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금요일의 시방] 이연주의 시전집을 읽고 

 

 

길혜민(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문제는 맨몸으로 기도문 한 구절 없이 버티는 용기와 저항의 힘이란다. 

                                                               「신생아실 노트」 중에서

 

 

벌써 시방을 시작한지 1년이 넘었다. 작년, 오션 브엉의 시집을 읽고 작은 에세이를 한편 쓰고 나서 다음 에세이는 이연주의 시전집을 대상으로 글을 쓰겠다고 생각한 것은 1년이 넘은 마음인 것 같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끝나지 않은 박사논문 때문에 여러 논문을 읽고 계속해서 확장성을 얻어나가려는 의욕에 충만했던 것 같다. 그때 마침 내가 꽂혀있던 소재는 1980년대 여성시인들의 작품에서 일종의 ‘궁핍상’ 같은 것이 비춰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시인들이 궁핍하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한 표현 같다. 그 시대 특유의 불결함에 대한 천착, 내면의 불안이 주거지의 불안과 닮아있는 형상, 굶주림에 대한 강조 등이 내가 ‘궁핍상’이라 생각한 것들과 연결된다. 이러한 정리만으로 이연주와 1980년대 여성시인들의 닮은 부분을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최승자 키즈’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우리의 대부분은 한용운, 윤동주, 김소월의 작품이 실린 교과서나 교양서를 통해서 ‘시’라는 갈래를 처음 만났다. 윤동주의 참회, 한용운의 사랑과 절제, 김소월의 우리말에 대한 감각 등이 국어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넓혀주는 경험이라 간단히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최승자를 알게 되면서 시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더 깊이 그 안에 빠져들고 싶다는 생각에 든다. 그런 사람들이 ‘최승자 키즈’라고, 이연주 시전집을 읽고 시방에서 말했던 것 같다. 왜 이연주의 시집을 읽으며 ‘최승자 키즈’를 운운하게 되었을까. 

 

최승자 시인

 

이 글은 이연주 시전집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연주 시인이 ‘최승자 키즈’일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동시대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함께 작품을 음미해볼 이유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연주와 최승자 모두 ‘불결함에 대한 천착’이 강하게 두드러진 시인이라 생각한다. 또한 내면의 불안이 여성의 거주 불안과 함께 나타나고, 더하여 여성의 가난이 그들의 중요한 시적 모티프로 부각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1980년대라는 상황 속에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연주의 시집이 1990년대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엄연히 출간 시기로 따지면 1990년대 시인이라고 하는 편이 상식적이다) 이를테면 이연주 시인이 보기에 여성은 가난하기도 하지만 가난하지 않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즉 계급이 여성의 가난을 결정하는 중요한 심급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가난하고 누군가는 걱정이 없을 수 있다. 

 

 

난 걱정 없어요

고단위 비타민을 먹지요

빈혈약을, 모든 기관이 튼튼해지는 약을 

병균에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매일 적당량의 항생제도 먹다마다요

난 염려 없어요, 우리집 정수기는 일등품이구요

쓰레기 매립지는 여기서 멀답니다

구질구질한 사람들은 이 근처엔 절대 

발도 들여놓을 수가 없죠, 

경계가 엄하니까요

나는 창쪽으로 걸어간다, 아직도

구름장들은 저렇게 가볍군

힘은 죽었어요, 부인

계획된 주검과 우연한 창조의 불량스러운 

거리는 조금 지키셔야지, 나는 커튼을 만지작거린다

삶의 물증이 되는 당신 팔을 봐요

그 다리를 보세요, 키가 높은 빌딩보다 커버렸군요

편히 누우려면 집을 더 늘리셔야겠죠?

그럼 하늘은……

더 멀리 더 높이 밀어 올려보시죠

어디까지?

