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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가 아닌 설득의 모험을 향하여

: 화이트헤드의 평화론에 관한 연구

 

 

박기형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1. 서론

 

 평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평화에 대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과 실천에 관한 논의는 인류의 오랜 과제였다. 하지만 평화에 관한 수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해 전 세계 각지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전쟁은 그 자체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특정 지역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지역 간 불평등을 조장하는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기후위기에 맞서 공동 행동에 나서야 할 때임에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 국가들 사이의 협력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전쟁이 문명의 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극단적 충돌이며, 그러한 대립 속에서는 문명이 조화로운 질서를 회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전쟁은 인류가 직면한 총체적 위기를 해결하기보다는 무질서를 야기할 뿐이다. 극단적 충돌이 벌어질 경우, 위기를 일으키는 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탐구, 원인을 바꾸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논의의 공간은 근본적으로 막혀버린다. 새로운 사회질서로의 전환은 평화로운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전쟁은 위기를 해소하기는커녕, 그 위기의 여파를 특정 국가나 지역, 공동체에 전가할 뿐이다. 화이트헤드는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진은 오직 평화에 다가가려는 각고의 노력 속에서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20세기와 21세기 들어 코소보 사태와 이라크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마주할 때마다 진보적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는 주제가 있다. 바로정당한 전쟁(Just War)’의 문제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과 그렇지 않은 전쟁(unjust war)을 구분하고 정의로운 전쟁을 긍정해야 한다고 본다. 가장 단순한 예로는 침략전쟁을 들 수 있다. 왈저는 전쟁의 폭력성과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침략당한 자들이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수행해야만 하고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 있다고 주장한다.[1] 마사 누스바움(Masa Nusbaum)도 자유나 인권처럼 보편적으로 따라야 하는 국제규범이 있으며, 이를 어기는 개별 국가들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는 전쟁은 세계시민주의의 관점에서 윤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 유엔과 같이 정당한 권위(legitimate authority)를 가진 국제기구가 인도주의적 개입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2] 정당한 전쟁에 관한 논의는 대부분 전쟁의 내용과 특성을 구분할 수 있는 정당성의 근거를 마련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 논의들 모두 전제하고 있는 것은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전쟁을 멈추고 평화로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선 그 전쟁에 맞서 힘으로 싸워 이겨야 한다는 명제다. 물론 정당한 전쟁에 관한 논의는 전쟁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전쟁에는 또 다른 전쟁으로 맞설 수밖에 없으며, 맞서야만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전론(正戰論)에 관해, 화이트헤드라면 뭐라고 답했을까?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수호하기 위해 무기를 지원해달라고, 단지 젤렌스키 대통령만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좌파 그룹[3]과 일반 시민들까지 호소하기도 한다. 극단적 폭력 앞에서 비폭력 저항과 평화라는 말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렇기에 그들의 호소가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 생존을 위한 절박한 외침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화이트헤드라면, ‘힘과 힘의 대결로 평화에 다가갈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나아가 정당한 전쟁을 수행해 승리하더라도, 전쟁이 끝난 뒤에는 사회질서가 완벽히 파괴될 뿐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전쟁만으로는 또는 전쟁 그 스스로는 결코 조화로운 질서로의 회복을 달성할 수 없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평화를 실현하는 건 전쟁이 아니라다른 무언가라고 주장한다. 본 연구에서는 바로 그 무언가가강제(compulsion)’가 아닌설득의 모험(Adventures of Persuasion)’임을 밝히고자 한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2. 유기체 철학의 존재론에 근거한 평화 개념 이해와 그 한계

 

이하에서는 화이트헤드가 평화를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원리로설득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음을 밝히고자 한다. ‘설득 개념을 중심으로 화이트헤드의 평화론을 살펴보는 작업은 크게 두 가지 목표를 지닌다. 우선, 현실적인 목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늘날 다시금 힘을 얻는 정전론에 맞서기 위함이다. 화이트헤드의 평화론은 전쟁과 같은 힘의 사용이 지닌 한계를 명확히 지적한다.

 

다음으로, 이론적 차원이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이 제시하는 평화 개념을 더 체계적으로 논의하려 한다. 주로 화이트헤드의 평화론은 유기체 철학이 제시하는 존재론에 근거해 설명되었다.[4] 화이트헤드는 우주의 존재들이 서로 긴밀히 상호의존한다고 봤다. 그렇기에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서는 상생(相生)의 가치야말로 우주에 자리한 모든 존재가 지향하는 바이다. 따라서 협화(協和)를 저해하는 것은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일이고 우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부당한 일이다. 달리 말해, 전쟁은 서로를 해하는 일이기에 올바르지 못하고, 평화를 통해 상생을 이룩해야 한다. 이런 존재론적 설명을 통해, 기존 연구들은 평화를 추구하는 걸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존재론에만 근거한 정당화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한계를 지닌다. 첫째, 평화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지를 논의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행동 규범을 제시하지 않았다. 평화는 올바른 것이니, 평화를 실현해서 올바른 사회질서를 회복하자는 동어반복을 외칠 뿐이었다. 그로 인해, 전쟁에 직면했을 때 힘이라는 수단을 활용하자는 주장이 대두하면, 이를 제대로 반박할 수 없었다. 둘째, 평화를 존재론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들은 『관념의 모험』에서 화이트헤드가 펼치는 평화에 관한 여러 논의 중 일부분만을 강조하였을 뿐이다. 이는유기체라는 존재론적 개념에만 치중한 나머지,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철학을 체계화하면서 강조했던사변철학(speculative philosophy)의 면모를 평화 개념과 긴밀히 연관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화이트헤드가 『관념의 모험』에서 제시하는 평화에 관한 논의를 사변 철학의 측면에서 조명함으로써 유기체 철학에 근거해 평화를 존재론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의 두 가지 한계를 보완하려 한다. 화이트헤드는 전통적인 사변 철학을 재해석하여관념(idea)’에 중요한 위상과 역할을 부여하려고 했다.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에서 화이트헤드가 수행하는 재해석 작업은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오스』에 대한 독해에 근거한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의 창조를 논하면서, 필연(아낭케, anankē)과 지성(누스, nous)의 대립과 결합을 존재의 생성원리로 제시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필연과 지성은 대립하나 지성이 필연을 설득함으로써 서로 결합하게 되고, 그 결과로 조화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 화이트헤드는 여기서 필연을 폭력(violence)의 의미를 담은(force)’으로 규정한다.

