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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넘어서: 개념은 어떻게 정치적 권력이 되었는가

 

 

강연: 디디에 드베즈(Didier Debaise)

번역: 박기형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행사 정보: <SONIC ACTS FESTIVAL 2019 HEREAFTER>의 두 번째 강연, “Out of Nature : How a Concept Became a Political Power?”

*일시: 2019222

*장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드 브락케 그론드

*영상: https://youtu.be/gKukK6kKRQ0?feature=shared

 

*강연 소개

근대인(The moderns)은 자연을 발명했으며, 이를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제도 중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디디에 드베즈(Didier Debaise)는 이번 강연에서, 실험적 체계들 내에서 수행된 다양한 지역적 발명들, 몸짓들, 그리고 조작들이 어떻게 새로운 정치적 힘(force)을 탄생시켰는지에 관해 탐구할 것입니다. 근대는 자연이라는 개념을 그것이 출현하고 존재할 수 있었던 조건과 분리한 채, 자연 개념을 실천들을 규범화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행위자로, 그리고 그 실천들의 영향력을 모든 다른 영토로 확장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필수적인 도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근대적 자연 개념이 가진 헤게모니적 경향들에 저항하면서, 지구에 거주하는 다른 방식들(other ways of inhabiting the Earth)이 공간을 회복하고 정당성을 되찾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사회: 루카스 반 데르 벨덴(Lucas van der Velden)

 

우리는 곧바로 이번 세션의 두 번째 부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번에는 디디에 드베즈 박사의 기조 강연이 이어집니다. 도착하셔서 다행입니다. 흥미로운 여정이었겠지만, 무사히 도착하셨다니 기쁩니다.

 

디디에 드베즈는 벨기에 국립과학연구재단(Fall Nationale de Laarashier Sonifik)의 상임 연구원이자, 브뤼셀 자유대학교 철학 연구 센터 소장으로서 현대 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하루 종일 이야기 해온 이자벨 스땅제(Isabelle Stengers)와 함께 구성주의 연구 그룹(Groupe d’études constructivistes) Gecko를 공동 창립하였습니다. 그의 주요 연구 분야는 현대 사변 철학, 사건 이론 그리고 미국 프래그머티즘와 프랑스 현대 철학 간의 연관성입니다. 그는 뒤 Du Réel 출판사에서 연구 총서를 기획·감독하고 있으며, 저널 Multitudes Inflexions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철학에 관한 세 권의 저서를 집필했으며, 프래그머티즘 및 현대 형이상학의 역사에 관한 편저를 출판하였고, 또한 베르그손(Henri Bergson), 타르드(Gabriel Tarde), 수리오(Étienne Souriau), 시몽동(Gilbert Simondon), 들뢰즈(Gilles Deleuze)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저서 중 두 권이 영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는 최근 출간된 <Nature as Event>, 또 다른 책은 <A Speculative Empiricism>입니다. 현재 그는 <Pragmatique de la Terre>라는 제목의 저서를 집필 중입니다.

 

 


*본 강연

 

대단히 감사합니다, 루카스. 그리고 초대해 주시고,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매우 수월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주최 측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비록 저는 브뤼셀에서 왔지, 이 일이 마치 위험천만함 모험처럼 느껴지는군요. (웃음) (Rick Dolphijn)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저는 그게 비교적 쉬운 일이었따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더 복잡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점을 언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음) 그럼 이제 시작해보겠습니다.

 

저는 하나의 가설을 제안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 가설을 여러분과 함께 시험해 보고, 이 가설이 얼마나 일관성을 갖는지, 또 어떤 필연성을 지니는지를 탐구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검토하고자 하는 가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근대인들은 지구에 거주하기 위해 자연이라는 개념을 발명해왔다(Moderns have invented a concept of nature to inhabit the Earth).”

