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대 무정부주의: 정치사상의 재해석
길 모레혼(Gil Morejón)
번역: 김강기명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스피노자의 철학을 전공한 김강기명 회원이 스피노자와 무정부주의의 관계를 논하는 길 모레혼의 글을 번역해 주었습니다. 이 글은 댄 테일러, 길 모레혼, 마리 부트, 잭 스테터가 철학 저널 <The Philosopher >에 공동으로 기획한 코너 "Spinoza After Politics"에 실린 글들 가운데 한 편입니다. 김강기명 회원은 이 코너의 또 다른 글도 번역했는데요, 조만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은 인간 본성에서 공동체의 가능성을 이끌어 내는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김강기명 회원은 2023년부터 연구실에서 스피노자 강의를 계속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 [23년 가을 강좌]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혹은 ‘공화국 구하기’(9월 2일 시작, 토요일 오후 3시 )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철학 고전 깊이 읽기] 스피노자 『에티카』 1부 –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강사 김강기명, 24년 7월 17일 시작,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 또, 지난 여름 강좌에 이어 <에티카> 2부를 꼼꼼히, 그리고 깊이 읽는 강좌도 기획 중입니다. 곧 열릴 강좌를 기획하며 관련된 글들을 번역해 <인-무브>에 싣고 있기도 합니다. -편집부
In: “Spinoza after Politics”: Dan Taylor, Gil Morejon, Marie Wuth, and Jack Stetter,
https://www.thephilosopher1923.org/post/spinoza-after-politics
"Spinoza after Politics": Dan Taylor, Gil Morejon, Marie Wuth, and Jack Stetter (Keywords: Human Nature; Affects; Anarchism; Sta
"The more we affect and are affected by others, the more we can perceive and understand the plurality of other human lives and experiences."
www.thephilosopher1923.org
역사적으로 스피노자의 사상은 다양한 해석을 받아왔다 . 18 세기에는 범신론자로 , 19 세기에는 무신론자로 , 20 세기에는 유물론자로 , 그리고 현재는 생기론자로 불린다 . 이러한 해석들은 때로는 그를 선구자나 동지로 여기는 방식으로 , 때로는 이단적이거나 위험하다고 비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 스피노자의 사상이 이토록 상반되고 모순된 해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 그의 사상이 현대 이론 및 실천 영역에서 다양한 입장들을 고무하거나 배척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
그러나 스피노자의 경우 , 그의 사상을 오늘날의 철학적 , 정치적 감수성과 조화시키려는 시도가 때로는 정당화할 수 있는 해석학적 관용을 넘어서 명백한 왜곡에 이르기도 한다 . 이츠하크 멜라메드는 <관대한 해석과 스피노자의 정치적 길들이기 , 또는 세속적 상상의 땅에서의 베네딕트> 라는 논문에서 역사적 철학자들에 대한 “ 관대한 해석 ” 을 생산하는 현대의 관행에 대해 더 회의적이어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 그들의 사상이 우리의 직관이나 믿음과 명백히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창의적인 방법을 찾는 대신 , 그들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 그래야만 그들의 사상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에서는 스피노자에 대한 최근의 전유 중 하나를 간략히 살펴보고 , 이것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나의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 여기서 말하는 것은 20 세기에 시작된 현대 대륙 정치철학의 급진적 전통으로 , 무정부주의적 또는 반법률주의적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 물론 이러한 정치철학적 경향의 뿌리는 훨씬 더 오래되었지만 , 나는 이 최근의 궤적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
Gil Morejón
무정부주의는 국가에 대한 반대 , 더 일반적으로는 정치 권력의 위계적 집중에 대한 반대로 특징지어지는 정치적 지향이다 . 이는 특정 행동 규범의 강제를 억압적이고 대개 자의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반법률주의로, 법에 대한 반대 또는 더 일반적으로 규범성 자체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며 , 이 역시 억압적이라고 여겨진다 . 푸코 , 들뢰즈 , 네그리 , 아감벤 등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많은 추종자들이 쓴 대륙 전통의 책들을 살펴보면 , 이러한 무정부주의적 또는 반법률주의적 관점을 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 즉 , 국가 , 법 , 또는 규범성의 개념 자체에 대한 일반화된 회의주의나 노골적인 적대감이 드러난다 .