              「유한 부인의 걱정」(37쪽) 전문

 

 

‘유한(有閑) 부인’이란 시간이나 재산이 많고 여유가 많은 부인(여성)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사실 ‘유한 부인’이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의 폄훼의 의도도 들어있다. 1980년대만 해도 ‘한강의 기적’이 강조하는 정서상 ‘한가로움’에 대해서라면 그리 좋게 평가되질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량’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용법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다. 게다가 여성에게 부과되는 특유의 ‘혐오’, ‘멸칭’의 무게도 씌어진 것이 ‘유한 부인’의 의미이다. 위의 작품에서 진술 내용으로 보아 ‘유한 부인’은 중산층 여성을 가리키며, 1980년대의 중산층이 고루 갖추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목록을 나열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화자로 보이는 여성은 “난 걱정 없어요”라며 어떤 이유로 걱정이 없을 수 있는지 진술한다. 그녀는 불결한 것들, 불온한 것들로부터 자신이 얼마나 거리가 있는가를 밝히려 한다. 모두 공감하듯이 ‘고단위 비타민’이나 ‘빈혈약’ 등은 2024년 현재에 있어서도 중요한 영양제로 소모되고 있다. 그녀는 너무나도 한가한 나머지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항생제를 먹을 수 있는 여성이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에는 정수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중산층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필자가 자란 1990년대의 유년기를 떠올리더라도 물은 정수기로 걸러서 마시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신 가스불에 끓여서 식힌 보리차나 결명자차를 담은 사각형의 훼미리 주스병을 냉장고에서 꺼내 물을 마셨던 것 같다. 인간에게 깨끗한 물은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 한국은 급격한 도시화를 겪는 과정에서 특히 상수도 보급률이 도시화에 앞서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서울 인구 과밀화가 계속되었던 1960년대에는 상수도 보급률은 16.8%, 1970년대는 32.4%, 1980년대는 54.7%에 불과했다.[각주:1] 위의 작품에서 ‘유한 부인’의 정수기에 대한 언급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과 건강함을 과시하는 태도로 1980년대 한창이었던 ‘중산층 만들기’의 한 장면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수기
1980년대 맥반석 정수기

 

그런데 이 작품은 어느 정도의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구질구질한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에 살고, ‘쓰레기 매립지’로부터 거리가 먼 곳에 거주하는 ‘유한 부인’은 “난 걱정 없어요”라고 진술하지만 정작 작품의 제목은 「유한 부인의 걱정」이라는 사실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유한 부인’은 너무 건강한 나머지 점점 커지는 팔, 다리, 키를 가지게 된다. 그게 바로 ‘유한 부인’에게 발생한 걱정이리라. 그 걱정은 이제 ‘유한 부인’을 담을 수 없는 집을 확장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만든다. 작품의 또 다른 화자인 ‘나’는 유한 부인이 어떤 비밀스러운 일인 ‘힘’, ‘계획된 주검’, ‘우연한 창조’, ‘불량스러운 거리’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더 높은 하늘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건강’이 경제적 격차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로 활용된다는 사실을 안다. 이 작품 속에서 중산층으로 등장한 ‘유한 부인’은 ‘건강’을 강조하는 생활 속에서 지나치게 커져버린 자신의 몸집을 감당할 수 없어 집을 더 늘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걱정 없어요”라는 첫 문장의 진술이 ‘유한 부인의 걱정’으로 뒤집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작품은 마무리 된다. 이연주 시인의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굳이 중산층 여성의 걱정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담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연주 시인의 다음 작품을 읽으며, 시인이 강조하고 싶은 여성의 조건(또는 계급)을 위해 필요한 장치가 앞의 작품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함박눈 내린다.

소요산 기슭 하얀 벽돌 집으로

그녀는 관공서 지프에 실려서 간다.

 

달아오른 한 대의 석유 난로를 지나

진찰대 옆에서 익숙하게 아랫도리를 벗는다.

양다리가 벌려지고

고름 섞인 누런 체액이 면봉에 둘둘 감겨

유리관 속에 담아진다.

꽝꽝 얼어붙은 창 바깥에서

흠뻑 눈을 뒤집어쓴 나무 잔가지들이 키들키들

그녀를 웃는다.

 

반쯤 부서진 문짝을 박살내고 아버지가 집을 나가던 날

그날도 함박눈 내렸다.