 

저는 - 잠시만요.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제 강연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인들은 지구에 거주하기 위해 자연이라는 개념을 발명해왔다.” 저는 이 가설이 현대 철학의 몇 가지 이행을 이해하는 좋은 지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철학, 형이상학, 사변 철학, 그리고 인류학 간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입니다. 저는 특히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인류학자인 에두아르도 비베이루스 데 카스트루(Eduardo Viveiros de Castro)와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의 연구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또한, 이 가설은 자연이라는 문제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범주의 집합을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정치적 질문의 새로운 공간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관점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제, 이 가설을 매우 문자 그대로, 직접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첫 번째, 다소 기이하면서도 암묵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이 개념이, 그리고 어쩌면 자연자체도 시간적 차원을 갖습니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 즉 우리가 눈앞에 보는 자연적 사물들, 우리가 모으고 나누는 수많은 몸과 존재들, 그리고 이 신체들과 존재들 간의 관계를 다루기 위해 우리가 발명했고 사용하는 법칙들 - 이 모든 것이 특정한 시간, 특정한 순간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으로 발명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말한 자연의 획기성 이론(epochal theory of nature)”이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정치적 사건이나 사회적 사건에 대해 특정한 획기적 시대(epoch)가 있다고 얘기하듯, 자연에도 특정한 획기적 시대가 존재합니다. 근대인들이 자연이라는 개념을 발명하여 지구를 점유했다는 주장은, 우리가 자연 개념이 발명된 순간을 매우 명확하게 특정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저는 무언가가 발생했고 무언가가 완전히 변화한 매우 특정한 날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마치 들뢰즈와 가타리(Félix Guattari)<천 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에서 각각의 플라톤에게 특정한 날짜를 부여했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 특정한 날짜는 무엇인가요? 바로 17세기 초반입니다. 무언가 거대한 사건이 발생했던 그 순간, 모든 범주를 완전히 변화시켰고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바꿨으며 마침내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을 생산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은 생산물입니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연은 특정한 사건 속에서 생산되었습니다.

 

이 가설에서 도출할 수 있는 두 번째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근대인들이 자연이라는 개념을 발명하여 지구를 점유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자연이 일종의 지리적 차원을 가진다는 전제를 포함한다.” 이는 매우 기이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연이 지구상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공간으로 넘어가거나 다른 나라로 가더라도, ‘자연이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저는 정반대를 주장합니다. 자연은 근대인들의 발명품이며, 그들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자연 개념을 강요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자연의 범위를 전 지구적으로 확장하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가설에는 두 가지 기이한 주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자연은 특정한 공간적 차원을 갖는다. 둘째, 자연은 특정한 시간적 차원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 지구, 천체(globe)라는 용어를 혼용하는 착오를 자주 범합니다. 하지만 이 혼동은 결코 단순하고 순진한 착오가 아닙니다.

 

저는 자연이 일종의 전쟁 기계(war machine)’였거나, 혹은 그러한 전쟁 기계로 변모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자연은 정치적 재정의를 위한 도구였습니다. 이는 두 개의 방향으로 작동했습니다. 첫 번째 방향에서 자연은 유럽 내부, 즉 서구(Occident) 내부에서 모든 소수적 지식(minoritarian knowledge)과 소수적 실천(minoritarian practice)을 억압하는 전쟁 기계였습니다. 이후에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오겠지만, 자연은 유럽 전통 내에서 일종의 길들이기(domestication) 과정이었습니다. 즉 자연은 유럽 전통 내에서, 서구 내에서, 모든 소수적 지식을 길들이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연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기능했습니다. 저는 이 점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개념이 하나의 도구가 되었고, 그 도구가 다시 전쟁 기계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자연은 서구 내부에서 지식을 길들이는 촉진제로 작동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화의 강력한 도구로 기능했습니다. 이 개념은 타자를 근대적 구조의 배경으로 전환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연 개념은 이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작동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럽 내부에서 동시에 벌어진 사건들을 함께 고려하지 않고는 탈식민화를 제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탈식민화의 문제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향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몸짓입니다.

