는 그 메시지들은 물리적 세계의 대상을 이루며, 외부와 내부 양측에서 파악될 수 있다─의 발견 덕분에 우리에게 되돌아온다”는 관념으로 끝을 맺는다(1966[1962]: 267). 이 점에서 구조주의는, 의미가 재현적인 것이 아니라면 존재도 순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

 

구조주의가 당시 푸코에게 인간학적 원환으로부터의 단절을 약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은 마땅하며, 이를 설명할 또 다른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바라건대,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도 [《사물의 질서》의] 관념과 내기wager─“‘인간’은 인간의 앎에 제기된 가장 오래된 문제도, 가장 항상적인 문제도 아니”라는 관념과 “‘인간’이 바닷가 모래 위에 그려진 얼굴처럼 지워지리라는 내기”─모두에 어느 정도 의미와 근거를 제공하기에는 충분했으리라. 이제 결론적으로 《사물의 질서》에 제기된 몇 가지 주요 반론들을 검토할 때이다.

 

몇 가지 반론에 대한 답변

 

《사물의 질서》는 오늘날까지 푸코의 저작 가운데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책으로 남아있다. 이 책은 푸코를 유명하게 만들었지만, 출간 당시 이 책이 불러일으킨 반응의 격렬함은 그 성공에 필적할 정도였다.[10] 게다가 1978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보아, 저자 자신도 결국 이 책을 부인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사물의 질서》는 저에게 일종의 형식적 연습이었습니다… 《사물의 질서》는 진정 제 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저서들을 관통하는 종류의 열정에 있어서는 주변적인 책이기 때문입니다”(EW3, 267). 《사물의 질서》에 제기된 모든 반론에 답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여기서 그중 가장 심각한 오해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몇 가지 반론을 검토하고자 한다.

 

반론의 유형 중 하나는 사실적인 것으로서, 특정 저자, 저작 또는 개념에 대한 푸코의 해석이 정확한지를 두고 다툰다(이러한 비판의 사례로는 거팅 1989: 175-178 참조). 《사물의 질서》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 분명 다수 있으며, 언어학을 다루는 역사가로서 나는, 푸코가 기표와 기의로 구성되는 소쉬르의 기호 개념화를 포르 루아얄의 개념화와 나란히 둠에 따라, 소쉬르를 심각하게 오독했다는 것을 쉽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OT, 74; FMC 81). 그러나 내가 주장하려는 바, 중요한 문제는 푸코의 주장 하나하나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푸코의 재구성 전체가 역사가들에게 주는 흥미와 유용성에 있다. 또한 나는 푸코의 재구성이 [진정으로] 역사가들에게 흥미로움과 유용함을 제공한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통계의 역사(해킹 1991), 회화의 역사(아라스 2001: 6장), 문학의 역사(마린 1975), 심지어 수학의 역사(빈치게라 1999, 2007)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유용함이 입증된 바 있다. 다만 이 글이 《사물의 질서》가 특정 하위 분야에서 생산적일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러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자리는 아니므로, 보다 원리적인 반론 몇 가지를 검토하겠다.

 

핵심적인 반론 중 하나는 ‘에피스테메’의 지위에 관한 것으로서, 각 시대에 대해 경험 과학뿐만 아니라 (세르반테스와 사드의 경우처럼) 문학, (벨라스케스의 경우처럼) 미술, 그리고 (경제학 같은) 그 밖의 다양한 실천들까지, 당대 쓰여진 모든 것을 아우르는 기술을 제시하겠다는 푸코의 뚜렷한 야심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러한 총체화의 야심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주어진 어떤 문화에서든, 주어진 어떤 시기moment에서든, 이론으로 표현되든 암묵적으로 실천 속에 투여되든, 모든 앎의 가능 조건을 규정하는 에피스테메는 항상 오직 하나뿐이다”(OT, 183; FMC 179). 이처럼 무모할 정도로 야심찬 기획은 그토록 많은 반례를 맞닥뜨렸을 때 치명타를 입는 것 아닌가? 이후의 시기를 선취하는 듯 보이거나, 반대로 이전 시기의 몇몇 특성들을 보존하는 듯한 저자, 텍스트, 실천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박물학자 하비Harvey와 라부아지에Lavoisier가 퀴비에Cuvier의 기능 개념과 동일한 것을 [이미] 갖고 있었다고 논증할 수 있으며(뷔르줄랭 2009 참조), 반대로 20세기 분석 철학은 ‘인간’의 문제에 전적으로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고 논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거팅 1989: 222). [그런데] 푸코 자신이, 특히 르네상스에 관한 [두 번째] 장에 [근대 현상학자인] 메를로-퐁티의 저서 ‘세계의 산문’에서 빌려온 이름을 붙인 푸코 자신이 진정 이 문제를 몰랐겠는가? 이 반론의 생생하고 일반화된 판본은 장-뤽 고다르에 의해 정식화되었는데(에리봉 1991: 156 주석3에서 인용), 고다르는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것은, 푸코가 그랬듯 미래에 누군가가 그 영화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정식화는 우리로 하여금 에피스테메라는 핵심 개념의 정확한 의미에 주목케 한다는 면에서 장점을 지닌다. 고다르에 따르면, 에피스테메는 분명 한 시대의 정신적 벽 같은 것을 의미한다. 특정 시대에 특정 사회에서 무엇이 사유될 수 있고 무엇이 사유될 수 없는지를 예외 없이 규정하기에, 어떤 개별 정신도 빠져나갈 수 없는 벽 말이다.