 

검진실, 이층 계단을 오르며

그녀의 마르고 주린 손가락들은 호주머니 속에서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찾아 꼬물거린다.

한때는 검은 머리칼 찰지던 그녀, 

 

몇 번의 마른기침 뒤 뱉어내는

된가래에 추억들이 엉겨 붙는다.

지독한 삶의 냄새로부터

쉬고 싶다.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함박눈 내린다. 

                         「매음녀4」(43-44)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1991)은 이연주 시인의 첫 작품집이다. 위의 작품은  「매음녀」라는 연작시의 일부분으로 그녀의 작품집의 표제어에 해당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유한 부인’과 ‘매음녀’는 어떤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유한 부인’은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의 범위를 지키며, 일부일처제에 따르는 ‘가정 내 여성’이다. 반면 ‘매음녀’는 정상가족을 위협하거나, 또는 정상가족을 부축하는 격의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 이탈리아의 페미니스트 레오폴드 포르투나티는 『재생산의 비밀』(세계사, 1997)에서 일부일처제 하에서 남성 가장 노동자 모델을 뒷받침하는 데에는 공장 주변의 사창가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지적한 바 있다. 남성은 사창가에 가서 자신의 욕망을 해결하는 것까지 임금으로 받지만 가정 안의 여성은 남성이 떠난 집을 지키며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데에 자신의 노동을 투여한다. 별도의 임금 없이 말이다. 이때, 바깥에서 성을 구매하는 비용까지 남성의 임금에 포함되는 격이 되며, 이때에도 여성은 ‘성매매’라는 이름으로 남성 노동자의 재생산을 책임지는 존재가 된다. 이름하여 ‘재생산의 비밀’은 그렇게 ‘퉁’쳐진 여성의 재생산 노동의 재생산 비용까지 남성의 임금으로 들어가지만 실제로 그 임금은 여성의 몫으로 따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추어내려고 한다. 또한 ‘재생산의 비밀’이라는 표현은 ‘가정’을 유지하는 데에는 남성 가장 모델에 공모하는 ‘성매매’가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매음녀’나 ‘유한 부인’이 적대적인 관계라고 한다거나 손쉽게 ‘공모’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이제부터 동시에 생각할 것은 이 여성들이 ‘건강’이라는 기표에 밀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연주 시인은 시인이면서도 동시에 의술을 보유한 간호사이기도 했다. 그러한 시인의 생애사 때문에 작품에서는 환자, 병동, 약물과 관련된 상황이나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위의 작품은 관공서에서 성병 검진 및 위생 검사를 받기 위해 이동하는 성매매 여성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미군정부에 의해 1946년 5월에 남한에서의 ‘부녀자 매매금지’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는 즉 ‘공창제’가 사라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식민지 시기 일본이 마련한 ‘공창제’를 없애는 것의 적극적인 조치로 볼 수는 없고, 단지 미군의 성병 발병률을 억제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미봉책이다. 그러나 이는 성병의 발병을 발본색원 할 수 없었고, 오히려 한국전쟁 시기에는 매춘부 관리 정책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부산, 영등포에는 미군 병사를 대상으로 하는 성매매 지역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차원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유물인 ‘위안부’는 이제 운영 주체가 바뀌어 미군정시기에도 한국정부와 함께 ‘성매매’를 조직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각주:2] 이는 미군정시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에도 국내에 주둔하는 미군기지 주변에서 ‘양공주’라는 직군을 만들어내며 꽤나 긴 기간 동안 유지되었다. 