 

아 잠시만요, 물을 좀 마시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약간의 통제(control)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저는 이게 주최 측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사건(event)일 뿐이지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요. 제가 이 강연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발생하는 일이겠지요. 그래서 루카스, 나중에 이 문제에 관해 얘기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웃음)

 

그렇다면 자연이 어떻게 정치적 권력이 되었을까요? 자연이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도구가 되었을까요? 특히, 자연이 정치적 도구로서 결코 충분히 분석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연을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연은 하나의 정치적 도구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가 이 기이하고도 특유한 발명인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은 어떻게 생산되었는가?” “자연으로서의 근대 학문은 무엇인가?”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있어 자연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에겐 단 40분의 강연 시간밖에 없는데, 질문이 너무 큰 거 아닐까?”

 

저는 이 질문이 매우 크고 긴 물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를 잘못된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잘못된 방식이란 뭘까요? 그건 자연의 재현(표상, representation)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다룬 형이상학들, 존재론들, 그리고 자연을 사유했던 철학들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입니다. 한 마디로, 재현의 수준에 머무르는 한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답이 재현에 있지 않다면, 존재론에도, 우리가 자연을 다루는 방식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답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재현이 아니라 몸짓(gesture)’을 주목해야 합니다. 근대인들은 자신을 특정한 종류의 조작과 몸짓으로 정의합니다. 우리가 이 몸짓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근대인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몸짓들은 무엇일까요? 물론 매우 많은 몸짓이 있겠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세 가지 주요한 몸짓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몸짓을 이해하면,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한 완전한 윤곽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몸짓들은 처음에는 우리가 실험 과학이라고 부르는 영역에 자리 잡고 도입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연을 구성하는 근대적 몸짓들은 실험 과학을 정의하는 몸짓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몸짓은 이자벨 스땅제<In the Time of Catastrophe><The Virgin and the Neutrino>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게 바로 갈릴레오의 몸짓(Galileo gesture)’입니다. 하지만 이 몸짓은 단순히 실험 과학 안에만 머물렀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몸짓의 성공은 우리의 모든 범주를 완전히 변형시켰다는 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과학의 몸짓이 된 게 아니라, 우리의 정치, 지식, 더 나아가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몸짓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몸짓은 분기(bifurcation)입니다. 분기 말입니다. 저는 이걸 그림으로 보여드리려 합니다. 당신은 하나의 신체를 취합니다. 어떤 신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물리적 신체, 생물학적 신체, 살아 있는 신체, 인간 신체이든 말입니다. 당신은 신체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걸 여러분의 옆 사람과 함께 실험해보셔도 좋습니다. 우리는 연습을, 일종의 실험적 연습을 해볼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거대한 박쥐 같은 건 없길 바랍니다. (웃음) 당신은 어떤 신체를 취합니다. 그리고 그 신체에서 모든 피상적 특질들(superficial qualities)을 폭력적으로 추출합니다. 그 신체의 피상적 특질은 뭘까요? 그건 신체의 형태와 미적 차원, 신체에 대한 애착, 신체가 당신에게 갖는 관심, 이 신체의 가치 등이며, 무엇보다도 미적 차원과 감각적 차원입니다. 이 모든 특질을 추출합니다. 이 추출 과정은 기술적 대상, 실험 장치, 그리고 양적 분석 절차를 통해 수행됩니다.

 

우리는 근대성을 가로지르는 이원론 전부를 온전히 이해하진 못할 것입니다. 그 모든 이원론이 바로 이 단순하고 기본적인 몸짓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당신은 하나의 신체를 취하고, 그 모든 피상적 차원을 추출합니다. 여기서 피상적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수사적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체에서 추출하는 이 모든 감각적 특질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이 특질들에 부여하는 단어들을 떠올려봅시다. 그것들은 바로 미, 도덕 가치, 관심의 감각, 사물들의 중요성에 관한 감각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 전부를 신체로부터 추출하는 것입니다.

 

근대인들 자연에서 모든 감각적, 미적, 도덕적, 가치적 요소를 제거하는 행위를 지속해서 수행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종종 봅니다. ‘자연을 정치화해야 한다.’ ‘자연에 미학을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조차도 기이한 몸짓입니다. 왜냐하면 정치와 미학은 애초부터 신체 속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정치는 자연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적 추출 과정에 의해 강제로 제거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근대인이 수행한 작업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동물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봅시다. 근대적 방식은 그 동물에 대한 모든 애착, 미적 감각, 그리고 그 동물이 환경 속에서 경험하는 즐거움을 제거하도록 요구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올바르게 정화된 신체들(properly purified bodies)’만을 갖게 됩니다.