 

그럼으로써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힘은 왜 질서를 창조해내지 못하는가?”, 반대로지성은 왜 질서를 창조할 수 있으며 어떻게 창조해내는가?”. 이를 살펴본 후, 화이트헤드는 문명의 쇠퇴에 맞서 문명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는설득과 강제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나아간다. 화이트헤드의 논의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얘기한 바를 정리해보자.

 

 

3. 플라톤의 우주론에 근거한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

1) 화이트헤드의 사변 철학에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가 차지하는 위상

 

 화이트헤드는 지금까지 서양의 역사에서 두 가지 우주론이 지배해왔다고 말한다. 하나는 『티마이오스』에 담긴 플라톤의 우주론이고, 다른 하나는 17세기 근대과학의 우주론이다.[5] 근대의 철학자, 과학자들은 기계적 유물론에 근거해 필연적 인과성으로 우주의 생성과 질서를 설명하고자 했다. 화이트헤드는 근대과학이 자연에 관한 체계적 분석을 가능하게 했고, 이를 통해 현대 문명이 진보적인 성취를 이뤄냈음을 긍정한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17세기 이후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한 기계적 유물론은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the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그렇기에 양자역학과 같은 현대 과학의 성과를 반영하여 두 가지 우주론을 새롭게 쇄신시키고자 했다.

 

또한, 17세기 근대과학의 우주론은 자연에서 가치, 즉 목적을 배제한 나머지 인간과 자연이 존재들 간의 관계나 주변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고 그 결과로 언제나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생성되는 과정 자체를 무시하고 말았다. 목적이 없이는 우주는 창조와 진전 없이 반복과 쇠퇴만을 반복할 뿐이다. 우주가 다양성과 복잡성, 그리고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걸 포착하고 설명하기 위해선 우주론에 목적을 다시 도입해야만 한다.

 

이에 화이트헤드는 한편으로 플라톤의 우주론에 담긴 신화적 측면을 제거하는 대신 현대 과학의 성과를 반영해 재해석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필연적 인과성 개념을 제거하고 플라톤의 철학을 따라 목적론을 다시 도입해, 필연과 목적 간의 대립 및 결합을 우주 생성의 원리로 체계화하려 했다. 이는 근대과학이 오직 작용인만을 중시한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렇듯 화이트헤드는 17세기 근대과학의 기계적 유물론을 대신할 새로운 사변 철학, 즉 목적론에 근거한 우주론을 정립하고자 했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사변적 기획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근거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Willam Blake. The Ancient of Days, 1794

 

2) 플라톤 우주론의 핵심, 필연과 지성의 대립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고대 그리스의 신화를 차용해 우주의 생성을 설명한다. 이 대화편에서는 세 가지 단어가 중요하다. 데미우르고스(dēmiourgos), 지성(nous) 그리고 필연(anankē)이다. 우선, 데미우르고스는 우주의 창조자에 해당한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등장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자가 아니다. 마치 장인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재료를 갖고서 최선을 다해 자신이 목표한 것을 만드는 자이다. 플라톤은 우주의 제작자(poitēs)인 데미우르고스를 인격화해 설명하고 있다. 플라톤이 데미우르고스를 실재하는 인격적 존재로 보았는가에 관한 논쟁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자연의 생성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신화적 비유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다음으로, 데미우르고스는 무언가를 목적으로 삼으며 생성을 주재할 수 있는 지성(nous)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의 지성 개념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지성은 우주의 질서를 만들고 균형을 이루도록 해주는 원리(archē)이자 원인(aitia)이다.[6] 그래서 지성 그 자체를 인격화한 표현으로 데미우르고스를 이해할 수 있다. 데미우르고스는 우주를 생성하는 과정을 통해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매개하고 조화로운 질서를 제작해낸다. 하지만 데미우르고스는 전지전능한 창조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제작을 위한 재료 없이는 작업할 수가 없다.

 

플라톤은 근대과학이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필연을 정의한다. 여기서 필연은 그리스어로 anankē이며,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제작하는 데 필요로 하는 재료에 해당한다. 필연의 개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가장 종합적인 해석은 필연을 두 가지 층위로 구분하는 것이다. 플라톤 연구자들은 필연 개념을 논의하면서 필연을방황하는 원인(the wandering cause)’보조적 원인(the accessory cause)’으로 구분한다. ‘방황하는(planōmenēs) 원인으로서의 필연은 우주의 질서가 생겨나기 이전에 주어진 물질의 원초적 상태, 그리고 그것이 보여주는법칙성의 결여를 의미한다. 플라톤은 필연이 본성상 어떻게 우주의 생성을 일으키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천구의 생성 이전의 불, , 공기, 흙의 성질을 그 자체로, 그리고 그때의 이것들의 상태들(pathē)을 고찰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천구 생성 이전에 주어진 것들은무질서의 원천이며, 방황하는 성격을 지닌 것으로 규정된다.