위의 작품을 통해 이연주 시인의 경우도 양공주를 관리하는 시스템에 대하여 이해가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양공주라 불리는 ‘성매매’종사 여성은 성병 관리대상으로 위와 같이 집단적으로 검사소에 이송되어 성병 검사를 받고는 했다. 2연에 서술되고 있듯이, 성병 관리 대상인 여성은 “나무 잔가지들이 키들키들/그녀를 웃는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의 상황에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임을 예상할 수 있다. 이 여성은 3연에서 자신이 어떤 환경 속에서 성매매 여성이 되었는지 암시하고 있다. “반쯤 부서진 문짝을 박살내고 아버지가 집을 나가던 날”이 성병 검사를 받고 있는 그녀가 생각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주요 장면이자 그녀의 삶이 검사소에 이르게 된 결정적 계기일 것이다. 하얀 ‘함박눈’과는 대조적인 이미지로 검사소에서 성병 검사를 받는 그녀의 불결하고 오염된 신체는 4,5연에서 “마르고 주린 손가락”, “한때는 검은 머리칼 찰지던 그녀”, “몇 번의 마른기침”, “된가래”라는 표현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작품 속에서 ‘매음녀’라 불리는 한 여성의 인생이 검사소에 있는 현재로부터 과거를 회상하고, 다시 검사소라는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를 통해 하려던 말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사람들은/어떤 사람들일까……”라는 혼잣말이다.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예외적인 사건을 예방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여유, 즉 '여유'라는 힘이 있는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예를 들자면, 나는 '대치동'이라는 현상(단지 행정구역일 수만은 없다)을 떠올리게 되었다. ‘대치동’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이 학군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 말이다. 교육에 대한 열의와 아이들을 학원에서 학원으로 옮기며 오차가 없는 삶을 아이의 손에 쥐어주려고 하는 부모, 또한 그러한 부모의 욕망을 흡수한 자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간다는 감각이다. 극단적으로는 S대학교 의대라는 목표를 향하여 대치동은 계속 풀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학력지상주의만을 보여주는 예시가 아니라 부모가 갖고 있는 계급을 무리 없이 자녀에게 승계하기 위한 특정 계급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선택과 집중이다. 이연주의 작품을 통해서 단순히 비교하자면 ‘대치동’이라는 지역의 계급성은 ‘매음녀’의 진술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반쯤 부서진 문짝에 기대어 살고 있었고, 어느 날엔가 그마저 부수고 떠난 아버지 때문에 대문도 갖춰지지 않은 가정에서 살다가 어딘가로 떠밀려야 했다. 그녀의 불운은 끝나지 않아 그녀를 지금 여기 검진소에 앉혀놓았다. 문짝조차도 멀쩡하지 않은 집에서 살아갔던 그녀에게 있어서 삶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조차 막을 수 없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매음녀」연작시를 포함하여 그녀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박완서의 단편 소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연주의 작품 속에는 정확히 여성들의 임신 중지 수술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지만 여성들의 몸 안에 있는 불순물들이나 병들을 제거하는 장면이 내내 등장한다.