 

이 첫 번째 몸짓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체를 특정한 특질을 통해 적격화(qualify)’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와의 연결을 실격화(disqualify)’하는 과정입니다. 미적 차원, 윤리적 차원, 가치적 차원을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탈자격화(discqalification)의 과정입니다. 근대적 사고에서 인간이 신체에 투사한다고 간주되는 모든 차원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거된 특질들은 피상적인 특질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탈자격화의 과정은 다양한 실천과 지식을 실격화하는 도구로 작동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한 동물이나 생명체에 대한 전문적 경험과 관심을 가진 아마추어나 지역 공동체의 전통적 지식이 배제되었으며, 그 대신 근대적 과학의 지식만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자벨 스땅제는 <In the Time of Catastrophe>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우리는 파괴된 실천과 집단적 지식의 거대한 묘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첫 번째 몸짓이 분기’, 즉 신체에서 모든 감각적 특질을 제거하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몸짓은 위치 측정(localization)’, 즉 존재를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어떤 것이 실재이며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신체를 적격화하고, 생명을 적격화하고, 존재를 적격화할 수 있나요? 만약 내가 보는 것(what I see)’으로 존재를 적격화한다면, 우리는 피상적 특질을 다시 도입하게 됩니다. 근대인은 신체에 대한 모든 접근과 모든 관심을 실격화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무엇이 신체이며, 무엇이 자연인지조차 인식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몸짓의 핵심입니다.

 