 

그러나 이 해석이 푸코 자신의 말에 충실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가장 너그러운 해석이 아님은 확실하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푸코의 말에 주목하기보다 실제로 그가 한 일에 주목한다면, 다음의 사실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푸코의 기획은 과거가 왜 그러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회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가능성에 대한 현재의 환상─예컨대, ‘인간’ 개념을 포함하지 않고 앎을 정합적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믿음─을 우회하는 것이다. 과거의 ‘사유 체계’에 대한 그의 재구성은 일련의 과거 사태들에 대한 기술을 총체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선입견을 제거하기 위해 현재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비판적 훈련을 위한 것이다. 서문에서 푸코가 보르헤스의 중국 백과사전 이야기와 관련하여 ‘그것을 사유하는 것’의 순전한 불가능성을 언급할 때, 그것은 그러한 불가능성을 그저 설명되어야 할 사실로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응전해야 할 도전으로 기록하려는 것이다. 기술description의 체계적 본성은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려는 노력에 의해 추동되고 정당화되며, 이 대안적 관점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자임하는 현재의 헤게모니적 관점에 맞서기에 충분할 만큼 정합적이면서도 실험적exotic이어야 한다. 푸코의 접근은, 그가 실제로 종종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기도 했던 것처럼, 인류학자의 접근과 매우 유사하다.[11] 그가 생애 말년에 (『성의 역사2』 서문 및 EW 1권 중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자신의 작업을 특징지으며 사용한 유명한 표현처럼,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려는 노력이다. 인류학자에 의한 특정 사유 체계의 재구성이 그 사회에 속하는 모든 개별 구성원의 심적 상태나 뇌 구조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듯(그것은 오히려 대안적 삶의 방식이 자기 자신의 개념적 세계에 부과하는 전치를 그 개념 세계 내에서 가늠하는 방식이다[12]), 푸코의 작업이 주어진 시대의 모든 개별 담론에 대해 참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또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실현함으로써 저자와 독자 모두를 자기 이해self-understanding로부터 탈중심화시키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자기 소외estrangement 훈련의 목적은, 우리가 겪고 있는 변형에 우리 자신을 더욱 개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소외는 그 시대의 어떤 징후들signs 속에서 이미 고지되었음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불투명한 채 남아있는 사건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사물의 질서》에서 이 사건이란 바로 푸코가 “‘인간’의 죽음”이라 부르는 것이며, 그 징후들은 머지않아 소멸할 ‘인간 과학’의 구조주의적 변이mutation 속에서 나타난다.

 