 

데미우르고스는 그 자체만으로는 자기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무질서하고 법칙성 없이 운동하는 것들을 재료로 삼아 작업한다. 이 작업을 통해 데미우르고스는방황하는 원인으로서의 필연보조적 원인으로서의 필연으로 만든다. 여기서 장인의 비유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장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료가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특성을 안정적으로 지닐 때에만 자신의 작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데미우르고스는 주어진 재료를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에 맞게 활용할 수 있도록 그것들을 일차적으로 손질해야 한다. 이에 따라 필연의 두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방황하는 원인으로서의 필연은 창조에 선행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보조적 원인으로서의 필연은 창조의 산물이자 이후에 이어질 창조의 원인 중 하나다.

 

플라톤의 우주론에서 지성과 필연은 대립한다. 지성은 질서의 원리인 데 반해, 필연은 무질서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립은 질서화의 과정에서 해소된다. 달리 말해, 무질서한 것들이 지성에 의해 질서 지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지성만으론 균형 잡힌 질서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지성은 조화로운 상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이 실현되기 위해선 어떠한 재료들이 필요하다. 균형을 실현하기 위한 재료가 지성에게 주어져 있어야 한다. 지성은 재료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다듬을 수 있고, 그걸 바탕으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방황하는 원인으로서의 필연이라는 재료는 지성의 작업에 있어서 필요조건을 이룬다. 곧 지성은 필연 없이는 자신의 원리를 펼쳐낼 수 없다. 반대로 필연 또한 지성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생성할 수 없다. 필연 혼자서는 오직 반복과 쇠퇴만이 가능할 뿐이다. 필연과 지성의 만남 속에서만 창조적 전진이 이뤄질 수 있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필연은 근대과학이 제시하는 단순한 인과 법칙, 즉 작용인의 필연성으로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플라톤에게 필연은 가치를 언제나 함축하는 개념이다. 플라톤의 우주론에서 필연과 지성은 대립하나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다. 둘이 서로 결합하여 우주를 생성하는 원리를 구성한다. 요컨대, 우주의 생성 과정은 데미우르고스로 표상되는 지성 그 자체가 수행하는 작업이다. 그 작업은 가치(value)와 사물(matter)의 결합 또는 목적인(final cause)과 작용인(efficient cause)의 결합을 통해 이뤄진다. 

 

4. 필연에 대한 지성의설득과 그 한계

 

 필연과 지성의 결합(systasis)을 가리켜, 플라톤은필연에 대한 지성의 설득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지성은 필연을 설득하여 조화로운 질서를 생성한다. 그런 점에서 지성의설득(persuasion)’은 우주 생성의 근본적 원리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우주의 생성은 필연과 지성의 결합에서, 그 혼합의 결과로서 일어났으며, 지성은 필연으로 하여금 생성되는 것들의 대부분을 최선의 것을 향해 이끌고 가도록 설득함으로써 필연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이런 식으로 그리고 이에 따라서 필연이 슬기로운 설득에 승복함으로써 태초에 이 우주가 이렇게 구성되었습니다(47e~48a).”[7] 그렇다면, 지성이 필연을설득한다(persuade)’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1) ‘설득의 세 가지 특성

 

한국어판 『티마이오스』의 옮긴이 중 한 사람인 김영균은 다음과 같이 설득 개념의 특성을 설명한다. 첫째, 플라톤에게 설득은 강제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강제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상태를 무시하고 억지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설득은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능력이나 상태를 무시하지 않는다.”[8] 김영균은 플라톤 연구자인 콘포드(F. M. Conford)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설득의 이러한 특성은 데미우르고스의 작업을 묘사하는 데 적합하다고 강조한다.[9]