 

 

나는 나를 낳은 날카로운 밤의 자궁

나는 모친을 살해하는 딸년

제 어미 아랫배에 오물을 쑤셔박는

나는 도시 건설업자다

이동해 간다는 무, 의미성

 

어린 수초의 기억을 간직한 채

누치들의 떼주검

빛 앞에 팔을 비트는 물결 컴컴한 멍자죽,

나는 살아 고된 피음녀다

                    「성자의 권리9」 부분

 

 

푸줏간 주인의 손아귀에 넘어가

살 다루는 숙련가에게

주검이 처분되고 있다;흰 백합꽃

 

뼈는 토막쳐져 내장은 발발이 끄집혀 끌려나와

담즙을 분비하던 흔적 역력한

입맛 당기는 간,

꽃술은 모태로 돌아간다

긁어낸 태내 아이처럼 속수무책의 

무자비한 주검; 순결이 절단난 백합 한 송이

 

입술이 덜덜 떨리는 밤이 아니냐?

어김없이 왕왕 짖어대는 흰 개들의 유령,

백합밭이다

피 묻은 쇠꼬챙이 손가락들은 에잇, 에잇!

 

살아남은 자들이 수천 번씩 다짐하는

생존법칙은

순결을 지키는 모든 눈의 정수리를 찍어

시간을 훔쳐내라

푸줏간 귀퉁이에 음산하게 버티고 선

도끼자루에 끼어진 굶주린 식욕의 낮과 밤

 

흰 백합꽃──낙태 전문의의 오른손에서

심란하게 가위질당한다

늙은 독재자의 동첩으로 

덤핑 약초로 팔려나가네

 

세상 잘 모르는 꽃, 두 번씩이나 죽어서도

주검엔 프리미엄이 없어

여리디여린 꽃 이파리.

           「흰 백합꽃」 전문

 

 

“나는 모친을 살해하는 딸년/제 어미 아랫배에 오물을 쑤셔박는/나”(「성자의 권리9」)라는 진술을 통해서 「흰 백합꽃」의 경우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임신 중지 수술을 가리키는 장면들을 통해서 이연주의 작품이 여성이 수술대에 오르는 장면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작품 「매음녀4」에서도 여성의 신체는 재생산 도구이기 때문에 위생 관리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와 같은 반복적인 이미지 속에서 재생산 도구로서의 관리 대상인 여성에 대한 이해는 시인의 직업과 연관될 것이라고 앞에서도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단지 이연주의 작품만이 아니라 1980년대 많은 여성 작가들은 여성들의 임신중지 경험 이른바 ‘낙태’에 대한 언급을 적극적으로 시작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직접적으로 낙태를 언급했던 또 다른 시인은 최승자로 그녀의 작품 「너는 즐거웠었니」, 「여성에 관하여」,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등을 포함하여 다수의 작품 속에서 낙태하는 자궁에 대한 소재를 반복적으로 다룬다. 최승자의 작품 속에서 여성의 자궁은 재생산 도구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매음녀’의 그것과는 달리 여성의 신체에서도 ‘잉태’를 담당하는 자궁이 어떻게 죽음의 장소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에 집중한다. 한편 박완서의 소설 속에서는 이연주의 ‘매음녀’와 유사한 낙인이 찍힌 신체들을 보여준다. 

 

 

①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한 길 건너 동네가 그때는 농업학교였는데 미군부대에서 쓰고 있었다. 실습원과 이어진 넓은 운동장엔 무수한 퀀셋이 버섯처럼 돋아나 있었고, 정문엔 헬멧을 쓴 미군헌병이 지키고 서 있었다. 처음 들어설 때부터 이 동네는 한눈에 빈촌이었는데도 뭔가 될 듯 될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바로 그 미군부대 때문이었다. 그 일대의 궁상은 어딘지 모르게 순수하지 못해 보였다. 야릇한 화냥기 같은 걸로 오염돼 있었다. (306쪽)

 

② “후뚜루 다 보신다고 안 했남. 선상님이 그러셨죠 잉?”

“아뇨, 산부인과를 하겠어요.” 

나는 우단의자에서 발딱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것은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이 동네의 화냥기에서 힌트를 얻고 춘화도가 이끌어낸 악몽 속에서 마침내 결정을 본 거였다. 원치 않는 아기가 배 속에 있을 때의 고통이 어떻다는 건 그걸 가져본 여자만이 안다. 모든 질병의 고통은 동정자를 끌어모으지만 그 고통만은 비난과 조소를 면치 못한다. 사람을 질병에서 해방시키는 게 인술의 꿈이라면, 여자를 그런 질병 이상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건 나의 꿈이었다. (308-309쪽)

 