근대인이 만들어낸 혹은 발명한 유일한 긍정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언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위치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이 여기 있다’, ‘지금 여기 있다’, ‘어딘가에 위치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어떤 대상을 위치 측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형식화하고 기하학적 구조화해야 합니다. 따라서 근대인들은 무엇이 실재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 자신들이 만들어낸 선험적 공간화에 강하게 결부된 개념을 설정했습니다. 공간화의 방식을 바꾸면, 실재 자체가 변화합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위치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근대적 유물론에 관한 적합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유물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물론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띱니다. 이것은 근대성을 가로지르는 과학적 유물론의 한 형태입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유물론자란, 유물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 사람입니다. “물질이란 위치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순간에 위치할 수 없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고방식을 끊임없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경과학에서 뇌, 관념, 기억을 연구할 때, 과학자들은 특정한 뉴런이 활성화된 위치를 찾고자 합니다. 그들이 묻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생각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 기억은 어느 뉴런에서 발생하는 걸까?” , “위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제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몸짓은 원래 실험적 몸짓이었으나, 결국에는 매우 강력한 전쟁 기계로 변모했습니다. 이 몸짓은 모든 타자들, 다른 모든 문화들, 다른 모든 문명을 향한 전쟁 기계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신을 믿고, 영혼을 믿고, 정령을 믿으며, 다양한 존재들을 믿는다. 그것은 단지 믿음일 뿐이다.” 근대인들은 그것들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들을 단순한 믿음으로 간주했습니다. 저들에게는 저마다의 존재론들이 있고, 저들 나름대로 현실을 다루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치를 측정할 수 없는 한, 그 방식들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몸짓은 매우 기이한 식민화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존재론들을 단순한 재현과 믿음으로 환원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와 함께, 근대인은 지식의 진정한 핵심을 소유한 유일한 존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 세 번째 몸짓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를 갈릴레오의 유명한 기술적 발명인 경사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실험은 매우 기묘합니다. 왜냐하면 이 실험을 최적의 조건에서 수행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적의 조건이란 실제 경험 속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공은 완벽히 매끄러워야 하고, 경사면 또한 완벽한 평면이어야 하며, 마찰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환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갈릴레오는 이를 특정한 장소에서 인공적으로만들어야 했습니다. 그가 이를 수행한 장소가 바로 실험실, 혹은 특별히 보호된 구역이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공적인 것이며, 발명된 것이며, 구성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매우 예술적인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그는 자연이 말하였다(Nature hath spoken).”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자연이 어디에서 말했습니까? 자연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가 실험을 수행한 공간은 완전히 인공적인 기술적 환경이었습니다. 철저히 정화되고 조작된 공간에서 실험을 수행해 놓고는, 그 결과를 자연이 말한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실험이 수행된 공간에는 자연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 공간 속에서 자연은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갈릴레오를 강제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험적 체계는 그가 원하는 결과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연이 말하였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기묘한 몸짓을 저는 검증(verification)’이라고 부릅니다. , 하나의 실용적 조작(pragmatic operation), 하나의 몸짓을 수행한 뒤, 그것이 마치 개입 없이도 존재하는 실재인 것처럼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실험에 개입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뿐이다.” “이것은 과학이 발견한 진실이다.” 이것이 바로 검증이라는 근대적 몸짓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이 검증 과정은 단순한 실험적 과정이 아닙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전쟁 기계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방식으로 수행된 실험이, 다른 모든 실험 방식을 무효화하고 배제하는 도구로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이 실험 방식은 효율성과 지배력을 확대하면서, 다른 모든 형태의 실험 방식, 다른 방식으로 신체와 관계 맺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계 맺는 모든 방식을 억압하는 도구로 변모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인이 스스로를 위해 발명한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다윈이 진화론을 얘기하며 사용했던 표현을 빌려오고자 합니다. “근대인은 자신을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하고 이 몸짓을 모든 타자에게 강요했습니다.” 이제 저는 근대인의 입장에서 말해보겠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몸짓을 발명했으며, 이를 통해 신체들을 구성하는 방식을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방식을 우리의 경험 속에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타자들에게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근대인이 이를 수행했을 때,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타자들에게 던질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질문하는 척하면서도, 사실상 그 답을 미리 정해두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과정을 식민화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타자들에게 이미 결정된 답을 강요하면서도, 마치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가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인이 만들어낸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연은 객관적이며, 보편적이고 모두에게 공통된다.” “자연은 스스로 드러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근대인은 자신들의 추상화, 자신들의 몸짓들, 그리고 자신들의 질문 방식 자체를 존재 그 자체로 변형시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천을 은폐한 채, 그것을 자연의 법칙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저는 자연이라는 개념이 오랫동안 우리를 사로잡아 왔으며, 그 결과가 매우 파괴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자연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연 개념이 실천들의 길들이기(domestication of practices)와 식민화에 기여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물론, 이 개념이 애초부터 그러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현실 속에서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렇습니다. “현재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요?” “만약 우리가 자연이라는 개념을 제거한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떻게 변할까?

 

이는 전형적인 철학적 실험입니다. 철학자들은 종종 하나의 개념을 제거한 뒤, 그 결과를 살펴보는 방식으로 사고하죠. 저는 사회학, 정치학 등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렇게 제안하곤 합니다. “자연이라는 개념을 제거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봅시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 철학적 실험은 비교적 단순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이라는 개념을 제거하고 무엇을 갖게 될까요?

 