  앞서 살펴보았듯이, 데미우르고스는 장인 또는 제작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재료의 힘과 성질들을 이용한다. 지성으로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재료를 일차적으로 다듬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주어진 재료들의 힘과 성질에 반하는 식으로 다듬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인은 재료에 자신의 목적을 일방적으로 강제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지닌 능력과 상태를 받아들이면서 최대한 자신에게 맞게 변용한다. 이게 설득의 첫 번째 특성이다. 이러한 특성은 설득의 한계를 규정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둘째, 플라톤은 설득 개념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생성될 수 있는 대상에만 사용한다. 김영균은 박홍규의 논의[10]를 인용하면서, 설득의 대상은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앞서 언급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대화 중 47e~48a의 대목에서최선의 것으로 향해 이끌고 간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데미우르고스나 지성이 필연을 설득할 때, 설득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함축한다. 지성이 필연을 설득한 결과로 생성이 이뤄지는데, 그때 더 좋게 혹은 더 나쁘게 생성이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다.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가 그에게 원초적으로 주어진 물질에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이러한 설득 개념의 두 번째 특성을 은유적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우주가 질서를 갖게 되도록 하는 일이 착수되었을 때, , , 공기, 흙이 처음에는 이것들 자체의 어떤 흔적들(inchnē)을 갖고 있었으나, 이는 마치 어떤 것에서 신이 떠나 있을 때 모든 것이 처함직한, 그야말로 완전히 그런 상태에 처하여 있었는데, 그때는 바로 이런 성질의 것들이었던 것들을 신이 최초로 도형들과 수들로써 형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53b-1).” 여기서 우리는 데미우르고스가 개입하기 이전에도 데미우르고스에게 주어진 재료들, 즉 필연에 해당하는 물과 불, 공기, 흙이라는 4원소의 흔적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물론 흔적이기에 4원소라고 부를 정도로 완전해진 상태는 아니지만, 4원소에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흔적들에 데미우르고스가 수와 형태들을 이용해서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은 완전한 혼돈 상태, 완벽한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성이 부여하는 질서를 수용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흔적들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흔적이 지닌 특성을 따르되, 최악이 아닌 최선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플라톤이 지향하는 조화로운 우주의 생성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우주론에서 설득은 아무것도 없는 공백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우선 설득은 필연, 즉 주어진 것의 특성을 따르고존중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설득은 주어진 것이 지닌 가능성을 지성이 목적하는 최선의 것에 다가갈 수 있도록이끄는것이다. 또한, 필연에 대한 지성의 설득은 김영균이 모로우(G. R. Morrow)의 논의를 인용하며 강조하였듯, 단번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단계적으로이뤄지는 것이다.[11] 이러한 단계적 과정이라는 세 번째 특성은 방황하는 원인으로서의 필연과 보조하는 원인으로서의 필연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작업에 적합하게 재료를 다듬는 과정이 항상 동반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김영균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는 처음에는 방황하는 원인의 지배를 받는 물질의 원초적 상태를 설득해서 기하학적 질서를 갖춘 4원소를 만든 다음에, 이렇게 특정한 구조를 갖고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물질들을 적합한 방식으로 선택하고 결합해서 좋음을 창출하고자 한다.”[12] 정리하자면, 플라톤의 설득 개념은설득 대상의 특성에 대한 존중, ②최선의 방향으로의 이끎, ③단계적으로 해나가기라는 세 가지 특성을 갖는다.

 

 

2) 설득의 한계와 지성의 기술

 

 설득의 세 가지 특성 중 첫 번째 특성 덕분에 필연과 지성의 결합이 가능하다. 하지만 반대로 설득은 이 특성으로 인해 한계에 부딪힌다. 장인이 우주의 모든 존재를 그 성질에위배되지 않게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지성은 자신의 목적에 비추어 (필연에 해당하는) 질료에 형상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질료 자체를 완전히 통제할 순 없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필연에 대한 지성의 설득에는 근본적인 제약이 뒤따른다. 어떤 재료가 장인에게 주어지는가에 따라 장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질서가 제한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설득이 이뤄지는 토대와 다름없다. 이를 가리켜, 플라톤은필연이 지성의 설득에 저항할 수 있다고 표현한다. 플라톤의 우주론에서 필연은 비결정과 무질서의 원리를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지성과 대립하고 있다는 걸 상기해보라. 그런 점에서 필연은 지성의 재료이자 우주 생성의 필요조건이지만, 결정의 원리를 일정한 수준 내에서 제한하기도 하고 질서화하는 과정에 저항하기도 한다. 따라서 지성이 필연의 저항에 맞서, 얼마나 성공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가 우주의 생성이 조화와 균형이라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가 그 여부를 결정한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연구한 모로우(G. R. Morrow)는 설득 개념을 가리켜지성의 기술이라고 명명했다.[13] 이 표현을 빌리면, 지성이 얼마나 설득의 기술을 잘 발휘하는가가 균형 잡힌 질서의 생성을 좌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어떤 재료가 지성에게 주어지는가에 따라서도 우주의 창조 과정이 달라진다. 따라서 필연은 지성이 설득할 수 있는 정도를 미리 그리고 근본적으로 제한한다. 필연이 설정하는 한계, 즉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지성의 기술이 행사될 수 있다.

 

이렇듯 필연에 대한 지성의 설득은 주어진 여건의 특성을 거스를 수 없다. 만약 그 조건을 거스르려 한다면, 설득이 아닌강제가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지성은 필연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가능한 한계 내에서필연을 설득한다. 설득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가능하며 그 한계 밖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만약 지성이 목적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 필연을 위배한다면, 강제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설득의가능한 한계는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그에 대해서 플라톤은 더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는다. 대신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의 창조 작업 속에서 우주의 질서가 조화와 균형에근접해간다고 말한다. 지성이 제시하는 최선에 최대한으로점점가까워지는 것이다. 이제 가까워져야 할 점근선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질문으로 떠오른다. 무엇이 최선인가를 묻고 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균형과 조화의 가치를 담은이상을 정립하는 게 지성에게 과제로 주어진다. 설득의 기술은 그러한 이상에 기초해 행사된다. 

William Blake. Newton, 1795-c1805

 

5. 강제가 아닌 설득으로

 

 지금까지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평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대화편 『티마이오스』에 담긴 플라톤의 우주론을 살펴보았다. 화이트헤드는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논의한 설득과 이상 바로 그 두 가지에 기초해 평화에 관한 논의를 『관념의 모험』에서 전개한다. 아래에서는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의 논의를 어떻게 재해석하면서 받아들이는지를 강제와 설득의 대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럼으로써 전쟁을 지양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논리를 어떻게 구축해가는지 확인해보자.