③ 농업학교는 정부가 환도하고 나서도 2,3년은 더 미군부대였고, 농업학교가 정상화되고 나서도 딴 큰 미군부대가 멀지 않아서 이 동네의 화냥기는 계속 호황을 누리다가 미군이 대폭 감축되고 나서도 그 뿌리는 쉽게 청산되지 않고 싸구려 윤락가로 이어져 내려왔다. 근래에 주택가 속에서의 윤락행위 단속으로 대개는 흩어졌지만 멀리서도 연줄로 계속 내 단골이 되어주고 있고, 또 아들딸 가리지 말고 둘만 낳기 때문에 이 동네 가정주부들치고 내 신세 안 진 여편네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길 건너 농업학교는 건설회사한테 학교 부지를 팔고 교외로 떠나 아파트단지가 됐다. 그러나 그 새로운 인구밀집지대에서는 어떻게 된 게 하나도 새 단골이 생기지 않았다. 내 단골은 미우나 고우나 경성상회 뒤편의 퇴락한 구동네였다. 그 동네의 얌전한 여편네들 사이에서나, 또 시내 곳곳에 점점이 흩어져 제 버릇 개 못 주고 그 짓으로 밥먹는 포주들 사이에서나 나는 값싸고 믿을 만한 의사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도 그럴밖에 나는 그동안 단 한 건의 사고도 내지 않았던 것이다. 자주 그럴 필요가 있는 넉넉지 못한 여자일수록 거만한 박사학위나 으리으리 기죽이는 시설보다는 값싸고 믿을 만하다는 실속이 앞서는 건 당연했다. (322쪽)

 

④ 그들이 울면서 기구하는 걸 뭘까. 허구한 날 어디서 저런 지겨운 통곡이 치받치는 걸까. 원치 않는 애기를 배 속에 가지고 나를 찾아왔을 때 그들은 거의가 다 당장 죽고 싶은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이 안전하고도 정확하게 제거됐다는 것만 알면 그들은 당장에 개운하고 근심 없는 얼굴이 됐다. 그들의 고통을 털끝만 한 잔재도 안 남기고 뿌리 뽑아내는 내 솜씨는 참으로 영검했다. 마음속에 여자가 받는 그런 고통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가 있음으로써만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건 나였다. (337쪽)

 

 

1980년에 발표한 박완서의 단편 「그 가을의 사흘 동안」(《엄마의 말뚝》, 세계사, 2012)은 낙태 전문 산부인과를 운영하던 여성 화자의 기억을 통해서 진행된다. ①에서는 화자가 자신의 병원을 차릴 지역이 “미군부대” 때문에 “화냥기 같은 걸로 오염”되었다고 판단하여 선택하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②에서는 “사람을 질병에서 해방시키는 게 인술의 꿈이라면, 여자를 그런 질병 이상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건 나의 꿈”이라고 하며 자신이 구체적으로 펼칠 의술은 여성의 임신 상황을 중지시키는 기술에 해당함을 가리키고 있다. ③에서는 화자가 자리잡은 고장이 “이 동네의 화냥기는 계속 호황을 누리다가 미군이 대폭 감축되고 나서도 그 뿌리는 쉽게 청산되지 않고 싸구려 윤락가”가 되어서 손님이 끊이지 않는 의원으로 계속 돈벌이를 할 수 있었던 사정을 서술하고 있다. 심지어 성매매 업소의 포주들은 단골이 되어 자신의 종업원을 데리고 화자의 병원을 드나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④에서는 재차 화자의 기술이 여성의 몸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기술이라고 강조되면서 사실은 화자의 경험 때문에 임신 상태를 멈추게 하려는 의도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연주의 작품 속에서 여성의 성기는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것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대상임을 폭로한다. 위의 박완서의 소설 속에서도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가정의 여성이나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여성은 주인공의 손을 통해서 임신 중지라는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는 것처럼 묘사된다. 1980년대에 나타난 여성 작가들이 동시에 착목하고 있었던 것은 여성의 신체와 관리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었다. 특히 박완서의 소설 속에서는 가정 속의 여성조차도 “화냥기 같은 걸로 오염”되었다고 보면서, 당시의 여성들이 계획적이지 않은 성관계를 통해서 무심결에 임신이 되어버리는 세태가 흔한 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매음녀4」의 시적 대상인 여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에 해당하는 여성은 성매매 여성만이 아니라 서울 주변부의 쇠락한 가정의 여성이기도 함을 알 수 있다. 