푸코의 기획에 가해진 여타의 흔한 반론 대부분 또한 에피스테메 개념에 대한 기술적descriptive 이해와 비판적 이해 간의 이 구별에 의해 답변될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반론이 [흔히] 제기되어 왔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사회를 특징짓는 특정 사유 체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참이라면, 고고학자가 과거의 사유 체계를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이 점에서 푸코의 기획은 자기반박적이라는 것이다.[13] 그러나 에피스테메에 대한 기술이 현재 또는 과거 세계에 관한 어떤 특정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임박한 변화를 보다 분명하게 특징짓고 나아가 촉진하기 위한 발견적heuristic 도구로 기능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유 방식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나아가 그러한 자기 소외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야말로 고고학적 기획의 목적 자체이다. 우리 자신의 과거 형태를 되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이미] 달라지고 있고, 극적인 변화의 문턱에 서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갖게 된다─비록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와 유사하게, 푸코는 변화의 과정을 신비화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두 에피스테메 사이에는 변이mutation가 있는데, 푸코가 이를 설명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보다 푸코는 변이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푸코가 변형의 사건들을 분석 범위 바깥에 둔 채 안정적인 체계들을 재구성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실제로는 정확히 그 반대이다. ‘사유 체계들’에 대한 그의 기술은 전적으로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의 변형 혹은 변이형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미셸 아미오에게 보낸 서한(최근 아르티에르 2009에 공간)에서 푸코는 자신이 ‘변형적 방법’을 활용했다고 주장했다. “제가 법칙 없는 불연속성을 정립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다만 경험적 불연속성에 대해 법칙으로 작용하는 변형들의 집합을 규정하고자 했습니다”.[14] 예컨대, 푸코는 자신이 쥐시외Jussieu와 퀴비에 사이의 불연속성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자신의 노력 전체는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명백한 변이를 한정하려는qualifying 시도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를 위해 그는 “단절의 양측에 있는 상태 A와 상태 B를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개의 “이론적 모델”을 재구성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푸코의 방법이 암묵적으로 역사적 실재reality를 순수한 변이형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가령, 푸코가 고전주의 시대로부터 질서에 관한 데카르트의 개념화conception를 취하는 것은 모든 고전주의 사상가가 실질적으로 그것을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고전주의 시대를 르네상스, 근대, 그리고 구조주의가 공존하는 변형 체계 내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의 질서》는 흔히 비난받아 온 것처럼 비합리주의적인 선언이기는커녕, 불연속성이라는 날것의brute 사실을 이해 가능한 변형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이다. 물론 이 책이 변이들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이는 적어도 보다 긴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며, 그 일이란 변이들을 제대로 기술하는 것, 즉 아미오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가 표현한 대로 “이행을 규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푸코 자신의 변화evolution가 때로 《사물의 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물의 질서》가 푸코 자신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고고학적 방법이 구조주의와 언어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을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반면, 이후의 푸코는 계보학 통념을 도입하여 이 패러다임을 넘어서고, 그러한 언어적 실천들─《사물의 질서》 당시 그의 분석을 제한했던─을 떠받치는 권력 관계들을 탐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푸코 자신이 언어의 패러다임에서 전쟁의 패러다임으로 이행했다고(FDE3, 145; EW3, 116), 게다가 《사물의 질서》에 결여되어 있던 설명적 틀을 제공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들뢰즈(1988)는 푸코의 작업에서 권력 통념의 도입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들뢰즈에 따르면,] 권력 통념의 도입은 언어적 세계를 ‘아래에서부터’ 형성하는 능동적 힘들을 기술하기 위해 언어 바깥으로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변형적 방법 그 자체를 급진화하려는 시도이다. [그 근거인즉,] 첫째, 계보학적 분석은 비교에 (말과 회화뿐만 아니라 제도와 몸짓까지) 더 많은 차원을 도입하되, 여전히 이 체계들을 차이적differential 실체─(해석Interpretation에서 재현Representation으로의 이행을 유사성Resemblance에서 