 

 

1) 무분별한 작인들과 문명의 흥망성쇠

 

 화이트헤드는 플라톤의 필연 개념을 힘(force)의 관점에서 수용했다. 그럼으로써 힘이 작용하는 양상을 구분하고 그 차이를 포착하려 했다. 플라톤은 무질서한 것을 가리켜 필연이라 불렀는데, 화이트헤드는 질서화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해무분별한 작인들(senseless agencies)’이라는 용어로 대체했다. 무분별한 작인들은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대체로 상호 간에 조정되어(with a general coördination) 나타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간헐적으로 돌발하여 혼란스럽게 나타나는 경우. 화이트헤드는 전자를강제(compulsion)’, 후자를폭력(violence)’으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 인간 공동체에서 강제는 의식주와 같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생존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필요한 사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인간 공동체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폭력의 대표적 사례는 전쟁이다. 이러한 강제와 폭력 두 가지를 합쳐서, ‘이라고 부른다.

  그런 다음 화이트헤드는 힘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서 각 시대의 문명이 흥망성쇠하는 원리를 규명한다. 화이트헤드의 역사철학은 필연과 지성의 대립과 결합이라는 플라톤의 우주론을 인간과 인간들이 이룬 사회에 적용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는 데미우르고스의 우주 생성 작업을 인간이 본받아야 한다고 한 플라톤의 주장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실증주의 역사학을 거부하는 입장, 이른바 비판적인 입각점(stand point)에 서서 자신의 역사철학을 전개한다. 그는각 시대의 특징적인 강제와 폭력의 유형을 보여주는 것을 역사학의 한 가지 과제로 규정한다.[14]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각 시대의 문명은 이전의 질서를 계승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분별한 작인들에 직면하기도 한다. 각 시대의 문명에 내재한 어떠한 행위와 정서의 패턴이 사라진 경우에는 무분별한 작인들이 충분히 질서화되지 못한다. 그러면서 강제 또는 폭력이 발생한다. 결국 질서화되었던 문명이 균형을 잃어버린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새로운 일련의 습관들이 점차 생겨난다. 하지만 이전의 패턴으로부터 새로운 패턴으로 이행하는 시기 사이에는 일종의 무질서한 지대가 있다. 그건 일시적인 위기일 수도 있고, 장기간의 혼란일 수도 있다. 이렇게 힘은 강제나 폭력의 형태로 무질서를 야기하면서, 쇠퇴하는 문명을 위기나 혼란에 빠뜨린다.

 

 

2) 쇠퇴하는 문명과 강제

 

 화이트헤드는 『관념의 모험』에서 각 문명이 경험한 강제와 폭력의 사례를 반성적으로 검토하면서, 문명이 조화롭고 균형 잡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논의한다. 이는 제5힘에서 설득으로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된다.

 

 “우리는 문명화된 공동체가 두 종류의 강제성과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는 식량, 따뜻함, 주거 등과 같은 자연적 필요사항이 있다. 또한 사회활동을 조정할 필요성도 있다. 이러한 조정은 부분적으로는 양식의 섬광으로 유지되는 본능적 습관에 의해 이루어지고, 부분적으로는 다른 공동체 성원이 행사하는 강제성에 의해 이루어지며, 또 부분적으로는 이성적 설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성적인 설득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보다 고도의 정신활동과 섬세한 감정이 행사, 항유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15]

 

 인간 공동체는 일정한 질서를 갖추고 문명화되었다. 하지만 문명화되었다고 해도, 플라톤이라면 보조적 원인으로서의 필연이라고 불렀을강제두 가지에 노출된다. 하나는 의식주와 같은 자연적 필요성에 해당하는 강제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 성원들 사이의 사회적 활동을 조정할 필요성이라는 강제다. 두 필요성 (또는 강제) 모두 기본적으로는 본능적 습관에 의해서 조정이 된다. 무분별하게 우리가 맞닥뜨려야 했던 필요성들이 일련의 습관을 통해 질서화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식주에 관한 문화, 공동체의 관습이 자연스레 생겨난다. 이에 근거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공동체 성원들은 소속된 공동체의 문화와 관습을 언제든 위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 공동체는 그것들을 상징적 법제도로 규범화한다. 위에서 인용한 문구에 따르면, 공동체 성원들이 다른 구성원들의 의사나 특성 등을 거스르면서 공동체의 문화와 관습을 강제한다. 이 강제는 언어로 명문화되어 법률로 정립되거나, 교육을 통해 생활 속 금기나 규칙으로 내면화된다.

 

그러나 강제는 힘으로 다른 구성원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다른 구성원들과의 상생과 협화를 위협할 수 있다. 또한 다른 구성원들의 지성과 감정을 충분히 실현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래서 강제는 이전에 성립된 관습, 규범, 법률, 금기, 규칙 등을 지키고 이행하도록 하는 것에는 효과적이나, 그것들이 과연 최선의 것인지를 반성하고 최선의 것에 가깝도록 이끄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힘의 기술은 쇠퇴하는 문명을 다시 진전시키는 데에 유용하지 않다. 힘의 기술만으로는 조화와 균형을 회복할 수 없다.