이는 현대 정치철학에서 규범성과 국가를 근본적으로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인간의 자유에 반하는 것으로 보는 중요한 흐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러한 관점에서 이들은 직접적으로 반대하거나 탈출해야 할 대상이다 . 그러나 나의 주장은 스피노자의 사상이 이러한 무정부주의적 또는 반법률주의적 정치사상 방식에 쉽게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사상가들 중 상당수가 스피노자를 자신들의 선구자나 전신으로 주장해왔다.
내 견해로는 , 스피노자는 정치학의 과학을 발전시키려 했다 . 이는 그에게 있어 어떤 주어진 사회 조직 방식에 대해 최대한의 안정성 조건을 확립하기에 가장 적합한 정부 형태 , 제도 , 관행을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 『정치론』에서 이는 군주제 , 귀족제 , 그리고 - 그의 이른 죽음으로 극도로 짧아진 프로젝트지만 - 민주제 정부의 최적 형태를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이는 당연히 정부나 국가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 바로 이 점이 그가 무정부주의적 또는 반법률주의적 정치사상가가 될 수 없는 이유라고 주장한다 .
스피노자는 인간 사회성의 내재적 역학이 그러하여 , 일정 수의 인간이 공동체에서 함께 살기 시작하면 곧바로 특정 행동 규범을 효과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국가나 정부와 같은 것이 불가피하고 , 실제로 필요하며 , 제대로 이해했을 때 심지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다소 과장된 형태로 말하자면 , 스피노자는 세 사람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 즉시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고 할 수 있다 . ( 물론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집단으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
이를 세 단계로 나누어 논증하겠다 . 첫째 ,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해력이 제한되어 있다 . 우리가 가진 사물에 대한 지식의 대부분은 , 서로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여 , 부적절하고 부분적이며 혼란스럽다 .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사는 것이 맞다 .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공동의 삶은 우리가 서로 지식 , 힘 , 기쁨을 증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다 .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이를 이해하지 못하며 , 실제로 우리는 대부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
따라서 두 번째 요점은 다음과 같다 : 우리 지식의 일반적인 부적절성 때문에 , 우리는 서로에 대해 이해하는 바가 아니라 상상하는 바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 이는 우리의 정서가 우리의 욕망을 가장 크게 형성하고 서로에 대한 행동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인간은 두려움 , 희망 , 질투와 같은 정념의 지배를 받으며 ,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방적이어서 주변 사람들의 정서를 흉내 낸다 . 우리가 일반적으로 함께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회가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해서가 아니라 , 우리의 공통된 두려움과 공통된 희망 때문이다 .