질서Order로의 이행과 결부시키는 것과 같은) 일련의 상관적 변형들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로 재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둘째, 권력은 그 불안정성에 의해 특징지어지므로, 사물을 권력 관계의 관점에서 기술하는 것은 사물을 가장 높은 가변성mutability의 수준에서 기술하는 것이지, 이 불안정성을 어떤 토대적underpinning 필연성으로 환원함으로써 해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드레퓌스와 라비노우(1982)의 뒤를 이어, 예컨대 안(Han, 2002)처럼 《사물의 질서》는 자신이 기술하는 그 인간학적 패러다임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고고학적 방법은 언표들을 순수한 사실로 취급하는 것을 함축하며, 이로 인해 일종의 실증주의로 되돌아갈 위험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푸코의 담론은 언어가 의미에 의해 산출된다는 환상을 폐기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과학적 담론의 생산자로서 그 자신을 위해서는 이 환상을 지지해야 한다는 분열 속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러한 반론은 고고학을 객관주의적 과학 담론을 자처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에만 성립한다. 고고학을 비판적 훈련으로 이해한다면, 고고학자는 담론의 세계 속 중립적이고 초연한 관찰자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오히려 고고학자는 어떤 구조의 반복으로부터(이 경우, 인간학적 원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하고자 하는 전투적 정신이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사물의 질서》는 해석학과 실증주의 간의 대립을 우회하여 인간학적 원환을 풀어내려는 푸코의 시도로 읽힐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은 구조주의 속에서 그가 그 전제를 감지한 새로운 사유 방식에 대한 희망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그런 존재가 존재한 적 있다면) 사심 없는 과학자의 작업이 아니라, 열정적인 철학자의 작업이다. 푸코 자신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점에서 《사물의 질서》는 그의 작업 전체에서 크게 벗어난 예외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사물의 질서》가 극복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통상 제시되는 것과는 다소 다른 근거에 기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 저자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작업을 극복한다는 이 관념 자체가 진화론적 관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고고학적 방법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 아닌가? 자신의 작업에 대한 푸코의 환멸disenchantment은, 구조주의가 그의 세대에 대변했던 모호성ambiguity에 의해 더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질서》가 실제로 구조주의적 저작이며, 구조주의에서 무엇이 관건인지를 진단하기 위해 구조주의적 방법을 사용한다는 점에는 의심에 여지가 없다.[15] 그러나 1960년대 프랑스의 주요 사상가들 모두가 불과 몇 년 사이에 구조주의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거부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수용과 거부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그의 ‘해체’를 구성했던 데리다를 예외로 한다면). 동일한 양가성─찬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폐기의 대상이라는─으로 취급되어 왔다는 점에서, 《사물의 질서》 또한 구조주의에 속한다. 구조주의가 이처럼 양가성─그 정체성 자체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는─을 갖는 심층적인 이유는 아마 다음의 사실에 있을 것이다. 구조주의는 사건을 진단하기 위해 체계 개념을 사용했는데, 진정한 사건이란 체계의 구조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많은 독자들은 사건을 진단하기 위한 체계 개념의 사용이 변화를 환상으로 취급하는 데에 이른다고 믿었지만, 실제로 이는 그러한 변화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사물의 질서》는 이 동일한 오해의 희생자였다. 구조주의를 둘러싼 논쟁polemics을 뒤로 한 지금, 우리는 《사물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인지할 수 있다. 《사물의 질서》는 철학사에 관한 탁월한 기여일 뿐만 아니라, 푸코가 직접적으로 철학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은 유일한 저작이자 자신의 고고학적 방법을 스스로에게 적용한 유일한 저작이다. 《사물의 질서》가 보여주는 포부와 풍부함은 이 책을 20세기 사유의 기념비로 만들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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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물의 질서》라는 영역본의 제목은] 불어 제목(Les Mots et les choses, 말 그대로 『말과 사물』)과 다르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번역이 원제보다 저자의 의도에 충실하다. 푸코가 처음 선택한 불어본 제목은 사물의 질서L’Ordre des choses였으나 출판사로 인해 그 제목을 채택할 수 없었는데, 같은 제목으로 출판된 다른 책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옮긴이: 이 책은 한국에서도 『말과 사물』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나, 이 글의 제목이 ‘사물의 질서’이며, 글의 핵심을 이루는 표현인 만큼, OT로 축약 표기된 부분을 모두 《사물의 질서》로 옮겼음을 밝혀둔다.].