 

 

3) 문명의 회복을 위한 설득의 모험

 

 질서화를 이뤄내는 일련의 조정은 강제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앞서 인용한 대목에서 화이트헤드는부분적으로 이성적 설득에 의해서도 이뤄진다고 말한다. 설득은 다른 성원의 의사나 특성을 위배하지 않는다. 대신 설득은 지성이 추구하는 목적을 다른 성원들의 의사나 특성에 맞게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려 한다. 그래야만 다른 성원들의 억누르거나 제거해버리지 않고서, 그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성이 추구하는 목적을 최선의 것에 가깝게 구현하기 위한 상상의 작업이 중요하다. 플라톤에게는 이데아, 화이트헤드에게는 관념(idea)이 추구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화이트헤드에게 관념은 상징적 체계로 구체화된다. 그러한 상징적 체계에 의해서 우리는 공동체를 조직하고 그 공동체를 조화와 균형의 가치에 도달하도록 이끌 수 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공동체의 상징적 체계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인류는 상징적 전이의 정교한 체계에 의해, 멀리 떨어져 있는 환경과 불확실한 미래를 감지하는 기적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각각의 상징적 전이가 부적절한 특성을 자의적으로 도입할 수 있다는 위험한 사실 때문에 대가를 지불하기도 한다. 어떤 유기체에서든 그 본성의 단순한 작용들이 모든 점에서 그 유기체의 생존이나 행복 또는 그 유기체가 속해 있는 사회의 진보에 보탬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우울한 경험은 이런 경고를 진부한 것으로 만든다. 정교한 유기체들의 그 어떤 정교한 공동체도 그 상징활   동의 체계가 일반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한, 존재할 수 없다.”[16]

 

인간 공동체는 공간적으로 다른 환경에 그리고 시간적으로 먼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불확실성에 노출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모두 필연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간 공동체에 새롭게 질서화해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인간 공동체가 기존의 상징적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지만 한다면, 자신의 생존과 행복 그리고 진보를 계속 추구할 수 없게 된다. 그건 과거 문명화된 인간 공동체들의 흥망성쇠 사례 속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상징적 체계의 반성적 평가와 그에 기초한 쇄신을 주요한 문명의 과제로 제시한다.

 

 “문명의 획기적 진보는 - 어린애가 손에 쥔 화살처럼 - 그 진보를 낳은 사회 를 거의 해체시키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사회적 지혜의 첫걸음이다. 자유로운 사회를 존식시키는 방법은 첫째로 상징적 법전을 보존하는 것이고, 둘째로 그 상징적 법전이 계몽된 이성을 충족시키는 그런 목적들에 언 제나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필요할 경우 주저 없이 그 법전을 개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징들을 존중함과 동시에 그것들을 자유롭게 수정할 수 없는 사회는, 무정부상태가 원인이 되었든 아니면 무익한 환영의 압제에 따른 생명력의 점차적인 위축이 되었든 궁극적으로 쇠퇴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17]

 

  상징적 체계의 변화는 인간 지성이 관념의 모험을 감행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물론 인간 지성은 필연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할 수 있다. 무질서와 무법칙성에 직면해 위기와 혼란을 겪을 수 있다. 더욱이 주어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 제대로 된 새로운 상징체계를 도출하지 못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간 공동체의 관념은 최선의 것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나, 언제든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화이트헤드는 관념의 모험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최소한 문명이 야만으로 쇠퇴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념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갖 오류를 통해서 점진적 으로 행위가 정화되어가는 역사이기도 하다. 바람직한 질서가 발전적으로 전개되어가고 있을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품고 있는 관념의 작용이 강화됨으로써 야만적인 것으로 퇴행하지 않도록 제어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18]

 

 화이트헤드는 최소한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인류가 최선의 것에 점진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인류가 진리, 아름다움, 평화를 지향할 수 있다고 긍정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지성에 의거하여 설득에 호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은 실현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 만약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 방향이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가능성이 없다면 필연의 강제에 속절없이 따를 수밖에 없다. 즉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인간은 그러한 가능성을 안고 있기에 자유롭다. 자유롭게 인류가 속한 공동체, 우주를 창조적으로 전진시킬 수 있다. 창조적 전진 속에서 비로소 인류의 자유가 실현된다. 그러나 인간 공동체가 설득이 아닌 힘에 의존하는 순간,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며 문명은 최선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인간의 가치는 설득에 호응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좋은 것과 나쁜 것 가운데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설득할 수도 있고 설득될 수도 있다. 문명은 보다 고상한 선택을 구현함으로써 그 자체에 내재 하는 설득력에 의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아무리 불가피하다고 할지 라도 힘에 의존한다는 것은 일반 사회에 있어서나 개인의 생존에 있어서나 문명의 파탄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생기 있는 문명에는 언제나 불안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관념에 대한 감수성은 호기심, 모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적인 질서는 그 자신의 장점에 의해 존속하며, 그 결점을 인지하는 능력에 의해서 변형된다.”[19]

 

 그리고 설득은 지성의 기술로, 행사될 때마다 강제와 달리 공동체 성원들의 정신활동과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그럼으로써 지성이 최선의 것을 향해 갈 수 있는 보다 나은 환경이 조성된다. 설득은 인간 공동체의 문명이 쇠퇴할 가능성을 낮추고 위기나 혼란에 직면했을 때 조화로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모든 점에 비춰볼 때, 결론적으로 설득은 강제보다 유용하다.

 

 그렇다고 강제에 아무런 유용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지성의 우주 생성 작업에 필연이 반드시 전제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문명의 회복과 진보에도 언제나 강제가 포함된다고 본다.