 

삶이라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그려나가는 시대가 아니었음을 그리고 ‘자신’이나 ‘뜻’이라는 것조차 움켜잡기 힘든 여성들이 무수한 수술대 위에서 그리고 또 검사대 위에서 자신의 건강을 검사받고 선택받아야 했음을 이연주는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시립병원 철책 너머 어둠”에 갇힌 환자가 아니고, 성병 검진표를 확인하고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여성이 아니더라도 이연주는 여성에게 ‘건강’이 어떻게 계급적인 것으로 관리되는 것인지 소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김간호사는 검게 어둠을 반사하는 창 앞으로 다가간다. 얼음 같은 고요를 붙들고 늘어지는 저 신음소리, 삶을 애걸하는 뜻은 아니리. 노오란 황달기의 흰자위, 눈이 스르르 감긴다. 그녀는 생각한다. 저 산소 마스크를 떼어야 한다, 저 인공 소변줄을, 고단위 단백질과 수분을 주입하는 저 링거 바늘을 뽑아야 한다. 창밖은 이미 어둠의 이끼로 덮여 있다.

  어떤 때에 히포크라테스의 눈빛, 형벌이 되기……도 한다. 

                   「죽음을 소재로 한 두 가지의 개성1」 일부

 

 

어쩌면 이연주 시인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위의 작품에서 ‘김간호사’는 죽음의 직전에 죽음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환자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 연명치료의 고통을 바라보며 ‘히포크라테스의 눈빛’과 자신의 진심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보다는 고통 그 자체에 천착한 자의 자리가 이연주의 자리가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누구도 쉽게 살려주지 못하는 작가인 것 같다. 다만 누구든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계급이라거나 성별 등등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직면해야만 하는 어둠임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맨몸으로 기도문 한 구절 없이 버티는 용기와 저항의 힘”이라고 신생아에게 첨언하는 요즈음 말로 ‘지극한 T재질’이랄까.

 

이연주 시인에 대한 정확하고 정밀한 분석은 아니지만 나는 이연주가 바라보았던 ‘건강’이라는 이름 아래에 펼쳐진 여성에 대한 관리, 또는 질병에 대한 태도 등이 계급에 대한 고민과 함께 했었다고 생각을 하며 이 글을 작성하고 또 마무리하려고 한다. 수많은 임신 중지 수술을 피해서 어렵게 태어난 아이들도 이연주의 작품 속에 있다. 그 작품을 인용하며 글을 끝내려고 한다. 

 

 

  방치된 탄생이 관 같은 요람 위에 누워 있다. 푸줏간의 비릿한 냄새, 온갖 경험을 거쳐 늙은이의 침묵에 이르기까지 누가 저것들을 그 먼 곳까지 인도할 수 있으리. 나는 세면대 가득 물을 받아 손을 씻는다.

  이곳은 불을 끄면 그대로 암흑이다. 어제 태어난 아이도 자궁 감자로 끄집어냈지 않나, 모두가 그렇다. 아니면 마취제를 전신에 걸고 절개수술로써 태어남의 시분초를 알리는 것이다. 전쟁터에 일개 보병으로 올려지는 시간이지. 나는 어린 것 하나를 들어올려 벌써 노랗게 곪아가는 그 얼굴의 반점들을 지켜본다.

  이것 봐, 총과 칼로써 네 몸을 무장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문제는 맨몸으로 기도문 한 구절 없이 버티는 용기와 저항의 힘이란다. 기도문이란 다만 죽은 자들을 위한 문장일 뿐이니까…… 나는 알코올솜으로 정성들여 손바닥을 문지른다. 제발 잊지 말아, 저 전깃불이 얼마나 큰 어둠을 감추고 있는지……

                                                                                                                                                               「신생아실 노트」 (83)

 

 

  1. 김태호, 「한때 중산층 주방의 필수품…‘냉온·제빙·커피머신 정수기’에 밀려 퇴조」, 《문화일보》, 2021.11.15. (https://munhwa.com/news/view.html?no=2021111501031712000001) [본문으로]
  2. 미군정시기 성매매에 관한 내용은 『군대와 성폭력』 (송연옥 외, 출판사 선인, 2012년)에서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인-무브 Workshop > 현대시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턱을 넘자 이미지가 쏟아졌다  (0) 2023.05.23
댓글 로드 중…

최근에 게시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