[2] 영어에서 ‘인간 과학’이라는 표현은 프랑스에서 통용되는 것만큼 널리 쓰이지 않지만, ‘사회 과학’ 통념과 대략 동일한 범위의 학문 분야를 포괄한다. 즉, 이 표현은 ‘자연 과학’과의 대립에 의해 정의되며, 언어, 문화, 사회 등 고유하게 인간적인 현상들에 관한 과학적 앎을 생산하려는 시도들을 포함한다. 《사물의 질서》에서 이 표현은 보다 특수한specific 의미로 사용되며, 주로 사회학, 심리학, 그리고 ‘문학과 신학의 과학’이라는 세 학문 분야를 포함한다─이 셋은 모두 19세기 말에 탄생한다(《사물의 질서》 10장 참조). 언어학과 경제학은 ‘인간 과학’에 고유하게 속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고유한 ‘인간 과학’이 이 학문들로부터 파생된 것인 한편, 민족학과 정신분석학은 이미 그러한 [‘인간 과학’의] 장 바깥에 위치한다.

[3] 이 대립은 역사에 적용된 실증주의적 방법에 대한 논쟁의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지게는 빌헬름 딜타이, 그의 뒤를 이은 막스 베버나 하인리히 리케르트 같은 사상가들,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가다머나 하버마스에 의해 19세기 말에 독일어로 처음 정식화되었다─자연 과학Naturwissenschaften과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 간의 대립. 이 대립은 현상학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인데, 이는 현상학이 이 대립을 정교화하고 확장했기 때문이다.

[4] ‘질서’에 대한 푸코의 이 같은 개념화는 카시러의 근대성 독해─특히 『구조와 기능(Structure and Function, 1923)』에서 전개된─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5] 앎에 대한 이와 같은 개념화가 실제로 데카르트 철학 및 포스트-데카르트 철학에서 지배적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굴절광학(Dioptrics)』에서 정신의 관념을 원근법적 그림─대상과 닮을 필요 없이 오직 엄밀한 투사의 규칙에 의해 대상과 관련되기만 하면 되는─과 비교한 것을 떠올려볼 수 있다. 혹은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things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윤리학』, 제2부, 정리7)라는 스피노자의 저 유명한 정리를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6] 고전주의 시대의 형이상학적 요건으로서의 연속체Continuum에 관해서는 OT, 224; FMC, 219 참조. “이 연속성의 원리 속에서 17세기와 18세기 사유의 형이상학 집약적 계기를 알아볼 수 있다”[옮긴이: 제6장 7절을 참고하라.].

[7] 최근에 비로소 출간된 이 학술 작업을 푸코가 생전에 출판하지 않은 것은, 이를 독립적인 에세이로 전환하라는 심사위원단의 조언을 따른 것인데, 그 결과물이 바로 《사물의 질서》이다.

[8] “따라서 그 존재상 무의식은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라캉 1988: 32). “무의식의 간극은 전前존재론적이라 할 수 있다 […] 그것은 존재론에 포섭되지 않는다. […] [그것은-마니글리에]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실현되지 않은 것이다”(1988: 30-31). [옮긴이: 불필요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본문의 인용은 무의식이 ‘존재의 차원’에서, 즉 존재자들 중 하나의 대상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는 반면, 각주에 인용된 구절에서는 존재/비존재의 이항 대립으로 포착할 수 없는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무의식을 구성하는 간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9] 여기서 진리와 주체성 간의 관계라는 이 문제가 푸코의 후기 저작에서 명시적으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점을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사실 “주체적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이 문제는, 그가 초기에 심리학에 보인 관심─《사물의 질서》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에서부터 후기에 윤리학에 보인 관심에 이르기까지 푸코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 중 하나이다.

[10] 《사물의 질서》 출간 당시 프랑스에서 발표된 주요 서평들이 최근 중요한 단행본으로 엮여 출판되었다. 아르티에르Artières 2009를 보라.

[11] 1966년 6월 15일 피에르 뒤마예Pierre Dumayet와 진행한 『말과 사물』 관련 인터뷰에서 푸코는 그의 작업이 자신의 문화에 관한 하나의 ‘민족지’라고 말한 바 있다. 해당 인터뷰는 온라인에 프랑스어로 공개되어 있으나, 내가 파악하기로 프랑스어나 영어로 정식 출간된 적은 없다. (http://www.ina.fr/art-et-culture/litterature/video/I05059752/michel-foucault-a-propos-du-livre-les-mots-et-les-choses.fr.html).

[12] ‘개념에 대한 인류학적 개념’의 이와 같은 정의에 대해서는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Viveiros de Castro) 2003 참고.

[13] 이러한 반론을 최초로 정식화한 이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아미오(Michel Amiot, 1967)이다. 이 텍스트가 특히 흥미로운 까닭은, 푸코가 이를 높이 평가하여 저자에게 직접 답신을 보낼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앞서 언급한 아르티에르의 텍스트(아르티에르 2009)에 아미오의 글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14] “On ne peut pas dire que j’ai établi une discontinuité sans règle, mais j’ai cherché à définir l’ensemble des transformations qui servent de règle à une discontinuité empirique”(Artières 2009: 137–138).

[15] 푸코는 1967년 튀니지에서 발표된 한 인터뷰(FDE1, no. 47)에서 이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여기서 독자들에게 상기시켜 둘 만한 점은, 이 ‘변형적 방법’이 바로 레비-스트로스가 『신화학(Mythologiques)』 4부작 전반에 걸쳐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