 

 “법규나 행동의 규칙이나 예술의 규범은 유리한 상징적 상호 연관을 대체로 뒷받침해줄 체계적 행동을 강제하려는 시도들이다. 공동체가 변함에 따라 이 와 같은 규칙이나 규범들은 이성의 빛에 비추어 수정될 필요가 있다. 이때 목표가 되는 것은 두 가지다. 그중 하나는 공동체를 그 구성원인 개인들에게 종속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들을 공동체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이 만든 규칙에 복종한다. 이런 규칙들은 사회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상징활동과 관련된 행동을 사회에 부과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20]

 

 그럼에도 강제는 그 자체로 남겨져 있으면 안 된다. 필연이 지성의 필요조건인 것처럼, 강제에는 지성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강제는 아무런 질서를 산출할 수 없거나 오직 쇠퇴에 맞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화이트헤드는체계적 행동을 강제하려는 시도들인 규칙과 규범은언제나 이성의 빛에 비추어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수정된 규칙과 규범이 다시 공동체 성원들에게 강제된다. 우리는 강제와 설득, 필연과 지성의 결합이 문명화된 인간 공동체를 유지, 운영, 진전시키는 원리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유의해야 할 것은 그러한 결합에서 언제나 지성의 점진적 이끎, 존중하는 개방적 태도에 근거한 설득, 최선의 것에 대한 관념과 이를 정립하기 위한 구상과 토론 그리고 실천이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 없이는 결합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연과 강제의 저항을 제어할 수가 없다. 필연의 저항이 거세지면 강제만이 남게 된다. 그렇게 강제가 반복되다가 결국에는 어떠한 우발적 계기로 전쟁과 같은 폭력이 문명을 위협하여 위기와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Käthe Kollwitz. The Mothers (Die Mütter), 1922–1923

 

6.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설득 개념이 화이트헤드의 평화론에서 핵심적임을 확인했다. 화이트헤드의 평화론은 문명의 회복과 창조적 전진을 위해 설득의 모험, 관념의 모험을 떠날 것을 요청한다. 사변 철학의 우주론에서 제시되는 설득 개념은 유기체적 존재론을 뒷받침한다. 상생과 협화가 이뤄지기 위한 조건과 원리가 바로 필연과 지성의 결합, 강제와 설득의 결합이다. 그렇다면, 설득 개념에 기초한 화이트헤드의 평화론은 오늘날에 어떤 함의를 가질까?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경제위기, 기후위기, 전쟁위기 등이 만연해있다.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독립된 인격체로 상정된 각각의 주권 국가들은 서로 갈등하고 유무형의 무력을 동원하며 충돌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국제정치학에 접목한 에롤 E. 해리스는 『파멸의 묵시록(Apocalypse and Paradigm)[21]이란 책에서 17세기 이후 뉴턴패러다임에 과학과 일상의 사유양식이 사로잡힌 나머지 주권국가 체계를 넘어선 새로운 국제질서를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기후위기와 전쟁, 불평등에 맞서 평화에 다가가기 위해선 모든 인간 공동체가 상생할 수 있는 세계적 차원의 공동정부와 세계시민, 공동의 정치적 질서와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주권국가들의 연합체인 국제연합만으로는 국제질서의 평화에 점근적으로 다가갈 수 없다. 국제연합 자체가 어느 한 주권국가에 의해 독점될 수도 있고, 만약 국제연합이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춘다고 하더라도 지정학적 분쟁은 주권국가들 사이의 문제이기에 주권국가가 존재하는 한 전쟁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해리스의 제안은 분명 경청해야 할 얘기다. 새로운 국제질서를 세우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는 주권국가들 간의 사회계약 체결이 대표적으로 논의되었다. 과거에는 칸트가 『영구평화론』[22]에서 논의했고, 이를 존 롤즈가 『만민법』[23]에서 이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오늘날의 국제법 체제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해리스는 이러한 국제법 체제 또한 여전히 뉴턴적 패러다임에 갇혀 독립된 원자들, 각기 분리된 주권 국가들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것들의 모임을 논의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해리스는 주권국가가 없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모습과 작동원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진 않는다. 다만, 그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 그친다. 이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국제질서에 관한 논의에서 핵심적인 또 다른 문제는 주권국가들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새로운 국제질서가 모색되고 그러한 구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가다. 주권국가가 없는 국제질서를 상상하든, 주권국가들 간의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의 확립하는 방안을 논의하든, 주권국가들 사이의 규칙과 규범을 평가하고 쇄신하든, 다양한 수준의 국제질서 변혁 논의는 결국 위와 같은 질문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화이트헤드가 제시하는 평화론이 실천적으로 유용한 지침을 제공해준다.

 

지금의 국제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정당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국제연합에 의한 인도적 개입을 요청할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전쟁을 중단하기보다는 지속하는 걸 전제한다. 여기가 바로 정전론과 화이트헤드의 평화론이 대치하는 지점이다. 화이트헤드의 평화론은 강제와 설득의 결합을 제시하면서, 강제가 아닌 지성에 의한 필연의 설득을 강조했다. 설득이 상징적 체계인 법제도를 쇄신하고 조화로운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데 유용하며, 우주 생성의 원리상으로도 문명의 회복과 전진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강제는 문명의 유지만 가능하게 해줄 뿐이며, 어떤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폭력으로 이어져 쇠퇴하는 문명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라면, 전쟁에 전쟁으로 맞서는 것에 반대하고, 전쟁을 중단하고 사회질서를 회복할 설득의 모험을 어떻게든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화이트헤드의 평화론이 설득이라는 유용한 수단, 지향해야 할 가치를 제시한 것에 중요한 의의가 있으나, 설득의 모험에 내재한 한계 또한 분명하다. 앞서 살펴보았듯, 필연은 지성에 저항할 수 있다. 설득은 강제를 완전히 대신할 수 없다. 더욱이 강제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어떠한 주어진 조건과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설득이라는 지성의 기술은 자신의 유용성을 펼칠 수 없다. 설득이 무력해지는 것이다.