이는 세 번째 요점으로 이어진다 . 우리가 공동체에서 함께 살기 시작하면 , 우리의 공통된 희망과 두려움이 같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가진 힘이다 . 이는 우리가 이 집단적 힘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것이라는 것을 빠르게 깨닫기 때문이다 . 이것이 바로 다중의 힘 , potentia multitudinis 이다 . 스피노자에게 주권이란 바로 이러한 다중의 힘에 의해 정의되는 권리이다 . 주어진 사회의 한 구성원이 다중에 의해 다중의 존재 지속에 반하는 것으로 상상되는 방식으로 행동할 때 , 다중은 그 행동을 막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 극단적인 경우 , 필요하다면 그 구성원을 파괴하려 할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정의상 옳을 것이다 . 설령 그 구성원이 제기하는 위협이 단지 상상 속의 것일지라도 말이다 . 다시 말하지만 , 우리의 지식은 일반적으로 부적절하며 , 이는 결코 주권의 기초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
이러한 방식으로 , 홉스의 이론에서처럼 자연 상태에서 사는 것보다 나은 사회 생활의 잠재적 이익에 대해 합리적으로 통찰한다던가 , 루소처럼 사회계약에 의지한다던가 하지 않고도 , 단지 인간의 정서와 사회성의 내재적 역학에서 우리는 주권의 출현 , 국가의 형성 , 그리고 폭력의 위협으로 강제되는 공동 생활의 규범 확립을 보게 된다 . 여기서 제시하는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 『윤리학』 제 4 부 정리 37 의 두 번째 주석에서 단 하나의 인용문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
“ 사회는 각자가 가진 복수의 권리와 선악을 판단할 권리를 사회에게 귀속시킬 때 유지될 수 있다 . 이렇게 함으로써 사회는 공동의 생활 규칙을 규정하고 , 법을 만들며 , 그것을 유지할 힘을 갖게 된다 . 이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 이성은 정서를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 위협에 의해서이다 . 법과 자기 보존력에 의해 유지되는 이 사회를 국가라고 부르며 , 그 법에 의해 보호받는 자들을 시민이라고 부른다 .”
물론 모든 국가가 똑같이 좋다거나 , 모든 규범이나 그것들이 강제되는 방식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 의심의 여지없이 , 우리 모두가 극도로 해롭고 불필요하다고 동의할 수 있는 규범과 강제의 예를 쉽게 들 수 있다 . 그리고 현대 민족국가가 완전히 폐지되어야 마땅한 정착민 식민주의 ( settler colonialism) 및 인종적 민족주의 ( ethno-nationalist) 프로젝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 그러나 나는 스피노자가 이 정도는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 사회 구성의 안정적 유지는 오직 공동 생활 규칙을 위한 최소한의 규범 집합 , 최소한의 법 집합의 확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 이는 오직 폭력의 위협을 통해 ,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 실제 폭력을 통해서만 효과적으로 강제될 수 있다 .
아마도 이것은 실제로 무정부주의자들과 반법률주의자들이 말하는 대로 억압적일 것이다 . 그리고 나는 결코 이러한 억압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 특히 주권적 다중이 상상적 오해에 기반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불행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 최소한의 억압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 사실 , 이러한 최소한의 억압에 의해 확립된 사회적 , 제도적 경계 내에서 , 인간 자유의 가능성 조건은 스피노자에게 있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보존된다 . 왜냐하면 바로 이 다중의 힘이 우리의 존재를 가장 잘 유지하고 우리의 이해력을 공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이 모든 것은 스피노자가 무정부주의적 또는 반법률주의적 프로젝트에 깔끔하게 적용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진 정치사상가와는 거리가 멀고 , 오히려 마키아벨리 유형의 고전적 공화주의자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러한 방향성은 최근에 Philip Pettit 에 의해 가장 영향력 있게 발전되었다 .
이러한 점에서 스피노자는 유한한 사유 존재로서의 우리 본성에 대한 냉철한 현실주의자이다 . 그는 우리를 정서를 통한 구체적 결정 속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 이를 기반으로 정치와 자유에 대한 진정한 과학이 가능해진다 . 시인들 , 낭만주의자들 , 풍자가들에게는 그들의 유토피아적 몽상과 비참한 애가를 남겨둔다 . 그들이 인간 본성을 한탄하든 , 비웃든 , 경멸하든 , 저주하든 내버려 두라고 그는 말한다 . 스피노자에게 자연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그것의 결함으로 귀속될 수 없으며 , 우리는 떨어져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훨씬 더 강력하고 , 이해력 있고 , 기쁠 수 있다 .
Gil Morejón 은 2019 년 DePaul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철학자이자 사상사 연구자다. 그는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흄의 사상에서의 무의식』(에든버러 대학교 출판부, 2022)의 저자이며, 스피노자에 관한 여러 책을 번역하였다. 현재 그린넬 대학교의 철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