, 이제 실험을 시작해봅시다. 우리는 지금 자연이라는 개념을 우리의 사고에서 제거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을 다루는 방식에서 자연이라는 공통된 실체를 가정하지 않지요. 그렇게 한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그 결과, 우리에게 남는 것은 신체들, 거시적 유기체들, 물리적 실재들, 생물학적 요소들, 살아 있는 존재들 등입니다. 곧 우리는 기존과 동일한 것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제 우리는 이 거대한 존재들의 집합을 자연이라는 공통된 실체로 환원하지 않고, 각각의 존재 그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하여 이러한 존재들이 형성하는 관계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존재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미 수많은 연결과 관계들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단일한 자연이라는 범주 안에서 위계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아니라, 젠더, 실존 영역(domain of existence), 물리적 차원, 생물학적 차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차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존재들은 단순한 생물학적 관계들만 맺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포식, 동화, 관심, 미적 감정, 즐거움 등의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존재합니다. , 이 모든 요소가 각 존재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매우 아름다운 직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20세기 초반, 20세기의 첫 순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인격적 삶들(personal lives)’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 삶들은 어떤 수준에서든 복잡성을 띨 수 있으며, 인간 이상(super-human)일 수도, 인간 이하(infra-human)일 수도 있다.” “이 존재들은 서로를 인지하며, 시행착오와 노력을 통해 변화하고 진화한다.” “그들의 상호작용과 축적된 성취가 세계를 구성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이 직관은 19세기 범신론(pantheism)의 일부 요소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존재들을 인격적 삶들로 대우하라.” “이 존재들의 삶을 따르라.” “그들을 공통된 공간(common space) 속으로 환원하지 말라.” “공통된 것은 이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스스로 생성될 것이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달리 말해, 존재들이 이미 공통된 공간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공통된 것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연이라는 개념이 제거된 이후의 세계를 탐색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격적 삶들이라는 개념을 매우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인간 이상 또는 인간 이하 존재들의 인격적 삶들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각각의 실재를 하나의 개성(character)으로,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그리고 하나의 경험의 중심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존 듀이(John Dewey)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곧 경험의 중심이자, 삶의 중심입니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상호작용을 통해 다수의 공통 실재들을 생산합니다.

 

우리는 자연이라는 개념이 만들어낸 통합성(unification)을 벗어나기 위해, 근대가 피상적이고 부차적인 특질이라고 간주하며 제거해 왔던 그러한 특질 모두를 모든 실재 속에 다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미적 감각, 가치들에 관한 감각, 지향성(intentionality)조차도 모든 실재에 내재한 요소로 간주해야 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접근은 새로운 인류학의 발전과 맞물려 있습니다. 인류학이 지구를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multiplicity of ways of inhabiting the Earth)’을 탐구하는 것과 이 철학을 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비베이루스 데 카스트루의 말을 인용하려 합니다. “여러 민족지학자가 지적했듯이, 신세계(New World)의 거의 모든 원주민 사회는 다수성의 관점들의 집합체로 구성되는 세계(the world as composed of a multiplicity of points of view)’라는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 각각의 실존은 하나의 지향성의 중심이며, 다른 존재들을 그들 각자의 특성과 능력에 따라 파악(apprehending)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제와 결과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상대주의로 환원될 수 없다.”

 

저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급진적 관점주의(Radical Perspectivism)’라고 부릅니다. 이 개념은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에서 들뢰즈에 이르는 기나긴 철학적 전통과 연결됩니다. 이 급진적 관점주의는 각각의 현실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경험의 중심으로 간주합니다. 그에 따르면, 각 현실은 그것의 관점(point of view)에서 다른 실존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세계에 대한 해석을 생산하며, 우리가 살아 있는 영토들(alive territorie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또한 생산합니다. 살아 있는 영토들 말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영토들은 각각의 존재들에게 있어 의존(dependence)의 연결망이자, 주의(attention)의 연결망을 의미합니다.

 

동물은 환경속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동물이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마치 자연이 그들을 위한 일반적 자원인 것처럼 가정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동물은 자신의 살아 있는 영토들을 살아가고 생산합니다. 그 영토들은 동물이 필요로 하는 자원이자, 그 자신의 실존을 가능케 하는 사물들이며, 그 동물의 실존에 참여하는 모든 현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특정한 공간이 사라진다고 말할 때, 단순히 거기에 존재했던 생명체들의 숫자를 계산하는 것이 항상 낯설었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a living)는 언제나 살아 있는 영토들’, 즉 그가 살 수 있도록, 그리고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물들의 연결망에 연결되어 있다는 주요한 관념을 우리는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저는 강연의 핵심 가설로 다시 돌아가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근대인은 자연이라는 개념을 발명하여 지구에 거주한다.” 그러나 이제 저는 이 관념을 전복시키고자 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구를 자연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버리고, 자연을 이 예술들을 통해 해석하는 방식으로 전환한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이 의존의 연결망, 즉 서로 다른 방식으로 모두 함께 연결된 존재의 연결망을 통해서 본다면요. 저는 이제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의 경험 양태들의 다원성(multiplicity)에 강력한 견고성(consistency)을 부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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