 

더욱이 설득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한다면, 설득의 기술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논의되어야 한다. 설득이 가치 있고 유용한 수단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해서 설득을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문명화된 인간 공동체의 경우, 설득의 대상이 되는 공동체 성원들이 지닌 의사와 특성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설득의 내용과 방법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 설득하기 전에 설득이 이뤄지는 상황과 조건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공동체 성원들의 의사와 특성조차 완전히 투명하게 알려지지 않기에, 이 파악부터 쉽지 않다.

 

또한 공동체 성원들이 기존의 상징적 체계에 대한 평가나 쇄신 방안에 반대하고 나설 때, 어떻게 설득을 이어가야 하는가? 기존 상징적 체계가 토대로 하는 일상적 사유양식과 과학적 패러다임을 공동체 성원들이 깊숙이 내면화하고 있다면, 이를 바꿔내는 건 지난하고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최선의 것을 향해 단계적으로 차근히 점진적으로 이뤄내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다 완전히 설득 자체가 없던 일로 되돌아가는 사태가 우연찮게 돌발하는 작인들에 의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면, 강제와 폭력이 설득의 자리를 대체해버릴 수 있다. 그렇게 조화로운 문명을 위한 관념의 모험은 언제나 전진과 후퇴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화이트헤드는 관념의 모험이 오류에 부딪힐 수도 있고 실패할 수 있다고 인정하며,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가며 점근해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설득이 평화에 기여하는 바를 밝히는 일에, 즉 설득의 가치를 드러내는 작업에 머물고 있다. 앞으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화이트헤드가 요청한 관념의 모험을 더 밀고 나가야 한다. 필연이 부과하는 지성의 한계, 강제에 제압당할 수 있는 설득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더 세밀한 고민이 필요하다. 나아가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립할 상징적 체계, 즉 법제도와 문화, 규범 등을 구상하고 이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해야 한다. 그러한 치열한 실천들 가운데서 문명의 창조적 전진이 이뤄지고, 언젠가 평화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1] Walzer, Michael, Just and unjust wars: A moral argument with historical illustrations, NY: Basic Books, 2006.

[2] 마사 누스바움.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 마사 누스바움 외 지음. 조유아 코언 편집. 오인영 옮김. 2003.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한계 논쟁』. 서울: 삼인.

[3] 옥사나 두차크, 파비안 비조츠키 인터뷰. 한상원 옮김. “우크라이나의 진정한 평화는 오직 러시아의 변화를 통해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 협상은 전투를 멈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가능할 것인가?”

   출처: 웹진 인무브, https://en-movement.net/336?category=1028202

[4] 정연홍. 2008. “A. N. 화이트헤드의 평화사상『철학논총』 제51집 제1, p.265-280; 정연홍. 2013. “평화에 대한 A. N.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적 성찰『철학논총』 제74집 제4, p.505-521

[5] 김영진. 2009.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의 위상 -형성적 요소를 중심으로-” 화이트헤드연구 제19, p.2

[6] 김윤동. 2016. “플라톤의 ‘nous’ 개념 - 「티마이오스」편을 중심으로 -”. 『철학연구』 제137, p.113-114

[7] 플라톤 지음. 박종현·김영균 옮김. 2000. 『티마이오스』. 서울: 서광사.

[8] 김영균. 2015.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에서 필연에 대한 지성의 설득”. 『동서철학연구』 제78, p.450

[9] Conford, F. M., 1937, Plato’s Cosmology : the Timaeus of Plato, London: Routledge.

[10] 박홍규. 1995. 「티마이오스의 필연에 대한 Archer-Hind의 견해를 음미함」. 박홍규 전집 1 『희랍철학논고』. 서울: 민음사.

[11] Morrow G. R., 1965, “Necessity and Persuation in Plato’s Timaeus”, in R. Allen(ed.), Studies in Plato’s Metaphysics, London: Routledge ; 김영균. 2015. 위의 논문, p.453 재인용

[12] 김영균. 2015. 위의 논문, p.453

[13] Morrow G. R., 1965.

[14] A. N. 화이트헤드 지음. 오영환 옮김. 1996. 『관념의 모험』. 파주: 한길사. p.49-52

[15] 위의 책, p.138

[16] A. N. 화이트헤드 지음. 문창옥 옮김. 2003. 『상징활동 : 그 의미와 효과』. 고양: 동과서. p.103

[17] 위의 책, p.104

[18] A. N. 화이트헤드. 1996, p.77-78 (번역 일부 수정)

[19] 위의 책, p.154-155 (번역 일부 수정)

[20] A. N. 화이트헤드. 2003, p.103

[21] 에롤 E. 해리스 지음. 이현휘 옮김. 2009. 『파멸의 묵시록 : 과학적 패러다임과 일상의 사유양식』. 부산: 산지니.

[22]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2008. 『영구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 파주: 서광사.

[23] 존 롤즈 지음. 장동진·김기호·김만권 옮김. 2000. 『만민법』. 서울: 이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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